어쩌다 이런 가족
전아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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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말이 되면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을 읽기 위하여 여성 월간지를 살 정도로 신작소설에 빠졌던 시절도 있습니다만, 소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어쩌면 TV드라마가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즘에는 드라마마저도 시들해진 것은 다시 돌아간 책읽기에 필요한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해진 까닭에 더하여 드라마에 재미가 덜해진 탓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드라마 가운데 ‘막장’ 드라마라는 정체가 모호한 분야가 있습니다. 세상에 저런 일이 있을까 싶은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탓에 그만 보아야겠다고 하면서도 묘하게도 끌어당기는 맛이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결말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장을 지향하는 드라마 때문인지 막장을 지향하는 소설도 등장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막장을 내세운 전아리 장편소설 <어쩌다 이런 가족>입니다. 드라마처럼 등장인물도 부모와 두 딸이 핵심인물이고 핵심인물 주변에 조연이 몇 사람 등장합니다. 막장으로 가는 이야기에 특정 부류가 있을 까닭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상류층이라고 하면 뭔가 색다른 무엇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국내 최고 출판사를 운영하지만 해결사를 동원하기도 하는 다혈질 아버지 서용훈과, 뼈대 있는 집안 출신으로 평생 우아하게 살아온 어머니 유미옥. 부모의 뜻대로 성장해온 별명마저 마더 테레사인 첫째 딸 서혜윤, 돌연변이처럼 튀는 행동을 해서 언니와 비교되는 둘째 딸 서혜란이 핵심 등장인물입니다. 사건은 첫째 딸이 XX 동영상을 미끼로 협박을 받게 되었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핵심인물들은 성격대로 상황처리에 나서게 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야기의 구성이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노부선생님, 안녕!; http://blog.joins.com/yang412/14159123>에 나오는 「시노부선생님의 상경」에서도 엄격한 집안의 아이들이 자작 납치극을 벌이고 시노부선생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는 것처럼 큰 딸이 벌인 자작극에 온 식구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러 드는 것이 차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그 해결방식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막장 드라마 같은 소설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막장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처럼 <어쩌다 이런 가족>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천성이라는 것 혹은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가능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결말의 충격이 대단했기 때문인지 핵심등장인물 모두가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한 것으로 비쳐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젊은 작가이다 보니 처음 듣는 유행어(?)를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입니다. “진짜 노는 물이 다르다는 건 태어나기 전 양수의 수질부터가 다르다는 거(15쪽)” 그런가 하면 “일단 집에 발을 들인 사람은 동냥을 하러 온 거지일지라도 손님이므로 먼저 예의를 차려 대접해야 한다(96쪽)”라는 고풍스러운(?) 개념도 등장합니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주연급 등장인물 4명과 조연급 등장인물 3명이 이끌어가는 20꼭지의 이야기들이 교차되고 있고, 그 이야기의 핵심을 요약은 제목을 달았다는 점입니다. 작은 제목이 달린 소설을 읽어본 기억이 까마득하기에 눈길을 끌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둘째딸 혜란이 가장 많은 여섯 꼭지에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혜란을 주인공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 일이란 자고로 없었던 듯 지내다보면 기억 한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고 종국에는 정말 없는 일처럼 되는 법’이라는 어머니 유미옥의 철학에 따라 일을 처리했더라면 막장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랬더라면 이야기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떻든 살아가면서 참고할만한 경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작가는 이 막장 이야기를 통해서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고 느낄 때일수록 서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기를 희망하는 것 같습니다. 불편함을 토로하고, 상대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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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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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방송을 보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건, 심지어는 집단성폭행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할 정도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적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이 과거보다 위축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이런 사건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과거에는 쉬쉬하고 숨겨지던 사건들이 봇물 터지듯 노정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토니 포터의 <맨박스>는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남성들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남성의 집단 사회화 과정과 여성 폭력 간의 공통분모를 연구하고 바람직한 남성성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TED에서 한 <남성들에게 고함(A Call To Men)>이라는 제목의 강연은 미국 GQ매거진이 꼽은 ‘모든 남성들이 꼭 보아야 할 TED강연 톱10에 들었다고 합니다.


