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번역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는 만큼 새로운 느낌이 들거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주인공 마르셀이 게르망트공작부인에게 연심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처음 읽을 때는 여성에 이끌리는 것이 부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질베르트에서 알베르틴, 심지어는 여행중인 기차에서 만난 이름모를 소녀에게 이끌리는 무엇을 발견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기우는 마르셀의 관심은 주인공을 작가의 길로 이끌기 위하여 사교계에 데뷔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마르셀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실제로 사교계에 데뷔하여 공작부인과 만나게 되면서 관계가 정리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마르셀의 작가적 소양은 어릴 적부터 책읽기를 권장해온 할머니 덕분에 싹을 틔웠고, 아버지의 권유로 데뷔한 사교계에서의 만남을 통하여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확장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작가란 상상력만으로 작품세계를 열어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파리지부인이 널 아주 좋아하고 또 부인 살롱에서 네게 유익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던데, 노르푸아 영감이 네 칭찬을 많이 했으니, 빌파리지부인 댁에 가서 한번 만나 보렴. 네가 글을 쓰게 되면 유익한 충고를 해 주실 게다. (…) 내가 너에게 바라는 최선의 길은 아니지만, 넌 금방 성인이 될 테고 우리가 항상 네 곁에 있지는 못할테니, 네가 네 소명을 좇아가는 걸 막지는 말아야지(239쪽)” 세상의 부모 마음은 다 같은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뤼스씨를 통하여 사교계가 가지는 한계에 대하여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네가 사교계에 나간다면, 자네 처지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며, 자네 지성과 성격도 망가질 걸세. 게다가 특히 친구 관계에도 주의해야 하네.(491쪽)” 사교계는 이미 성인의 세계를 의미하고, 그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해에 따라서 복잡하게 얽히기 마련인데,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마르셀이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 관심을 두었던 드레퓌스 사건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보다 집중을 하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드레퓌스 사건은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화제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늘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기 마련이니, 사그라질만도 한데 꽤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세월의 흐름을 갑자기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마르셀이 성장하는 모습에서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만, 주변인물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르셀의 사교계 데뷔를 통하여 그만큼 컸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마르셀의 삶을 이끌어주시던 할머니의 건강이 나빠지는 모습에서도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번역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계속 느끼는 것입니다만, 주석이 많아져서 도움이 되는 면도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책읽기의 흐름이 끊어지는 느낌도 남습니다. 하지만 분명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얻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다른 상황에서 이미 설명했다는 표시를 주석에서 발견하는 경우, 읽고 있는 텍스트가 아니라면 그 텍스트를 찾아 책꽂이를 뒤지기는 쉽지가 않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게으른 책읽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책읽는 흐름이 끊기는 것이 그리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번역을 새롭게 하고 계신 김희영교수님의 번역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게르망트쪽’이 나오는데 시간이 꽤나 걸린 듯해서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고 시픈 당신에게 - 늦깎이 한글학교 어르신들이 마음으로 쓴 시와 산문 89편
강광자 외 86명 글.그림 / 한빛비즈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은 지는 꽤 됐습니다만, 느낌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아 리뷰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보고 시픈 당신에게>라는 책 제목에서부터 절절함이 묻어나는 듯해서 마음이 뭉클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늦게 우리말 읽기와 쓰기를 배우신 어르신들이 가슴에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회한 같은 감정을 시로 혹은 산문으로 쏟아낸 글 89편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이 분들의 사연 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님의 글을 읽는 듯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 합니다.


89편의 글은 내용에 따라서 4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1부 ‘내 속을 누가 아까’는 처음 수록된 시 ‘우리 영감’의 첫구절에서 따왔습니다. 평생 술 때문에 끓여온 속내를 드디어 글로 표현한 것입니다. 술주정을 하실 때는 지금지금 밟고 싶지만, 곯아떨어져 자는 꼬락서니를 보면 불쌍해서 국수를 말아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는 부부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2부 ‘그 돼지는 어찌 대쓸꼬’는 역시 처음 수록된 시 ‘새끼 돼지’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여덟살 때 집마당에 들어온 이웃집 돼지가 젓단지를 핥아가 깨트리는 것을 보고 부지깽이로 때렸더니 뻗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서 숨었는데 이웃집 아주머니가 오셔서 질질 끌고 가시더라면서 그 돼지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54년이 되도록 그 돼지 소식을 듣지 못하셨던 모양입니다. 연세가 적지 않으신데도 어린이 같은 마음은 여전하신 것 같습니다.


