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강국의 조건 - 어떻게 미국은 이민강국이 되었나
이샘물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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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행렬; http://blog.joins.com/yang412/13819752>을 쓴 동아일보의 이샘물기자의 후속작입니다. <이주행렬>에서는 단일민족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우리나라 역시 다양한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온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최근 짧은 시일에 다양한 지역에서 이주민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을 맞아 이에 대하여 곱지 않은 시선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한국의 미래는 이주민에 대한 바른 정책이 수립되어 실행되는데 달려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냈습니다.

 

<이민강국의 조건>은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미국이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이주민정책은 무엇이었는가를 짚어봄으로서 우리나라의 이주민정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것 같습니다. 사실 국가 간의 거리는 예전과 같지만,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축소됨에 따라 국가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즉 이주행렬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므로 이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정책의 수립이 그만큼 절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주가 용이하도록 하는 정도의 정책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본 저자는 미국의 이민정책의 변천사를 법과 제도, 문화, 인적자원 등의 측면에서 다양한 데이터와 사료를 바탕으로 분석해냈습니다.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었던 토양을 만들어낸 과정으로부터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이주민들을 하나되게 한 힘은 어디에 있으며, 그들을 미래로 이끌어 올린 힘의 원천은 무엇이고, 특히 그들 가운데 비범하다는 사람들 역시 시작은 남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힘은 구성원의 역량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역량이 출중한 이주민들을 끌어올 수 있는가의 여부가 이민강국의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매력을 느낄만한 무엇이 있어야 했던 것인데, 저자는 실리콘밸리가 세계의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20세기 후반 경제의 중심이었던 동부와는 달리 실리콘밸리는 소통과 협력을 추구하는 문화를 가꾸어갔던 것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용화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했던 것은 미국의 개방적인 교육제도였는데, 과거 유럽의 백인이 주류를 이루던 유학생들을 출신국을 다양하게 할 수 있었던 제약을 철폐함으로서 인재의 풀을 확대시킬 수 있었습니다. 흑인노예제도를 바탕으로 한 인종차별정책의 뿌리가 깊은 미국이 고용에 있어서 인종, 피부색, 종교, 출신국에 기반하여 차별을 완전하게 금지하는 행정명령 11246을 발동한 것은 린든 존슨대통령으로 1965년의 일입니다. 이처럼 미국이 이민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민의 역사에서 많은 과오가 있었고 지금도 그 그림자가 남아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행하여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단언합니다.

 

이러한 토양에 ‘우리는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믿는다’라고 하는 공통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통합을 이루어내고, 원칙을 지키고 법에 의거하여 모든 일이 처리되는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처럼 균질한 집단에서는 종종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이유로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법보다 국민감정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상황이 바로 ‘국민감정’을 빙자하여 법체계를 압박하는 모양새로 읽히는 것입니다. 그밖에도 개인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기부문화와 주관적인 긍정주의 역시 미국의 힘을 키워내는 요소라고 합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능력이나 성취에 다라 기회가 주어지고 모든 사람의 삶이 더 나아지고 부유해지고 풍족해지는 땅에 대한 꿈”인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 사회와 우리 사회를 비교해서 무엇을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세계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고 한순간이라도 눈을 팔게되면 뒤쫓아가는 것이 벅찰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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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 - 새파랗게 젊은 것과 고집불통 노인네가 모두 당하는 차별
애슈턴 애플화이트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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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에 직장을 옮기기 위하여 면접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라는 이유로 미역국을 먹었습니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최근에도 면접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나이가....’라는 이유가 붙는 느낌입니다. 이번에는 많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맡을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방점이 찍히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제 나이에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에 공감한다면 속셈이 무엇이냐는 싸늘한 시선이 되돌아올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1969년에 로버트 닐 버틀러가 처음 사용한 에이지즘(연령차별)은 성차별이나 인종차별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사람의 나이에 근거한 차별 및 고정관념으로 정의합니다. 버틀러는 나이든 사람이나 나이 드는 과정에 대한 편견, 차별적 태도, 제도적 실체와 정책 등으로 정형화 혹은 영속화하는 것 등 연결되는 세 가지 요소를 조합하여 연령차별을 정의하였습니다.(Wikipedia. Ageism 참조) 나이가 드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연령차별은 불가피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의 저자 애슈턴 애플화이트는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세상 모든 에 관심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저자가 연령차별을 해소하는 일에 쌍지팡이를 짚고 나선 것입니다. 일단 “나는 한 번도 나이를 속인 적이 없다. 큰소리로 또박또박 ‘예순셋이에요’하고 말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7쪽)”라는 들어가는 말부터 마음에 쏙 듭니다. 그리고 보니 저와 동갑이군요. 일찍 머리가 세기 시작한 저는 염색을 하면 훨씬 젊어 보일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염색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연령차별에 눈을 뜨고, 나이 듦에 대하여 좀 더 미묘하고도 정확한 시각을 수용하도록 촉구하고, 격려하고, 행동에 나서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습니다.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처럼 연령차별 역시 ‘권력을 손에 쥔 집단이 자기들보다 훨씬 어리거나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거나 침묵시키거나 단순히 무시하기 위해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을 사용할 때 발생한다.(20쪽)’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알량한 힘을 자랑하기 위하여 선량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양성평등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동성애자들도 자신의 정체성에 자긍심을 가지며 장애인 역시 장애사실을 감추지 않는 세상입니다. 나이는 장애가 아닙니다.