<맨박스> 역시 저자의 TED강연과 같은 맥락에서 저술한 것입니다. 즉, ‘남자들에게 남자로서 가질 수 있는 훌륭한 자산(매사에 성실하고 가족을 돌보는 남편이나 남자 친구, 또는 아버지로서의 자긍심)은 지키되 남성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돌아보라는 당부를 담고 있다(10쪽)’라는 것입니다.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겉으로 보아도 착한 모습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렇듯 ‘착한 남자’들이 문제적 행동을 저지르는 바탕에는 사회적 학습을 통하여 만들어진 남자들만의 특권의식과 그릇된 남성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가정폭력, 십대 데이트폭력, 성폭력, 성매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적대감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는 ‘맨박스’라는 용어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의 규범’을 말합니다. 맨박스 가운데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남성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아끼고 근면성실한 사회의 일꾼이며 누군가의 멘토 역할을 한다’라는 것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남자다움이란 여성들의 관점과 삶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떨어지는 것’, ‘남성은 책임자이자 상황을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배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자 관심의 대상, 그중에서도 특히 성적인 대상’이라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맨박스는 이성에 대한 우월주의와 호모포비아가 깃들어 맨박스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맨박스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어온 과정을 돌아보고, 그와 같은 인식에 변화가 생긴 이유를 설명합니다. 저자는 뉴욕의 할렘가에서 태어나서 브롱크스 지역에서 성장했지만, 나름대로는 건실하게 성장해왔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10대 초반부터 이미 집단성폭행사건에 엮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자신은 친구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동네 짱이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여자 아이를 성폭행하고는 마을 소년들을 불러 모아 집단성폭행을 유도하였던 것입니다. 짱이 ‘할래?’하고 물었을 때, 어린 생각에도 ‘결정 여하에 따라 남자로서의 평판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수도 있겠다’라고 판단했던 것이고, 동참은 하되 실제로는 한 척하는 것으로 허세를 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직접 선동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면 무죄’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인데, 생각해보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친구들을 말리지 않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맨박스가 만들어내는 인식 가운데 ‘동지애 또는 형제애라고 하는 남자들끼리의 동맹은 구성원 중 누군가가 부적절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잘못을 묻지 않는다(40쪽)’라는 것이 결정적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맨박스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뜯어고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나,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면 의외로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나가는 여성에게 치근대고 있는 남성이 있다면, 그 지나가는 여성이 자신의 아내 혹은 딸이고, 생면부지의 남자가 치근대는 장면을 본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당장 쫓아가 주먹을 날리지 않겠습니까?


물론 가족들에게 폭행이나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성도 없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바뀌어야 할 점이 많다고 저자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가정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 ‘왜 그런 남편하고 헤어지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서도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 ‘왜 폭력을 멈추지 않습니까?’하고 비난하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을 때린 남성은 형사법원으로 보내지는 반면 아내를 때린 남편은 가정법원으로 보내지는 것은 대부분의 사회와 법체계가 맨박스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딸이 없어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딸을 얻어 처음 눈을 맞추게 되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신의 세계가 변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즉 지금껏 자신이 주변 여성들에게 내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자신의 딸에게 주어지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딸이 자신과 같은 남자와 결혼하면 좋을지를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기존행동이 주는 편안함보다 새로 알게 된 지식이 주는 불편함이 더 크게 느껴지면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떨쳐내야 합니다. 관성의 법칙을 깨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맨박스를 깨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남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책의 4장과 5장에는 저자가 다양한 과정을 통하여 수집한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특히 스스로 선한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털어놓는 경험담은 일부 폭력적인 남성들의 사례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물론 선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지만, 두 집단 사이에는 공통점이 분명 있습니다. 즉 선한 남성들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남성지배적 문화를 퍼트리는데 기여해왔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해당 사례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함께 생각할 문제도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6장 ‘아이들이 알아야 할 진짜 남자다움’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입니다. 즉 남성으로서의 맨박스가 결정되는 시기의 남자 어린이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어른들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부터 다섯 살 무렵까지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과 대체적으로 같은 경험을 공유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시기의 남자아이들은 ‘남자답기 위해’ 여자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심지어는 혐오감을 드러내도록 학습하게 됩니다. 남자아이들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의 딸들을 위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즉 딸들이 평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에서는 남성들은 매우 친절하며 예의가 바를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남자아이들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어른들은 그런 감정들을 공유하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맨박스를 해체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저자는 생각합니다. 남성들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일어나는 인식의 변화 과정을 흥미롭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득권이라고 생각해온 무엇을 포기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맨박스 안에서의 삶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끼게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남성의 여성폭력과 관계된 사건들을 보면 저자의 말대로 맨박스 안에서의 삶이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남자다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즉 새로운 맨박스가 만들어질 날이 올 것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남자다움의 정의, 즉 맨박스는 세 가지 큰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입니다. 둘째,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리고 셋째,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라는 시각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 문화를 조장해온 남성중심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으로, 왜곡된 남자다움을 만든 주범인 남성중심주의를 하루 빨리 없애야 할 것입니다.