3부 ‘책만 펴면 졸음 오니’ 역시 첫 번째 글 ‘공부는 불면증 치료제’의 중간 연을 따온 것입니다. 편집하신 분께서 나름 신경을 많이 쓰신 표시가 나는 것 같습니다. 제목처럼 3부에 담긴 글들은 나이 들어 공부하는 어려움을 하소연하시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아무래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고, 체력도 달리고 해서 어려움은 많지만, 쓰신 글을 보면 이미 경지에 이르신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진솔하고 거칠 것이 없으니 오히려 꾸밈이 많은 글보다 더 마음에 와 닿은 듯합니다.

4부 ‘내 인생에 꽃이 폈네’는 첫 번째 글의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여기 담은 글들은 모두 한글을 깨치고 나니 세상이 달라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라 남을 피하던 일이 옛일 같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어르신들이 모두 글쓰기 연습까지 만만치 않게 하신 듯, 글자체도 반듯하고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린이들이 즐겨하듯이 색깔을 달리해서 예쁘게 꾸미거나, 글내용과 관련이 있는 그림을 곁들여 마치 한폭의 시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파킨슨병을 앓고 계셔서 글이 삐뚤삐뚤 써진다고 하신 어르신도 또박또박 박아 쓴 글이 반듯하기만 합니다. 치료를 열심히 받으셔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간혹 마음이 아픈 글도 있습니다. 이제는 읽고 쓰기까지 배워서 편지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정작 그 편지를 받을 당신이 세상에 없어 편지를 보낼 수 없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적은 글입니다. 절절한 그리움을 서방님 세상 뜨실 때 남겨준 하얀 손수건에 담아 산소 옆에 달아두셨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꼭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십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사부곡, 사모곡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적어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책읽기를 마쳤습니다. 어르신들이 공부할 기회를 만들어주신 관계자 여러분들도 참 대단하시고, 또 어르신들의 글을 책으로 묶어 기념하실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한빛비즈도 참 대단한 일을 하셨네요. 제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 아메리카 인디언이 들려주는 지혜의 목소리
켄트 너번 엮음, 김성 옮김 / 고즈윈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벌써 20년도 넘은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2년 동안 미국에 머물 때 몇 차례 여행을 통하여 미국 각지에서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원주민들의 삶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소설이나 영화 등을 통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미국인들이라고 부르는 유럽이주민들을 적대시하는 존재로 각인되어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사람들이 신대륙이라고 부르는 아메리카대륙의 선주민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유럽사회와는 다른 양식의 삶을 살아온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을 따듯하게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쏟아져 들어온 이주민들에 점차 밀려나다가 급기야는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하여 팔을 걷어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술면에서나 사람의 숫자 면에서 열세였던 선주민들의 패배는 이미 예정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도 합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구전으로 역사를 전해왔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문명의 발전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환경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들이 자연친화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지구의 미래는 기울어진 인간과 지구환경의 추를 복원시켜 균형을 다시 맞출 수 있는가 에 달려 있다고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는 작가이자 교육가이며 조각가이기도 한 켄트 너번이 미네소타의 오지브에 부족에 구전되어 온 이야기들을 모은 것들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이 문자화된 자료로 전승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삶의 지혜는 일상생활에 녹아 있었기 때문에 따로 적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부는 인생과 사회에 대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의견이 담긴 연설과 몇몇 일인칭 증언에서 뽑은 글입니다. 제2부는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자 영적 지혜를 전해 준 오히예사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제3부는 세 명의 위대한 추장, 붉은 저고리, 조지프 그리고 시애틀의 연설문입니다.


