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세트 - 전6권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 외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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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반도에서 시작하여, 터키, 발칸반도를 거쳐 동유럽까지 이슬람과 기독교문명이 부딪힌 현장을 돌아보면서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북소리]에서 소개드린 제리 벤틀리교수는 <고대 세계의 만남>에서 ‘문명의 충돌’보다는 ‘문명의 교류’를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두 개의 문명이 늘 적대적 충돌만 일으킨 것은 분명 아닐 것 같습니다. 충돌이 불가피한 국면의 사이에도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과 기독교문명의 교류현장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곳곳에 남아 있는 로마제국의 유적이 얼마나 방대하던지, 여행기를 통하여 그것들을 언급하다보니 단편적이지만 로마제국의 역사를 귀동냥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로마제국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와 로마를 가보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로마제국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게 된 동기입니다. 모두 6권에 4,15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부담스러웠지만, 일단 시작을 하면 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18세기에 출간된 저작이다 보니 출간 이후에 발견된 역사적 사실 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제한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중해를 아우르던 로마제국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궁금증을 풀 수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1737년 영국 런던 근처에 있는 퍼트니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섯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기는 했지만, 병약했다고 합니다. 부모의 관심도 별로 받지 못한 가운데 이모의 보살핌으로 독서의 취미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특히 호메로스,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테렌티우스 등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과 로렌스 리처드의 <로마사>를 포함하는 다양한 역사서를 탐독하면서 미래의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쌓아갔습니다. 건강이 회복된 1752년 옥스퍼드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하였지만, 적응하지 못하였고, 1년반 뒤에는 스위스 로잔으로 가서 학자로서의 훈련을 제대로 받게 됩니다.


27세인 1764년 로마를 여행한 기번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서서 로마 의 폐허를 바라보면서 영감을 얻어 <로마제국 쇠망사>를 구상하였습니다. 1773년 저술을 시작하여 1776년 2월 17일 제1권을 출간하였고, 1787년 마지막 제6권을 탈고하였으니 무려 15년에 걸친 대역사였다고 하겠습니다. 제6권은 그의 51세 생일에 맞추어 1788년 5월 8일 출간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황제가 취임하면서 출범하였습니다. 로마제국 이전의 고대 로마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지만, 비역사적 허구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 무렵 로마의 여러 언덕에 마을들이 들어섰고, 서로 통합되어가면서 기원전 7세기 무렵 도시국가 형태의 왕국이 성립하게 됩니다. 기원전 500년경에 왕국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계급이 같이 참여하는 공화정을 세웠습니다. 평민과 귀족들은 투쟁과 타협을 이어가면서도 기원전 272년경에는 반도를 통일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150여 년간의 정복전쟁을 통하여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면서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였습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하여 시작한 삼두정치가 공화정을 기틀을 흔들면서 제국 성립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오현제시대(서기 96년~180년)에 융성하여 최대의 강역을 이루었습니다. 서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고 각각 두 명의 황제와 부제가 지배하는 사두체제를 도입하였습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인 395년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멸망하였으며,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제국에 멸망하였습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가장 큰 이유로 게르만 이주민들의 반란을 꼽는 경향입니다만, 기번은 로마제국의 국력이 쇠퇴하게 된 근본 원인이 복합적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로마제국의 명운이 다했다고 보았습니다. 동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이 수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게 되면서 동로마제국의 존속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라고 합니다.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루고 있는 로마제국의 쇠망과정이 동로마제국까지 포함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 쇠망사>에도 18세기 유럽역사학자들이 동로마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기번은 오현제시대까지의 로마제국을 ‘위대한 인류의 견고한 구조물’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처럼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견고한 구조물도 세월의 풍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저자는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멸망하기까지 1,300여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제국이 무너져가던 과정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기는 트라야누스황제와 안토니우스 황제 무렵 시작하여 지금은 가장 세련된 유럽 국가들의 야만적 선조라 할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인들에게 서로마제국이 전복되었던 시기까지를 말합니다. 고트족 정복자들이 일으킨 변혁은 대략 6세기경에 완성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두 번째 시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동로마제국의 영광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킨 이후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입과 이슬람세력이 소아시아에서 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반도까지 침략하던 시기를 포함하여, 서기 800년 게르만의 서로마제국을 건설한 샤를마뉴가 등장한 시기까지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서로마제국이 부활했던 시기로부터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함락하여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의 시기로 대략 650년 정도에 이른다고 보았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그리고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로 이어지는 80여년의 행복한 시기(서기 98-180년)로부터 4세기 초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퇴위 이후 혼돈에 빠진 제국을 추스르기까지의 시대를 <로마제국 쇠망사1>에 담았습니다. 