서구 남성들은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고 우리는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오히려 서구 남성들은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결혼식의 한 장면을 예로 들었습니다. 서구화물결을 타고 우리 주변에서도 일상처럼 보는 장면입니다만,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가 딸의 손을 붙잡고 입장해서는 사위가 될 남성에게 인계하는 것은 딸에 대한 소유권이 이전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결혼한 여성이 처녀 때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혼례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역시 우리네 옛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네 사회에서도 ‘사내 녀석이 그러면 못써!’라는 식으로 사내아이에게 남성성을 세우도록 은연중에 심어왔습니다. 그로 인한 문제점들은 대부분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왔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 책의 저자 토니 포터와 같은 분들이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남성들이 자발적으로 잘못된 남성적 관행을 고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폭력의 뿌리가 닿아 있는 맨박스를 개선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변화가 자리 잡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1. 남성 중심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2. 가정 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몫입니다, 3. 폭력과 차별은 종류와 관계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4.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5. 여러 억압 행위에는 교차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6.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 참여를 유도해야 합니다, 7. 남성 스스로 남성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저자는 ‘사회에 자리 잡은 남자다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남성들이 이끄는 여성 폭력 방지 운동을 만들어내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며 존중하는 동시에 남성들에게 진심 어린 애정과 희망을 가지고 활동을 이어나가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저자 토니 포터와 함께 ACTM (A Call To Men)을 창설한 테드 번치는 가정 폭력 대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법원의 명령으로 26주에 걸쳐 상습 폭력방치 치료를 받는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토니와 만난 테드는 가정 폭력, 성폭력, 성매매 그리고 여성을 향한 다양한 학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성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ACTM 활동의 토대가 될 이론을 세우고 이의 확산을 위하여 노력해왔다고 합니다. 초기 ACTM활동은 방관자적 태도를 개선하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점차 남성성의 모든 면을 다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모든 남성들과 남자아이들이 다정하고 정중하며, 모든 여성들과 여자아이들이 소중하고 안전하게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남성성을 진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남성들이 전통적인 맨박스에서 해방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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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지
니콜라 파르그 지음, 이혜원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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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곧 가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미지의 땅입니다.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해서, 유럽을 거쳐 남아메리카에 발자국을 찍었으니 이제 아프리카 순서가 되었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아프리카에 대한 공부를 해보려고 합니다. 가볍게 시작해 보려했던 것과는 달리 쉽지 않은 책읽기였던 것 같습니다. 우선 마다가스카르가 어디인지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금년에 회사에서 의료봉사를 떠난 곳이 마다가스카르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종착지>는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마다가스카르로 모여든 프랑스 사람들이 마다가스카르에서 겪는 혼동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혼동의 원인은 어쩌면 프랑스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 사이의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앞서 책읽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등장인물이 도대체 몇 사람인지 구분이 쉽지 않고, 이들이 서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관계가 긴밀하지 않은 별개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떻든 무대는 마다가스카르의 남단에 있는 디에고 수아레스입니다. 