오히예사는 수우족의 후예로 제가 살았던 미니애폴리스 남쪽에 있는 레드우드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특별한 삶을 살았습니다. 숲에서 자연의 방식을 배웠던 그는 아버지의 깨달음에 따라 백인들의 학교에 다녔고, 벨로이트대학과 다트머스대학에서 공부한 다음 보스턴 의대를 졸업하여 의사가 됩니다. 그리고 부족들을 진료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25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과 미국인들 사이에 이해의 다리를 놓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증언을 통하여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통하여 자연과 함께 살아온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억해주고 싶은 그들의 생각을 몇 가지 골라보았습니다. “나는 굽이굽이 물이 흐르는 땅을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한다. 아버지의 무덤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들짐승보다 못하다. 조지프 추장, 네즈퍼스족(22쪽)”, “우리는 나이가 들었다. 그런데 당신들처럼 온갖 방법으로 기록하여 기억을 간직할 기술이 없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기억들이 우리와 함께 사라질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사물의 상세한 내용을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당신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기억이 충실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우리 자손들이 지나간 일들을 대대로 알고 있고 그리하여 대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잊히지않을 것이라는 것을. 카니크훈고, 여섯 부족들의 조약 협상에서(28쪽)”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증언을 통하여 타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기독교의 교리에 의문이 커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티븐 와인버그의 세상을 설명하는 과학
스티븐 와인버그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이 변하기는 했습니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권위에 약한 편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만, 권위있는 분이 하시는 말씀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대놓고 문제제기를 삼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권위 있는 분이 그동안 쌓아온 앎을 바탕으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설마 틀린 말을 하겠느냐는 일종의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우리네 옛말도 있듯이 권위 있는 분들이 모든 이치에 통달할 수 없는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분야에서도 놓치고 있는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엉뚱한 이야기로 리뷰를 여는 이유는 특별한 의미의 과학의 역사서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서양에서는 종교가 모든 것에 우선하던 중세를 암흑기라고 일컫는 것은 신학이 정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을 내놓을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로마교회의 이단심문소의 오랜 심문 끝에 자신이 입증한 지동설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가 심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100여년이 지난 후세 사람이 지어낸 것이라고 합니다만, 아마 그의 심정이 딱 그랬을 것 같습니다. 갈릴레이는 소신을 버리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물리학과 천문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의 발전사를 다룬 <스티븐 와인버그의 세상을 설명하는 과학>은 과학의 연구에 투신한 젊은 학자들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기본소양, 즉 ‘이미 알려진 모든 사실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라’하는 원칙을 새삼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물론 과학 이외의 학문분야, 심지어는 세상사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건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기 때문에 누구나 읽어 도움이 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자가 이 책에 적용한 원칙은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가장 위험하게 여기고 피하는 방법’, 즉 과거 자연철학자들의 이론이나 연구 방식을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1933년 뉴욕에서 태어난 스티븐 와인버그는 브롱크스 과학 고등학교를 거쳐 1954년 코넬 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57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재규격화 이론을 이용하여 약한 상호작용에서 일어나는 강한 상호작용의 효과」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 로렌스 방사능연구소,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 하버드 대학교 등을 거쳐, 1983년부터는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장(場)의 양자론에서 우주론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에 있어 다양한 분야를 연구해왔고, 특히 자연의 근본적인 힘들 중 전자기력과 약력을 통합하는 이론은 그의 최대의 업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로 1979년에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소립자 이론의 ‘표준 모형’이라고 할 정도로 현대 물리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목을 <To explain the world(‘세상을 설명한다’는 의미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만, 이 주제는 철학이라는 학문영역이 태동할 때부터 다룬 아주 오래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철학(哲學, philosophy)은 존재, 지식, 가치, 이성, 인식 등의 일반적이며 기본적인 대상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합니다. 철학은 전통적으로 ‘세계와 인간과 사물과 현상의 가치와 궁극적인 뜻을 향한 본질적이고 총체적인 천착’을 의미합니다. 이 책의 주제가 되고 있는 수학과 물리학은 18세기까지만 해도 자연철학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과학의 뿌리는 철학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과학사적 배경 때문에 저자는 그리스시대 철학자들의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사유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과학철학보다는 과학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라고 입장을 정리합니다.