황금기를 지나면서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근위대의 무력에 기대어 제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위대의 기대치에 따라서 황제가 바뀌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로마군단의 특징은 속주 혹은 정복지에서도 차출되는 병력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출신성분이 비천하더라도 군생활을 통하여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 황제위에 오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군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견고히단 로마제국의 기반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마지막 2개의 장에서는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본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기술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종교에 대하여 포용적이었던 로마제국의 정책과 함께 사후세계에 대한 기대치를 높인 신학적 해석과 기적과 순교 등을 부풀렸던 것에 힘입어 세력을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때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신학적 해석이 힘을 얻으면서 그리스도교도들이 로마의 상징인 신들을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쇠망사2>에서는 밀라노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의 수도로 공표한 서기 324년부터 훈족에 밀려난 고트족이 로마의 영역에 자리 잡은 서기 395년까지의 시기를 다루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리스도교의 공인과 이어 벌어진 삼위일체를 둘러싼 교리다툼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다양한 파벌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교가 타 종교에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다른 교리를 가진 세력들이 갈등의 수준을 뛰어넘을 정도의 대립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즉 권력을 쥔 쪽이 그렇지 않은 상대를 엄청나게 탄압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세력을 잃은 쪽이 숨어 권토중래를 노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데, 소아시아의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는 그리스도교도들이 로마제국이나 이슬람제국의 탄압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반대파를 피해서 숨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3>에서는 제국의 변방에 살던 고트족, 반달족 등이 세력을 얻어가는 과정, 아시아에서 이동해온 훈족의 영향, 그리고 서로마제국의 멸망 등을 다루었습니다. 이 무렵에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통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향락을 탐닉했다고 합니다. 궁정은 물론 속주에 이르기까지 매관매직과 부정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지만, 이들의 죄를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국정장악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진정한 의미의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4>에서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반도를 무대로 벌어진 다양한 민족들의 각축전과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동로마제국의 서방정복운동 등을 다루었습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동고트, 프랑크, 롬바르드족, 반달족 등이 이탈리아반도를 차례로 침공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테오도리크왕이 다스리던 시절 동고트족은 로마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그의 사후 빠르게 무너져 금세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것을 보면 과거 한 나라의 운명은 지도자의 영명함에 달려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예수의 성격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은 세력들끼리 끔찍할 정도로 갈등을 빚은 역사를 정리한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네스토리우스파, 야고보파, 마론파, 아르메니아파, 콥트파 등으로 갈려진 정황을 설명합니다.


<로마제국 쇠망사5>에서는 프랑크족의 이탈리아 정복에 이은 신성로마제국의 성립과정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한편 헤라클리우스 황제 이후 비잔틴제국은 끊임없이 강역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는데, 전성기의 로마제국을 이끌던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황제가 없었고,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제위를 둘러싸고 권력싸움이나 벌이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교가 아랍부족들을 하나로 묶어내면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동쪽으로는 인도북부까지 무서운 기세로 강역을 넓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잔틴의 영토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 쇠망사6>에서는 교황의 주도로 전개된 십자군전쟁의 본질과 십자군이 동로마제국에 미친 영향으로 시작하여 비잔틴제국, 즉 동로마제국의 내부적인 갈등, 몽고제국의 성립과 유럽원정 그리고 티무르의 사마르칸트제국의 성쇠에 이어 오스만제국의 성립, 교황에 의하여 주도된 라틴교회와 비잔틴제국의 동방교회의 통합 논의, 오스만제국에 의한 비잔틴제국의 멸망, 12세기 이후 로마에서 벌어진 교황의 세속지배와 교황청의 아비뇽시대와 로마로 복귀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긴 논설을 맺으면서 기번은 로마제국의 쇠하게 된 것은 1. 군사 전제 정치의 무질서, 2. 그리스도교의 생성과 확립, 3. 콘스탄티노플의 건설과 제국의 분열, 4. 게르만과 스키타이 야만족들의 침략과 정착, 5. 이슬람교의 창시, 6. 교황의 세속 통치, 7. 십자군 원정, 8. 사라센과 투르크인의 정복 등이 주요 요소였다고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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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워드 - 내 인생을 바꾸는 한 단어의 힘
존 고든.댄 브리튼.지미 페이지 지음, 이경희 옮김 / 다산4.0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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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새해가 시작되었나 싶은데,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기 마련입니다. 돌아보면 그렇게 세웠던 목표들 가운데 막상 달성한 것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세웠거나,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추진동력을 잃으면서 흐지부지하고 말았던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달성이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해야 할 동기를 분명하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더하여 수시로 그 동기를 강화시킬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


<원 워드>는 미국 최고의 동기부여 전문가 존 고든이, 기독운동선수협의회 임원인 댄 브리튼과 지미 페이지 등과 함께 개발한 동기부여방법을 담았습니다. ‘one word’ 그러니까 목표달성을 위한 동기를 끊임없이 부각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한 단어’를 골라 마음에 새기게 된다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저자들은 작심삼일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비법으로 ‘원 워드 이론’을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즉 “자신을 위해 이것(원 워드)을 실시한다면 한 해의 새로운 목적과 의미를 찾고 한 곳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힘을 얻을 것(14쪽)”이라고 하였습니다. 원 워드이론은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어서 자신만의 원 워드를 찾는 단계, 마지막으로 원 워드를 실천하는, 세 단계를 통하여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원 원드>는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먼저 저자들이 원 워드이론을 개발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원 워드의 힘과 실천법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어서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의 단계를 각각 설명합니다. 