공항도 조그맣지만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이라고 해야 할 디에고는 빈민굴에 가까울 지경이라고 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왜 디에고에 모여드는지도 모호한데, 이들과 디에고에 사는 프랑스 사람들 혹은 마다가스카르 원주민들 사이의 시각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원주민들은 프랑스 사람을 만나 한 몫을 챙기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챙긴 것으로 마다가스카르를 떠나 프랑스로 가려는 꿈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사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각각 가지고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마다가스카르에 주저앉은 프랑스 사람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프랑스의 일상에 신물이 났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도착한 사람들은 말라리아를 옮긴다는 모기가 왱왱거리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절대로 마시면 안 된다고 겁을 주니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방적인 성문화에 휩쓸리다보면 서로의 관계가 모호해질 수도 있는데, 저자 역시 이곳에서 4년을 체류하는 동안 아내와 이혼해야 했던 것이 작품 어디엔가 녹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필립과 동료 에르페 사이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모두 광기에 휩싸여서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거지. 디에고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데야. 아주 썩을 놈의 동네지. 전체 분위기가 그래.(138쪽)” 마다가스카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지역 간의 갈등도 있다고 하는데, 고원지역과 해안지역 사람들 사이에 차별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원지역은 동양계의 이목구비를 하고 있는데, 주로 관청이나 은행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러인데 반하여, 해안지역은 아프리카계의 얼굴을 한 흑인들로 고원지역 사람들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갈등을 빚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되지 않는 부분은 저자와 옮긴이의 설명이 차이가 있는 것도 한 몫을 합니다. 저자는 분명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지 겨우 4일 째 되던 날 이 책을 쓰기 시작해서 1년 만에 끝마쳤다고 서문에 적었습니다. 그런데 옮긴이는 <종착지>는 작가가 마다가스카르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3인칭의 시점을 통해 써내려간 일종의 체류보고서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디에고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 원장으로 4년간 체류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자의 설명이 무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저자는 이 책에서 인종과 문화 간의 갈등, 그리고 남녀 간의 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그 시발점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오해라는 것을 풀어내는 모종의 기전이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종착지’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삶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흘러드는 그런 곳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공연한 것일까요? 저자는 왜 마다가스카르를 종착지라고 생각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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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역의 종식 - 근대 전염병 연구의 역사
야마노우치 카즈야 지음, 천명선 외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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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중동에서 유입된 메르스 때문에 보건의료계가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감염병도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감염병(感染病, infectious disease)은 세균, 스피로헤타, 리케차, 바이러스, 진균, 기생충과 같은 여러 병원체에 의해 감염되어 발병하는 질환을 말하고, 여러 사람에게 전파되는 감염병을 전염병(傳染病)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빠르게 확산되는 전염병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만,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전파되는 모든 감염병을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건복지부가 2015년에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전염병이라는 용어가 감염병이라는 용어로 바뀌었습니다.


돌이켜보면 60년대만 해도 콜레라, 장티푸스 예방접종을 받고, 여름이 되면 이들 감염병 발생이 뉴스가 되곤 했습니다. 물론 홍역이나, 볼거리와 같은 바이러스 질환도 꾸준하게 발생하여 예방접종이 권장되었고, 결핵이나 성매개질환을 근절하려는 당국의 노력이 경주되어 왔습니다. 21세기를 넘어오면서는 생활환경의 개선으로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수인성질환은 드물어졌지만, 바이러스성 질환 특히 조류독감등 인수공통 감염질환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지난해 유행했던 메르스 역시 낙타에서 유래한 인수공통 감염질환입니다.


방역당국이 조류독감에 대하여 민감하게 대응하는 이유는 20세기 초에 대유행했던 스페인독감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시작해서 종전 직후에 정점을 찍었던 스페인 독감은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의 변형인 H1N1 바이러스가 원인균입니다. 당시 세계인구가 약 16억명이었는데, 약 6억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는 최소 2,500만에서 최대 1억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니, 중세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페스트에 버금가는 재난이었던 것입니다. 2005년에 들어서야 스페인독감은 조류독감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조류독감이 돼지 체내에서 사람의 독감과 섞여 변종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2008년에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광우병 역시 인수공통감염병으로 페스트에 버금가는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감염체와 확산경로가 파악되면서 방역이 가능하였고, 특히 사람으로 전파되는 과정에 우려했던 것보다는 파급력이 크지 않았던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사실은 2008년에 어느 정도는 밝혀져 있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파될 위험을 제로 수준에서 관리하라고 목청을 높이던 분들이 지난 해 메르스사태에서는 어디로 갔는지 오리무중이었던 점도 묘한 일입니다.