저자는 연령차별의 문제점을 짚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이 듦의 실체, 나이 듦에 따른 정신과 육체의 건강, 그리고 성의 문제를 각각 나누어 다루고, 나이 들어 일을 하는 것, 문제해결을 위한 협력, 죽음에 즈음한 시기의 문제 등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연령차별을 넘어서야 하는 까닭을 설명합니다. 나이 듦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 2장부터 8장까지는 주제에 대한 문제를 제시한 다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제목으로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합니다.


연령차별의 문제점을 정리한 제1장 ‘연령차별이 왜 문제인가’에서 저자는 중세까지만 해도 어느 사회에서든지 소수의 나이든 사람들은 그 사회의 선생이자 문화의 보존자로서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시절 나이든 사람들은 사회에 필요한 소중한 기술과 정보를 간직한 자로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원로원이나 신생 미국의 장로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사회가 개방되고 인쇄, 통신매체를 통하여 정보가 급속하게 늘었을 뿐 아니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나이든 사람들의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0세기 중반 일었던 청년문화를 통하여 ‘젊음에 대한 숭배’가 자리 잡게 되면서 나이든 사람을 기피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사회적 현상이 대두되었습니다. 늙어감을 거부하는 현상은 노인산업이 급성장하는 부대효과도 창출해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늙어버린 자신을 확인하게 되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심하면 혐오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젊어지는 느낌’에 취해 있다 보면 우리 내면과 주변에서 활개 치는 연령차별을 알아채지 못하고 이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데, 심지어는 수명을 단축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이듦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평균 7.5년이나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저자는 나이듦에 대한 몇 가지 어처구니없는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1. 노인들이 사회를 뒤덮을 것이다. 최근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현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베이비붐세대가 고령화되면서 일고 있는 현상에 불과하며, 앞으로 젊은 인구가 급증할 수도 있습니다. 2. 병들고 노쇠한 노인들을 돌보느라 나머지 인구가 옴짝달싹 못 할 것이다. 노인인구가 사용하는 의료비의 급증에서 나온 믿음으로 의료비 급증의 원인은 기술변화였다고 합니다. 3. 젊은이들을 희생시킨 대가로 노인들이 이득을 본다. 이는 세대간 갈등을 부추겨 이득을 챙기려는 정치적 속셈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합니다. 일자리 경쟁에 관하여도 같은 일자리를 두고 세대를 초월하여 경쟁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4. 사회보장 기금과 메디케어 기금이 바닥났다. 미국의료서비스가 엉망인 이유는 장수 때문이 아니라 의료체계에 있다는 설명입니다. 즉 급성기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메디케어를 장애와 만성질환 환자를 관리하는 체계로 개편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5. 우리에게는 장수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하지만 정부지출과 복지예산에서 노인을 위한 예산의 비중은 너무 작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 또한 정책실패를 노인들에게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이가 우리 자신이다.’라는 제목의 제2장은 나이듦에 대한 인식을 주제로 합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정년을 연장하기로 하였습니다. 일각에서는 정년을 연장할 일이 아니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실 나이보다 젊어 보이거나 늙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이듦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연령을 기준으로 하여 젊다, 늙었다라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던 일을 놓고 물러난 노인들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빠르게 몰락하는 길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아흔 살의 나를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노년을 생각하면 반사적으로 따라오는 두려움을 없애주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무수히 많은 방법을 터득하여 노년을 잘 준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3장 ‘나이든 뇌가 뭐 어때서’는 나이듦에 따라오는 인지기능의 감퇴에 관한 내용입니다. 나이듦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지기능장애, 즉 치매 때문일 것입니다. 치료법 또한 아직 완전하지 않고 이러저러한 예방법 역시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나이들면서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을 치매의 전조라고 생각하면서 두려워하기도 합니다만, 기억력이 떨어지면 메모하는 습관으로 보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치매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입니다. 치매는 병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으로 나타나는 증상일 뿐입니다. 치매의 가장 흔한 원인인 알츠하이머병은 나이보다 빠르게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것이지만, 결국 나이듦에 따른 변화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다행히 인지기능이 저하되는 속도를 느리게 해주는 약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요양시설 등 사회적 지원체계가 강화되고 있음을 고려하면 그리 두려워할 일도 아닙니다.


