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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6 ㅣ 로마제국쇠망사 6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로마제국 쇠망사6>에서는 교황의 주도로 전개된 십자군전쟁의 본질과 십자군이 동로마제국에 미친 영향으로 시작하여 비잔틴제국, 즉 동로마제국의 내부적인 갈등, 몽고제국의 성립과 유럽원정 그리고 티무르의 사마르칸트제국의 성쇠에 이어 오스만제국의 성립, 교황에 의하여 주도된 라틴교회와 비잔틴제국의 동방교회의 통합 논의, 오스만제국에 의한 비잔틴제국의 멸망, 12세기 이후 로마에서 벌어진 교황의 세속지배와 교황청의 아비뇽시대와 로마로 복귀하게 되는 과정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15세기에 폐허가 된 로마의 유적을 조망하며, 로마유적이 황폐해진 이유를 짚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촉발한 사람은 프랑스 아미앵출신 페트루스라는 은자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묘를 참배하면서 박해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투르크사람들에 의하여 탄압받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와 슬픔을 느낀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에게 구원의 길을 물었지만, 동로마황제의 나약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실망한 그는 로마로 우르바누스2세 교황을 설득하여 지원을 약속받고, 내쳐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여러 속주를 누비면서 설득에 나섰습니다. 결국 라틴사람과 프랑크사람의 전쟁을 즐기는 속성과 맞물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속죄약속 그리고 신의 가호에 대한 믿음 등이 무지한 사람들을 홀려 동으로 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젖과 꿀이 흐른다는 동방에서 부를 챙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지휘체계 없이 소아시아로 떠난 이들이 지나는 곳 주민들과 충돌을 빚기 일쑤여서 헝가리나 불가리아 등지에서 공격을 받았고,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너서는 투르크군에 의하여 30만이 궤멸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툴루즈 백작 레이몽이 이끄는 기병을 주축으로 한 10만 1차 십자군 원정대는 니케아, 안티오크를 거쳐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왕국을 세워 1187년까지 이어가게 됩니다. 1차 십자군의 성공은 투르크 세력을 견제하여 무너져가던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잠시 막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1188년 살라딘의 투르크군이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자 제2차, 3차 십자군 원정이 이어졌고 일부 성과가 있었지만, 승패가 엇갈리는 가운데 협상을 통하여 전투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노켄티우스3세가 주도한 제4차 십자군은 출발부터 순조롭지 않은 가운데 중간에 목표를 시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꾸면서 비잔틴사람들과 라틴사람들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진군하게 된 것은 비잔틴제국의 왕위계승과정에서 밀려난 알렉시우스 황태자의 도움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필요한 군자금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에는 베네치아의 노림이 숨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결과 비잔틴제국은 와해되고 십자군 원정대가 세운 라틴제국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비잔틴제국의 영토는 분할되어 십자군에 참여한 나라가 차지하였는데 라틴제국이 4분의 1을 차지하고, 나머지의 반을 베네치아가 그리고 나머지는 프랑스와 롬바르디아가 차지한 것입니다. 즉, 4차 십자군 원정에서 가장 큰 이익을 차지한 것은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였습니다.
라틴제국이 쫓겨난 비잔틴제국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반란과 불가리아의 침공 등으로 근근히 이어가다가 1261년 제노아와 손을 잡은 비잔틴사람들의 역습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들어선 비잔틴제국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권력투쟁으로 지새우다가 결국은 오스만제국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비잔틴제국이 무너지기 전에 동방교회와 라틴교회의 통합논의가 있었다고 하는 부분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의 약탈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가능한 일일까 싶기도 해서입니다.
아마도 오스만제국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보입니다만,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의 성립과 티무르의 사마르칸트제국에 이르기까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연대를 오가고 있어 전체를 개괄하는 것이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투르크군대가 비잔틴을 우회하여 발칸제국을 공격한 것으로 보여 정리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비잔티움을 함락한 마호메트2세가 비잔틴제국의 궁전으로 향하면서 읊었다는 페르시아 고유의 우아한 2행 압운시는 기억할 만 합니다. "거미가 황궁에 거미줄을 드리웠고, 올빼미는 아프라시압(옛 사마르칸드)의 탑에 앉아 망루의 노래만 불러대는구나.(522쪽) 인간의 영화가 덧없음을 담은 것입니다.
동로마제국이 멸망했으니 로마제국의 쇠망을 논할 일이 없을 터임에도 기번은 이야기를 되돌려 1100-1500년 사이의 로마의 상황을 다시 늘어놓습니다. 아마도 라틴교회의 교황이 세속의 일에 간여하면서 로마제국의 영화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갈리아지방과 이탈리아반도의 주도권 다툼을 그려낸 셈인데 그 와중에서도 귀족들을 비롯한 로마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생각, 즉 오만함이 로마제국의 영화를 재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기번은 1430년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선 포기우스가 로마의 대표적 유적 7곳에 대한 기록을 검토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서고트족이나 반달족이 쳐들어와 파괴한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합니다. 인간의 건조물이란 진전이 없으면 그만큼 퇴화하기 마련이어서 뒤이어 오는 시대가 고대 유물의 황폐화를 부추겼을 것이고 보았습니다. 기번이 보는 고대 로마유적의 황폐화 원인은 1) 시간과 자연에 의한 훼손, 2) 야만족과 그리스도교도들의 적대적 침략, 3) 건물 자재의 도용과 남용, 4) 로마 내부의 분쟁 등입니다. 고트족은 6일 만에 반달족은 15일 만에 로마를 떠났으니, 여기서 말하는 야만족은 그들이 아니라 로마의 가톨릭교도에게 돌아갈 호칭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로마사람들은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 옛 건물에서 얻는 자재를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고대 유물들을 팔아먹기까지 했다는 것이니,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다른 민족에게 뒤집어씌운 셈입니다.
긴 논설을 맺으면서 기번은 로마제국의 쇠하게 된 것은 1. 군사 전제 정치의 무질서, 2. 그리스도교의 생성과 확립, 3. 콘스탄티노플의 건설과 제국의 분열, 4. 게르만과 스키타이 야만족들의 침략과 정착, 5. 이슬람교의 창시, 6. 교황의 세속 통치, 7. 십자군 원정, 8. 사라센과 투르크인의 정복 등이 주요 요소였다고 정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