이번 주 [북소리]에서 <우역의 종식>을 고른 것은 인수공통질환이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점과 천연두에 이어 두 번째로 박멸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감염병이라는 점을 고려하였습니다. 우역 (Rinderpest, 牛疫)은 다행히도 사람에게는 감염을 일으키지 않지만 소들 사이에는 전파력이 강하고 폐사율이 70%에 달하는 치명적인 감염병입니다. 이름에 페스트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는데, 이 때문에 이 병의 정체가 헷갈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우역의 감염체는 사람에서 유행하는 홍역, 볼거리, 파라인플루엔자 등을 일으키는 파라믹소 바이러스과에 속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31년까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근대 전염병 연구의 역사’라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우역의 종식>은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우역의 존재를 살펴보았고, 가의 근간을 흔들기도 했던 이 질환이 근절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정리하였습니다. 이 책을 쓴 야마노우치 카즈야(山内一也)는 기타사토 연구소와 국립예방위생연구소, 도쿄 대학 의과학연구소 등을 거치면서 40년 넘게 우역바이러스 연구에 종사하였고, 지금은 도쿄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합니다. <우역의 종식>에서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우역이라는 감염병의 존재, 우역이 근대 수의학이 성립하는데 미친 영향, 우역의 본질과 예방법이 개발된 경위, 일본에서의 우역대책(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의 우역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는데, 일제의 식민정책 가운데 우리나라를 일제의 우역방역의 실험무대로 이용한 정황이 있습니다.)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역에 걸린 소는 처음에 열이 나다가 2,3일이 지나면 먹지 않고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눈물, 콧물, 침 등 분비물이 많아집니다. 이어 구강점막이나 잇몸에 미란과 궤양이 생기고 설사가 심해집니다. 설사가 심해지면 탈수증에 빠지면서 6-12일 사이에 폐사에 이릅니다. 관찰한대로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은 하지만 사실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감염병을 오늘날의 감염병과 견주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집트 카훈에서 기원전 2130년부터 193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측되는 파피루스에는 심한 장염 증상을 보인 수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례가 우역으로 추정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염을 일으키는 질병이 우역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성만 열어놓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은 무탈하고 이집트 백성의 가축만이 죽어나간 역병을 우역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역바이러스에 눈이 달려서 이집트 소와 이스라엘 소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며, 당시 우역바이러스의 예방법이 개발되어 있던 것도 아닐 테니 말입니다.


어떻든 우역으로 보이는 소의 감염병은 그리스, 로마 시절에도 꾸준하게 발생하였다는 기록을 검토하고 있고, 18세기에는 유럽 전역을 통하여 모두 2억 마리의 소가 우역으로 폐사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오늘날 지구상에 모두 14억 마리의 소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나아가 서고트족이 보유하던 소들이 우역으로 폐사한 것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고, 진압에 실패한 것이 계기가 되어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었다는 해석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프랑스 혁명에도 우역이 기여한 바가 있다는 해석도 지나친 아전인수 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13세기 유럽을 침공한 몽골군이 들여온 소가 가져온 우역 때문에 유럽 소들이 폐사하였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그레이 스텝 소라고 부르는 몽골의 소는 질병에 강한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유럽국가들이 몽골의 소를 들여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병리학을 전공해서인지 ‘우역이 병리해부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36쪽)’는 저자의 주장을 검증해보고 싶었습니다. 우선은 병리해부학이라고 뭉뚱그린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병리학이 해부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별개의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해부학의 역사는 기원전 280년 무렵의 고대 알렉산드리아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 이룩한 성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12세기 이탈리아에서 인체해부가 재개될 때까지는 암흑이었습니다. 결국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1514~1564년)의 명저 <인체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가 최초의 현대적인 해부학 책이 될 때까지 해부학의 연구는 지지부진했습니다. 위대한 의학자 갈레노스를 맹신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돌보던 환자가 죽게 되면 사인이 궁금했던 의사들은 많았을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병리학은 이런 배경에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환자가 죽은 다음에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해부를 시행하는 것을 부검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탈리아의 해부학교수 란치시는 동물의 질병과 사람의 질병을 비교하는데 관심이 많았는데, 가장 유명한 육안병리학자로 알려진 지오반니 모르가그니(Giovanni Morgagni; 1682-1771)가 란치시의 제자였기 때문에 우역이 병리학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병리부검은 아라비아의 의사 아벤조아르(Avenzoar; 1091-1161)가 처음이었으며, 서양에서는 이탈리아 의사 안토니오 베니비에니(Antonio Benivienni; 1443-1502)가 죽음의 원인을 찾기 위하여 해부를 시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역때문에 현대병리학이 시작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수의과대학이 개설되고 국제수의학회가 발족하고, 나아가 세계동물보건기수가 창립되는 데는 분명 우역이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엄청난 피해를 준 우역의 원인체는 1902년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의사 모리스 니콜과 터키의 수의사 무스타파 아딜 베이에 의하여 발견되었습니다. 