‘현대과학의 발견(The discovery of modern science)’이라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물리학과 천문학에 중점을 둔 것은 과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것이 천문학에 적용된 물리학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생물학 같은 분야는 많은 역사적 우연의 의존해왔기 때문에 물리학 모델로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생물학과 화학의 급속한 발전은 17세기 물리학 혁명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스티븐 와인버그의 세상을 설명하는 과학>은 1부 그리스의 물리학, 2부 그리스의 천문학, 3부 중세시대, 4부 과학혁명으로 나누었고, 본문에 나오는 이론 가운데 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것들에 대하여 말미에 ‘전문해설’을 별도로 실었습니다. 전문해설은 수식과 그림 등을 곁들이고 있지만, 제목 그대로 전문적인 내용이라서 물리학을 전공하는 분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 학자들이 이룩한 학문적 업적이 어떻게 중세의 암흑기를 건너 르네상스시기로 연결될 수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중동지방에서 일어난 압바스 왕국은 물론 이베리아반도에 자리 잡은 후기 우마이야왕조를 비롯한 이슬람세력들이 그리스학문의 맥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학자들이 남기 학문적 성과들을 이슬람어로 번역하여 확산시킨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이슬람학자들의 연구업적까지도 빠트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그 누구도 오늘날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의 추론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는 저자는 아나톨리아의 밀레투스에서 활동한 물리학자 가운데 기원전 6세기의 탈레스를 처음 인용하여 그리스 물리학을 설명합니다. 물론 탈레스가 남긴 어떠한 기록도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만, 탈레스야말로 ‘모든 물질은 하나의 기본 재료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물질의 본성이 모든 것의 유일한 원리라고 생각했던 대부분의 초기 철학자들 중에서 (…) 이 철학 학교를 세운 탈레스는 그 원리가 물이라고 말했다.(20쪽)”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탈레스에 이어 아낙시만드로스는 의문의 물질을,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크세노파네스는 흙을,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 만물의 재료라고 제안했고, 그로부터 100여년 뒤에 등장한 엠페도클레스는 모든 물질이 하나가 아니라 물, 공기, 흙, 불 등 네 개의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무렵에 활동한 파르메니데스는 자연의 변화와 다양성은 환상일 뿐이라고 가르쳤고, 그의 제자 엘레아의 제논(스토아학파 제논과는 다른)의 경우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려 했습니다. 저자는 두 사람의 주장이 틀렸다고 잘라 말하고, 그들의 사유체계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즉 운동이 불가능하다면 왜 물체들이 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여겼는데, 이로 인하여 과학이 발전할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 대한 철학적 개념들은 중세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랍의 철학자들에게 엄청난 존경을 받았습니다. 아베로에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라고 한다면 아베로에스는 ‘해설자’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저자 역시 검증하려는 노력은 없었지만, 평범한 관측에 근거한 것이지만 자신이 가정한 원칙에 따라 정교한 추론을 통하여 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틀리긴 했지만, 자연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은 자체는 상당히 중요하다.”라는 저자의 입장은 과학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자연주의적이었고, 우주에 대한 그의 시각은 법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비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수도회마다 다른 입장을 취하였던 것인데,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경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도미니크 수도회에서는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현대과학의 시작, 즉 과학혁명의 시작이 코페르니쿠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습니다. 147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코페르니쿠스는 중세 폴란드 왕국의 수도 크라쿠프에 있는 크라쿠프대학에서 천문학과정을 포함한 교육을 받고 1496년 볼로냐로 옮겨 천문관측을 시작했습니다. 1510년에는 폴란드로 돌아와 프롬보르크에 천문대를 짓고 1543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천문연구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귀국 직후 그는 이전까지의 행성이론을 비판하고 자신의 새로운 행성이론을 담은 <천체의 운동과 그 배열에 관한 주해서>를 썼지만, 이 글은 그가 사망하고서 한참 뒤까지 출판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때까지의 천문학 이론의 핵심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버리고, 모든 천체들은 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새롭게 정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론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관측자료를 내세운 것은 아니었고,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마게스트>에서 인용한 관측자료를 재해석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천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구가 움직인다고 가정하였을 때, 태양, 별 그리고 다른 행성들의 여러 가지 겉보기운동이 잘 설명되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은 출판되기 전부터 다수의 종교지도자들의 반발을 불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 가톨릭교회가 심각하게 억압하기 전까지는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억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1540년에서야 출판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551년 에라스무스 라인홀트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활용하여 특정한 시간에 황도 위에서 행성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는 새로운 천문목록인 ‘프로이센 목록’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론은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와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의 천문관측을 통하여 확인되었고,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가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과학이론의 혁명을 불러왔다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태양 중심의 천문학구조를 지지하는 최초의 ‘관측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실질적인 과학의 혁명을 일깨웠다고 하겠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스파이글라스를 개량하여 스무배의 배율을 가지는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관측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천체관측을 통하여 달표면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고, 맨눈으로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행성들이 달처럼 둥근 모습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네 개의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고, 금성이 달처럼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태양의 표면에서 흑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새로운 기술이 순수과학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알려준 것입니다.