제4장 ‘젊음이 아니라 건강이 중요하다’는 나이듦에 따른 신체건강의 변화를 주제로 합니다. 저자는 나이듦에서 중요한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젊음 유지’보다 ‘건강 유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사회에 불고 있는 동안열풍은 나이듦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산업체의 속셈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이상현상에 불과합니다. 장수하는 집안도 있습니다만, 저자는 유전자가 장수에 기여하는 바는 크지 않다고 말합니다. 소식(小食)을 하면 장수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122년을 살아 공식기록으로 가장 오래 산 프랑스의 잔 칼망할머니는 단 것을 좋아했고, 싸구려 적포도주와 기름진 음식을 즐겼으며 77살까지 담배를 피웠다고 하니 장수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2010년 뉴욕타임스에 실린 ‘백세인들의 비결’이라는 기사를 보면 그 비결이란 운동, 절제, 가족 간의 유대, 사회적 유대 등, 생활양식이었습니다.


백세인들은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한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계속 일을 해왔으니, 복 받은 거죠. 일을 시작하세요. 명랑하게 사세요. 그리고 재미를 느낄 만한 걸 찾으세요. 태도가 전부예요.(175-176쪽)”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알려진 ‘연령차별에 찌든 고정관념을 거부하라!’라는 생각을 가지기를 저자는 바라고 있습니다.


제5장 ‘섹스는 끝나지 않는다’는 나이가 들면 성욕도 사라질 것이라는 편견을 다룹니다. 사람들은 결코 섹스를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몸과 함께 변화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섹스에 발기나 오르가슴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면 성교의 우선순위를 다시 매겨야 한다는 것인데, 나이가 들수록 성적자극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삽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모든 종류의 성관계를 포괄하는 간접성교는 성관계를 더 오래 지속하게 해주고 상대와 대화를 나눌 여지도 많아집니다.


제6장 ‘더 유능한 일꾼이다’에서는 나이가 들어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나이 든 미국인들은 일을 해도 욕을 먹고 안해도 욕을 먹는다(231쪽)”라고 합니다. 일을 하면 젊은 사람들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비판받고, 일을 하지 않으면 젊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다고 욕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든 근로자들은 앞서도 말한 것처럼 젊은 근로자의 일자리와 경쟁관계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근로소득을 사용하게 됨에 따라 젊은 근로자들의 고용이 증대되는 효과를 창출한다는 설명입니다. 과거 열심히 일한 근로자들이 여생을 편하게 보낸다는 의미의 은퇴는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7장 ‘꼭 혼자서 헤쳐 나갈 필요는 없다’는 나이가 들수록 고립이 위험하다는 점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사회 연결망이 나이든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는 요소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만 협소한 관계보다는 다양한 연령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권유합니다. 세대 간의 갈등을 풀어내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도 소소한 기쁨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청하게 되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제8장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는 삶을 마무리하는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입장이 바뀌면 황소가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인용하여 나이를 먹을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원하는 바를 미리 정리해두기를 권합니다. 제9장 ‘연령차별을 넘어서라’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나이듦에 대한 편견을 불식하고 차별을 철폐하라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어렵고 힘든 일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도 편견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그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큰 손해를 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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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찰스 핸디 지음, 손정숙 옮김, 엘리자베스 핸디 사진 / 뮤진트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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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이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만, 모임에 나가보면 참석한 사람 중에 가장 연배가 많은 경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뭔가 특별한 이야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부담이 느껴지면서 다음번에는 참석을 재고해보아야겠다면서 나이를 의식하게 됩니다. 문득 또래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핸디부부의 책 <나는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를 읽게 된 이유입니다.