원인균이 발견되기 전부터 우역을 예방하는 방법이 연구되었습니다. 18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요한 카놀드는 우역의 의학적 특징이 천연두와 닮았다고 했습니다.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천연두 환자의 부스럼을 소량 흡입하는 인두접종법으로 천연두를 예방했던 것입니다. 1714년에 인두접종법을 완성한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의 의사 엠마누엘 티모니였습니다. 우역의 접종은 이보다도 앞선 1711년 이탈리아에서 우역이 발생하였을 때 라마니치가 제안했지만, 시행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기록상으로는 1745년 영국에서 성공적인 우역접종실험결과가 보고되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무렵 만해도 우역의 접종이 오히려 병원체를 소떼에 확산시키는 부작용이 나타나는 등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우역에서 회복한 소의 혈청을 가지고 우역을 치료하는 면역혈청법이 개발되었습니다. 우역바이러스를 불활화하여 백신으로 개발하는 실험이 1911년 일제가 부산에 설치한 우역혈청제작소에 근무하던 카키자키 치하루에 의하여 1917년 완성되었습니다. 부산의 혈청제작소는 뒤에 나카무라 준지가 약독화백신을 개발하는 등 우역예방에 크게 기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왜 본토가 아니라 부산에 혈청제작소를 세웠을까요? 1924년 3월에 조선과 중국의 국경 부근에서 다수의 소에 불활화백신을 접종하였는데, 우연히 12월에 우역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백신을 접종한 소는 대부분 발병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답이 보일 것 같습니다.


키시 히로시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6세기 전반에 저술된 서적에서 우역이 언급되기 시작했고, 조선에서는 1399년 간행된 저술에 우역이 기술되었고, 일본의 고서에는 1697년의 저술에 우역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우역이 조선으로부터 들어와 유행을 했던 것으로 파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자는 조선에서 소와 피혁의 수입을 자제토록 한 적도 있지만, 밀수 등의 경로까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조선의 농가에서는 소가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에서도 소를 적극적으로 관리해왔다고 알고 있기에 다소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20세기 초반, 일본정부의 우역방역의 최대 과제는 조선에서 수입되는 소를 통하여 유입되는 우역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역방역의 제1선을 조선에 마련하고 한반도에서 우역을 박멸할 것과 중국에서 조선으로 우역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국경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유행병을 예방하기 위한 백신의 실험도 완벽하지 않아서 그로 인해서 유행병이 번질 수 있다는 것을 일본 수의학자는 물론 정부에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일본 국내에서 백신제조실험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을 시험장소로 삼았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에는 아프리카지역에서 우역의 발생이 이어져,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우역박멸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결과 2011년에 UN은 우역이 멸종했음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우역은 천연두에 이어 두 번 째로 지구상에서 공식적으로 멸종된 바이러스성 전염병이 되었습니다.

조류독감, 메르스에 이어 지카바이러스까지 인수공통 감염병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전염성이 강한 감염병은 방역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역의 종식>을 통하여 감염병 관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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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사과의 기술 -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사과는 무엇이 다른가
에드윈 L. 바티스텔라 지음, 김상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사과’라는 단어를 적어놓고 보면, 달콤할 것이라는 느낌과 쓸 것 같다는 느낌이 차례로 떠오릅니다. 우선은 달콤하거나 때로는 새콤한 사과를 먹고 싶다는 생각과,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통스럽게 고민했던 순간이 떠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느낌이 쓴 사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이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동양이나 서양 모두 공통적일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1949년에 제작된 서부영화 <황색 리본을 한 여자>에 출연한 영화배우 존 웨인이 ‘이봐, 절대 사과하지 마. 그건 약하다는 표시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 주인공 브리틀스 대위를 연기한데서 ‘존 웨인법’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변해서 이제 진정한 사과는 “패자의 변명이 아닌 리더의 가장 쿨하고 현명한 전략”이 되고 있습니다. 