과학혁명의 절정은 뉴턴에서 맞았다고 했습니다. 뉴턴은 과거의 자연철학과 현대과학의 경계에 걸친 인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분명 현대과학이 된 모든 과학이 따르고 있는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1687년 왕립협회를 통하여 뉴턴이 출판한 <자연철학의 수학 원리; 약칭은 ‘프린키피아’입니다>은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이 물리학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책입니다. 물질의 양, 운동과 힘에 대한 정의, 법칙 및 추론을 제시하고, 이어서 1부에서는 그 결과를 차례로 유도합니다. 2부에서는 유체 속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다루고, 3부에서는 천문학의 증거들을 찾습니다. 이미 측정된 것들에 대한 계산과 아직 측정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예측을 보여줍니다. 뉴턴도 알고 있었지만, 중력이 유일한 물리적 힘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이론이었습니다.


2천년이 넘는 물리학과 수학의 역사를 요약한 방대한 과학의 역사를 몇 줄의 리뷰로 요약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끝에 붙인 전문해설은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당하고 재미있는 인디언 신화 1
알폰소 오르티즈 외 엮음 | 양순봉 외 옮김 / 아프로디테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신화(神話, Mythology)는 한 나라 혹은 한 민족으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로 실재하는 장소, 사물, 혹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사실로 믿어지는 전설과는 달리 믿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화세계에서는 신과 인간을 둘러싼 이야기들로 국한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마다 독특한 신화가 전해오지만, 때로는 유사한 맥락을 가지는 신화도 있습니다.

요즈음 공부하는 아메리카대륙에 관한 것으로 보이는데다가, ‘황당하고 재미있는’이라는 수식어에 눈길을 끄는 바람에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저자들이 25년간에 걸쳐 80여개의 미국 인디언 부족들로부터  채집한 160여 편의 신화를 모아 ‘인간 창조’, ‘사랑과 갈망의 이야기들’, ‘코요테의 울음과 웃음들’의 3장으로 나누어 엮은 원본에서 58편을 뽑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앞선 두 개의 장에 실린 이야기들은 비교적 고전적인 이야기들이고, 마지막 ‘코요테의 울음과 웃음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19세기의 자료에서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 창조’에 담긴 이야기들은 인간과 신이 나뉜 과정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활필수품이라 할 소금이나 옥수수, 들소나 말, 주술의식 등을 얻거나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든가, 남녀의 차이, 다른 인종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죽음은 무엇인지 등이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원주민의 선조들은 핏덩이 신화를 믿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생긴 핏덩이를 토끼가 기르게 되었다던가, 자식 없는 늙은 부부가 기르게 되었다던가 하는 등입니다. 이런 신화 혹은 전설은 부족의 시조가 어디서 왔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여기 담긴 이야기들은 오래 전에 있었던 사건을 비유적으로 혹은 격을 높일 수 있도록 각색하여 후대에 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시각으로 해석하게 되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야기의 앞에, 혹은 뒤에 이야기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달아놓았습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토끼, 코요테, 사슴 등은 각각의 동물에 해당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싶습니다. 우리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를 그와 같은 성품을 가진 부족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과 갈망의 이야기들’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때로는 동물, 심지어는 달과 결혼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이들이 사물에서 따온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점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은 신성하고 썽 또한 그렇다. 이별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150쪽)”이라고 한 것처럼, 원주민들의 성에 대한 관념이 개방적이고 파격적인 경우도 있는데, 그들이 성적으로 더 난잡했다는 증거는 없는 듯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성관념이 그리 위선적이지 않았다는 저자들의 해석이 수긍되는 듯합니다.

워너브러더스의 만화영화 <루니툰>에 나오는 코요테는 매번 로드러너에게 당하는 것으로 나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습니다만, 신화에 등장하는 코요테는 악동이자 영웅으로 상상도 못할 장난을 저지르기도 하고, 위대한 문화의 전도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코요테와 익톰, 그리고 다른 모든 광대들은 모두 신성하다. 그들은 우리 삶의 필요한 한 부분이다. 예전의 우리 인디언처럼 한이 많은 사람들 또한 살아갈 힘이 되는 그들만의 해학이 필요하다.(263-264쪽)”라고 한 것처럼 백인들에게 핍박받는 동안 만들어진 민담 혹은 전설도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