이 책을 편집한 찰스 핸디는 다국적 석유회사 셸의 간부를 거쳐 런던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가르쳤고, 피터 드러카와 톰 피터스 등 세계를 움직이는 사상가 50인에 올라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니지먼트 사상가로 꼽힐 정도로 매니지먼트와 삶에 대한 그의 견해는 수년 동안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교훈을 선사했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이 책을 편집한 찰스 핸디가 친구의 예순번째 생일 파티에서 만난 여성들로부터 얻은 느낌으로 기획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이들도 다 크고, 돈도 벌 만큼 벌었고, 그리 바쁘지도 않은”그녀들은 60대란 젊지는 않지만 아직 늙지도 않은 일종의 일종의 자유시간이므로 앞으로 10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자연스럽게 펼쳐놓았던 것입니다.


찰스는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지닌 60대 영국 여성 29명을 선정하여, 이들이 자신의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소망을 담은 글을 쓰도록 하였고, 찰스가 그 글을 다듬고 서문을 썼다. 책에 실린 사진은 찰스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찍었는데, 각자의 삶이 드러날 수 있는 분위기를 같이 담은 사진과 그녀들의 표정을 담은 사진을 각각 실었습니다. 그중에는 유명인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20대에 결혼해서 애 낳고 남편 그늘에서 살아온 평범한 여성들이라고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모두 특별한 분들 같습니다.


찰스는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 가운데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1. 여성들의 삶이 동 시대의 남성들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2.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학에 가지 못했다. 3. 이 여성들은 '은퇴'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않는다. 4. 대부분의 여성들은 외모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름살도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생각이다. 5. 이별 혹은 사별과 같은 슬픔을 딛고 일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6. 그녀들은 불평등을 헤쳐나왔고, 필요하면 세상을 바꾸었다. 등입니다.


아마도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는 서구사회의 특성도 작용을 한 것이라고 보입니다만, 하던 일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때려치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새롭게 관심을 가진 분야를 쉽게 공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로서 새로운 직장을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우리나라와는 판이하게 다른 점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도 여전히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벌써 여섯번째 직장에서 연관은 있지만 분명 색다른 점이 있는 네 개의 분야를 배워서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던 일을 처음 그만 둘 때는 그녀들 역시 상당한 마음의 갈등을 거친 흔적은 볼 수 있습니다.