사과가 왜 현명한 전략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꽤 오래 전에 아론 아자르가 쓴 <사과 솔루션; http://blog.joins.com/yang412/12867010>을 [북소리]에서 소개하면서 다룬 바 있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면서 ‘사과’란 “일방, 즉 가해한 측이 자기 잘못이나 그가 얻게 된 원성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를 본 상대에게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표현함으로써 양측 당사자들이 조우하는 것”(48쪽)이라는 설명을 인용하고 ‘하지만 사과에 사용되는 단어와 상황에 따라서는 동정이나 유감의 뜻으로 변질되거나 오히려 사과의 의미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라는 제 생각을 적었습니다. 사과의 뜻을 제대로 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에드윈 바티스텔라교수의 <공개 사과의 기술>은 이런 고민을 더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는 미국 오리건 주 애쉴랜드에 있는 서던오리건대학의 인문학부에서 언어의 형태적 현저성, 태도, 구문론 등을 연구하는 언어학자입니다. 사과편지 쓰는 것을 도와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사과의 뜻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이 책을 쓰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저자는 사과에 사용되는 언어, 철학, 사회학 등을 검토하여 사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사과의 바탕에 깔려 있는 원칙을 이해함으로써 사과를 잘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자가 서문에 요약한 이 책의 얼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10개의 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의 말미에는 서너개의 대표적 사례를 정리하여 책 읽는 이가 논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모두 36개의 사례들은 사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장에서는 사과의 절차와 사과에 사용된 언어를 소개하고, 5~6장에서는 고백과 변명에 초점을 맞추며, 7~8에서는 전국적인 차원의 사과와 국제적 사과를 다루었습니다. 9~10장은 사과의 동기와 대중문화에 나타난 사과를 논합니다.


저자는 우선 캐나다의 사회학자 어빈 고프먼이 <공생적 관계>에 적은 ‘우리는 사과할 때 자신을 둘로 분리한 뒤 과거의 자신을 던져버린다’라는 사과의 이론을 인용합니다. 고프먼은 “사과는 비난받아 마땅한 자신과, 한 발 물러서서 비난하는 사람들과 공감하는 자신, 다시 말해 정상적인 관계로 복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신으로 분리하는 행위를 나타낸다(22쪽)”라고 사과를 요약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분명 자신이기는 하나 과거의 자신이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자신과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연중에 새로운 자신은 과거의 자신과 달리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자랑스럽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과를 하는 데는 외적인 이유와 내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는 아론 아자르의 설명과 부합됩니다. 내적인 이유는 피해를 당한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고, 자신을 처벌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며, 자기 이미지에 값하지 못한 실수가 수치스럽다는 것이며, 외적인 이유는 잘못을 바로 잡고 자신의 평판을 복구할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기 보다는 설명을 통하여 부득이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과보다는 해명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해명과 사과는 언어를 통하여 잘못의 의미를 바꾼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과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데 반하여 해명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사과를 한다는 의미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사과가 이루어지려면 사과하는 사람보다는 사과를 받는 사람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상대와 교감이 잘 된 경우에는 수위가 낮은 사과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상대의 의중과 겉도는 사과는 넘치는 수위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가해자가 인정하거나 잘못한 내용을 적시하고 피해가 발생했음을 이해하는 ‘적시’의 단계와 가해자가 잘못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보완적’ 단계가 있습니다. 물론 사과에 대한 피해자의 응답 역시 수락하거나, 거부하거나, 재논의를 하는 등의 선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과하는 구체적 방법, 즉 사과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룬 부분을 읽으면서 문화적 차이를 실감하게 됩니다. 옮긴이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습니다. 영미권에서 사과에 보통 쓰이는 말로는 “sorry(미안합니다)”, “regret(유감입니다)”, “I was wrong(내 잘못입니다)”, “forgive me(용서해주세요)”, “excuse me(실례합니다)”, “pardon(미안합니다)” 등이 있고, “I apologize(나는 사과합니다)”를 가장 공식적인 말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I apologize”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사과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지만, 다른 표현들은 사과의 의미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암시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sorry”는 화자의 감정을 드러내는 형용사이며, “regret”은 정신 상태를 알려주는 능동사, “I was wrong”은 도덕적 혹은 사실관계의 오류를 인정하는 말이며, “forgive me”는 정중한 지시로 표현된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I apologize(나는 사과합니다)”의 경우도 완벽한 모양새를 갖추려면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로’라는 직접 목적어와 간접 목적어를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진심으로’와 같은 부사를 사용하거나 ‘~를 하고 싶습니다’와 같은 어구를 더해서 사과의 의미를 보완하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존 설은 사과를 적절하게 하는 네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1. 진술은 화자의 과거 행동을 언급하고, 2. 화자는 그것이 피해를 끼쳤음을 인정하며, 3. 그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4. 그 언어 행동은 화자와 청자가 공유한 언어에서 사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이를 명제적 행동, 준비 조건, 신실성 조건, 필수 조건이라고도 합니다.)(82쪽)


저자는 신실한 사과만 다룬 것이 아니라 자기변호, 즉 변명에 관해서도 언급합니다. 새뮤얼 존슨은 1775년에 펴낸 영어사전에서 apologize라는 동사를 ‘특정인이나 사물을 편들어 호소하다’라고 정의하고, 명사는 ‘변호보다 변명’에 무게를 두었다고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수사학자 B.L. 웨어와 윌 린쿠겔이 소개한 부인(denial), 생색내기(bolstering), 차별화(differentiation), 초월(transcendence) 등 자기변호의 네 가지 전략을 인용하고, 이를 각각 ‘나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다’, ‘나는 더 높은 소명의식이 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한편 베노이트는 이 전략을 부인(denial), 회피(evasion), 축소(reduction), 시정(correction), 굴욕(mortification)의 다섯 가지 수사적 대응으로 세분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정치인들의 행동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들이 무언가 잘못한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행보는 잘못과 그에 대한 사과로 점철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뒷날까지도 입초시에 오르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닉슨대통령의 워터게이트사건, 클린턴대통령의 성추문사건 등 대표적 사례에 대한 분석도 있습니다만, 국가 차원의 사과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한 뒤, 미국 정부는 모든 일본계 주민을 미국 국적 불문하고 ‘전시 재배치 기구’에 신고토록 하였고, 모두 11만 7천명의 일본계 미국인과 일본인들이 10개 수용소에 억류되었다고 합니다. 억류상황이 끝난 뒤 43년이나 지난 1988년에서야 미국 의회가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며 조지 부시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도 억류자들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사례처럼 물려받은 죄에 대한 사과의 책임이 계승자에게 있는가하는 질문에 대하여 사회 비평가 카밀 파글리아처럼 “사과란 원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시각이 지나치게 협소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책임과 죄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고프만처럼 죄를 저지른 사람과 사과하는 사람을 분리한다는 개념을 적용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전임자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서 계승자들은 보다 나은 미래로 향하는 화해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전후 행보도 인용하였습니다. 종전 후 전범처리과정에서 일황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고 도조 등 일부 군국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정리하였고, 도조는 일본군이 자행한 잔혹행위에 대하여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그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주변 국가들에 끼친 잘못이 정리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994~1996년 집권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시절에서야 보수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를 극복하고 ‘사과’라는 단어가 삭제된 채 깊은 반성의 염을 표현한다는 수준에서 사과 결의안이 의회를 통과하였습니다. 저자는 무라야마 총리가 개인적 발언을 통하여 ‘진심 어린 사과’라고 표현한 것을 ‘독일 역사성 가장 어둡고 끔찍한 장’이라는 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묘사와 같이 사과를 분명하게 설명하거나 암시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와 관련하여 무라야마의 발언을 무효화하려는 움직임은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은 분명 저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옮긴이는 후기를 통하여 대한 항공의 ‘땅콩 회항’사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군이 배후에서 주도한 위안부동원과 관련하여 일본의 아베정부와 쫓기듯 협상에 조인했다거나,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둘러싼 ‘정부 책임’문제에서 과거지사로서 현 정부는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하고 있다는 등 현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것들 이외에 사항들이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박유하 지음,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 이파리, 2015년; http://blog.joins.com/yang412/13981091)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해서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여전히 현직에 남아 있고, 지금은 정권 말기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자는 ‘사과하는 옳은 방식 하나를 처방하기보다 사과가 어떻게 기능하고 어떻게 성공하며, 어떻게 실패하는지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묘사가 처방에 선행해야 하는 것은 사과의 처방에서 수단의 성격보다 진실성을 앞세우는 것이 고매할 수는 있지만, 그 처방이 현실이나 유용성 가운데 어느 하나만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책을 읽은 뒤 느끼는 점은 저자의 핵심 관심사는 사과의 언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사과의 언어에도 문화적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말을 사과의 용어로 사용하였을 때의 제반 문제점을 정리한 연구가 나와야 할 시점이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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