변화의 힘은 '첫발을 떼기가 어려운 법'이라는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말입니다. 저도 첫 번째 직장을 그만 둘 때 몇 달에 걸쳐 고민을 했지만, 두번째 직장을 그만 둘 때는 그리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분명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은 60을 전후한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여 나이듦에 대한 생각을 재조명하자는 생각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 담겨 있는 생각들은 굳이 남성 여성을 가릴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을 할 일이 아니라 길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만 틀어보면 꽉막힌 듯하던 길 옆에 더 넓은 새로운 길이 나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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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6 로마제국 쇠망사 6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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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6>에서는 교황의 주도로 전개된 십자군전쟁의 본질과 십자군이 동로마제국에 미친 영향으로 시작하여 비잔틴제국, 즉 동로마제국의 내부적인 갈등, 몽고제국의 성립과 유럽원정 그리고 티무르의 사마르칸트제국의 성쇠에 이어 오스만제국의 성립, 교황에 의하여 주도된 라틴교회와 비잔틴제국의 동방교회의 통합 논의, 오스만제국에 의한 비잔틴제국의 멸망, 12세기 이후 로마에서 벌어진 교황의 세속지배와 교황청의 아비뇽시대와 로마로 복귀하게 되는 과정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15세기에 폐허가 된 로마의 유적을 조망하며, 로마유적이 황폐해진 이유를 짚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촉발한 사람은 프랑스 아미앵출신 페트루스라는 은자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묘를 참배하면서 박해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투르크사람들에 의하여 탄압받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와 슬픔을 느낀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에게 구원의 길을 물었지만, 동로마황제의 나약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실망한 그는 로마로 우르바누스2세 교황을 설득하여 지원을 약속받고, 내쳐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여러 속주를 누비면서 설득에 나섰습니다. 결국 라틴사람과 프랑크사람의 전쟁을 즐기는 속성과 맞물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속죄약속 그리고 신의 가호에 대한 믿음 등이 무지한 사람들을 홀려 동으로 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젖과 꿀이 흐른다는 동방에서 부를 챙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지휘체계 없이 소아시아로 떠난 이들이 지나는 곳 주민들과 충돌을 빚기 일쑤여서 헝가리나 불가리아 등지에서 공격을 받았고,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너서는 투르크군에 의하여 30만이 궤멸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툴루즈 백작 레이몽이 이끄는 기병을 주축으로 한 10만 1차 십자군 원정대는 니케아, 안티오크를 거쳐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왕국을 세워 1187년까지 이어가게 됩니다. 1차 십자군의 성공은 투르크 세력을 견제하여 무너져가던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잠시 막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1188년 살라딘의 투르크군이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자 제2차, 3차 십자군 원정이 이어졌고 일부 성과가 있었지만, 승패가 엇갈리는 가운데 협상을 통하여 전투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노켄티우스3세가 주도한 제4차 십자군은 출발부터 순조롭지 않은 가운데 중간에 목표를 시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꾸면서 비잔틴사람들과 라틴사람들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진군하게 된 것은 비잔틴제국의 왕위계승과정에서 밀려난 알렉시우스 황태자의 도움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필요한 군자금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에는 베네치아의 노림이 숨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결과 비잔틴제국은 와해되고 십자군 원정대가 세운 라틴제국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비잔틴제국의 영토는 분할되어 십자군에 참여한 나라가 차지하였는데 라틴제국이 4분의 1을 차지하고, 나머지의 반을 베네치아가 그리고 나머지는 프랑스와 롬바르디아가 차지한 것입니다. 즉, 4차 십자군 원정에서 가장 큰 이익을 차지한 것은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였습니다.


라틴제국이 쫓겨난 비잔틴제국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반란과 불가리아의 침공 등으로 근근히 이어가다가 1261년 제노아와 손을 잡은 비잔틴사람들의 역습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들어선 비잔틴제국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권력투쟁으로 지새우다가 결국은 오스만제국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비잔틴제국이 무너지기 전에 동방교회와 라틴교회의 통합논의가 있었다고 하는 부분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의 약탈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가능한 일일까 싶기도 해서입니다.


아마도 오스만제국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보입니다만,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의 성립과 티무르의 사마르칸트제국에 이르기까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연대를 오가고 있어 전체를 개괄하는 것이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투르크군대가 비잔틴을 우회하여 발칸제국을 공격한 것으로 보여 정리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비잔티움을 함락한 마호메트2세가 비잔틴제국의 궁전으로 향하면서 읊었다는 페르시아 고유의 우아한 2행 압운시는 기억할 만 합니다. "거미가 황궁에 거미줄을 드리웠고, 올빼미는 아프라시압(옛 사마르칸드)의 탑에 앉아 망루의 노래만 불러대는구나.(522쪽) 인간의 영화가 덧없음을 담은 것입니다.


동로마제국이 멸망했으니 로마제국의 쇠망을 논할 일이 없을 터임에도 기번은 이야기를 되돌려 1100-1500년 사이의 로마의 상황을 다시 늘어놓습니다. 아마도 라틴교회의 교황이 세속의 일에 간여하면서 로마제국의 영화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갈리아지방과 이탈리아반도의 주도권 다툼을 그려낸 셈인데 그 와중에서도 귀족들을 비롯한 로마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생각, 즉 오만함이 로마제국의 영화를 재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기번은 1430년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선 포기우스가 로마의 대표적 유적 7곳에 대한 기록을 검토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서고트족이나 반달족이 쳐들어와 파괴한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합니다. 인간의 건조물이란 진전이 없으면 그만큼 퇴화하기 마련이어서 뒤이어 오는 시대가 고대 유물의 황폐화를 부추겼을 것이고 보았습니다. 기번이 보는 고대 로마유적의 황폐화 원인은 1) 시간과 자연에 의한 훼손, 2) 야만족과 그리스도교도들의 적대적 침략, 3) 건물 자재의 도용과 남용, 4) 로마 내부의 분쟁 등입니다. 고트족은 6일 만에 반달족은 15일 만에 로마를 떠났으니, 여기서 말하는 야만족은 그들이 아니라 로마의 가톨릭교도에게 돌아갈 호칭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로마사람들은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 옛 건물에서 얻는 자재를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고대 유물들을 팔아먹기까지 했다는 것이니,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다른 민족에게 뒤집어씌운 셈입니다.


긴 논설을 맺으면서 기번은 로마제국의 쇠하게 된 것은 1. 군사 전제 정치의 무질서, 2. 그리스도교의 생성과 확립, 3. 콘스탄티노플의 건설과 제국의 분열, 4. 게르만과 스키타이 야만족들의 침략과 정착, 5. 이슬람교의 창시, 6. 교황의 세속 통치, 7. 십자군 원정, 8. 사라센과 투르크인의 정복 등이 주요 요소였다고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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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5 로마제국 쇠망사 5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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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5>에서는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이탈리아반도에서의 변화, 즉 프랑크족의 이탈리아 정복에 이은 신성로마제국의 성립과정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한편 저자가 보기에는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의연대기는 허약해서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즉 헤라클리우스 황제 이후 비잔틴제국은 끊임없이 제국의 강역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는데, 전성기의 로마제국을 이끌던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황제가 없었고,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제위를 둘러싸고 권력싸움이나 벌이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로마제국 쇠망사5>에서 다루고 있는 600년 기간동안 모두 60명이 황제가 재위했는데, 이는 아이작 뉴턴의 연대기 규칙에서 말하는 안정된 제국에서의 황제의 평균재위기간이 18-20년인 것과 비교된다 하겠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비잔틴 제국을 둘러싸고 있는 야만족(저자는 일관되게 라틴민족이 아니면 야만족으로 정리하는 모습입니다)들이 점점 세를 키워 압박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정적인 요소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교가 아랍부족들을 하나로 묶어낸 것을 계기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동쪽으로는 인도북부까지 무서운 기세로 강역을 넓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잔틴의 영토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슬람교의 성립과정과 칼리프시대에 이어 우마이야왕조를 거쳐 압바스왕조에 이르기까지 아랍부족의 전성기를 정리하였습니다. 이슬람이 빠르게 세력을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와 금식, 자선이 이슬람교도의 종교적 의무라는 단순하고 합리적인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관용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입니다. 다만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서 후(後) 우마이야왕조와 압바스왕조 사이의 관계가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압바스왕조가 우마이야왕조를 무너뜨렸을 때 극적으로 살아남은 왕족이 이베리아반도까지 달아나 후(後) 우마이야왕조로서 압바스왕조와 서로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사라센제국이라는 용어는 유럽사람들이 통상 이해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신봉자들이 이룩한 대제국의 총칭’으로 7세기 중엽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는 처음 아랍계부족들에 의한 우마이야왕조와 압바스왕조가 성립하였다가 압바스왕조가 무너진 다음에는 중국 북부에서 이주해온 투르크계 부족들에 의한 셀주크왕조와 오스만제국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에는 몽골계의 티무르제국, 무굴제국 및 사파위제국 등이 중동지역에서 명멸했으며 이집트 지역에는 파티마왕조가 있었습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대식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랍부족이 세력을 키워가는 것에 더하여 비잔틴제국의 동쪽으로는 불가리아인과 헝가리인(마자르족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이 서진하고, 러시아의 슬라브족이 남진하면서 제국을 압박한 것도 결국 보상금을 쥐어주면서 충돌을 피하는 양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교리의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는 분파들이 생기면서 서로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다가 세력을 얻지 못한 분파를 탄압하거나, 이들이 탄압을 피해 타국으로 피한 것도 제국을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사라센문명이 인류문명에 기여한 바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시대 꽃피웠던 다양한 문야의 학문적 성과들은 로마를거쳐 중세로 넘어가면서 사장되어 잊혀졌던 것을 사라센사람들이 이들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철학, 의학,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진보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라틴민족 외에는 야만족이라고 바라본 협소한 시각 때문이었는지 지나치게 저평가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5>에서 새롭게 파악한 점은 9세기 무렵 슬라브족이 네 차례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더 공부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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