나아가 원 워드 이론을 통하여 이룬 성공을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하지 말고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이 방법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원 워드의 사례를 소개하였고, 원 워드 이론이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야 할 이유를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 자신의 원 워드를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원 워드는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기간 동안에 한정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면, 그 목표가 달성되면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하면서 이에 맞는 원 워드를 다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서론에 적은 것처럼 45분이면 이 책을 독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45분을 투자하면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대단한 자신감을 저자들은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원 워드를 찾기 위해서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장애가 되는지는 책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라고 합니다. 첫째. 나는 무엇이 필요한가? 둘째. 내 길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 셋째, 무엇을 버려야 할까?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면 이를 떠오른 순서대로 기록하고,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염두에 두고서 원 워드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를 권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단어가 떠오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시행하라고 합니다. 첫째, 마음을 열어라, 둘째, 원하는 하나에 집중하라, 셋째, 귀를 기울여라, 등입니다. 언듯보면 아주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원 워드를 찾아냈으면,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겠는데,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라고 합니다. 첫째, 원 워드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즉 거처하는 공간은 물론 스마트폰 등, 눈에 쉽게 띄도록 곳곳에 적어두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원 워드가 뇌리에 각인될 수 있도록 격언이나 인용문, 혹은 노래 등 원 워드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보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원 워드를 주변의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입니다.


원 워드를 발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은 곧 자신의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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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두기 - 세상의 모든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힘
임춘성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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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근 불가원(不可遠 不可近)”이라는 말은 특정 직업을 가진 분과는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살면서 만나는 모든 분들과의 관계에 적용해도 크게 잘못될 일이 없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에서 온 여덟 집이 한 동네 살았습니다. 그런데 몇 집을 돌아가면서 주말 마다 혹은 주중에도 집을 돌아가면서 만나 저녁을 같이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려가거나 찾아오는 것으로 인하여 생활의 흐름이 깨어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불가근 불가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따’시켰던 샘인데, 그렇다고 왕따를 당할 지경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모임에 끼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던 분도 계셨던 것을 보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옳다고 할 것까지는 없겠습니다만, 역시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편한 것 같습니다.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의 임춘성교수님께서 내신 <거리 두기>는 딱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아니 어쩌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거리 두기’란 “세상의 모든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힘”이란 부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휘둘리지도 않고, 헤매지도 않고, 혼자 속 끓이지 않고 스스로 중심 잡고 우아하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 법인데, 바로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거리 두기를 제대로 하려면 우선 ‘나와 세상, 그 사이’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는 휘둘리지 않는 법, 버림받지 않는 법, 치우치지 않는 법, 손해보지 않는 법, 상처받지 않는 법, 책임지지 않는 법(이건 조금 거시기할 수도 있습니다), 홀로되지 않는 법에 이어 꼴통되지 않는 법으로 완성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꼴통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럼으로 해서 ‘세상을 우아하게 살 수 있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건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의 이 지식과 경험, 지금의 사고력과 판단력이라면, 과거로 돌아간 그때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을 만나 인간관계를 알고, 사건을 겪고 인과관계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프롤로그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저자가 살아오면서 직접 겪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적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다 똑 같지는 않겠습니다만 많은 부분이 공통적일 수도 있기 때문에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속 모를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의문부호’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노래, 책, 영화 등 다양한 분야의 것들을 끌어다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기 때문에 쉽게 읽히며 이해가 되는 것도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쩌면 저도 잘 알고 있거나 이미 본 영화 혹은 책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가끔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원전이 분명한 것들은 찾아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소설 <인공호흡>의 경우는 히틀러가 체코의 프라하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를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인용했다고 해서 <나의 투쟁>을 읽어보았지만 그런 내용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술술 읽힌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딱 한 군데 저자의 뜻이 읽히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신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언가의 길목에 꽈리를 틀고 있다는 것입니다.(56쪽)” ‘꽈리’가 아니라 ‘똬리’가 맞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이 부분의 의미가 분명히 와 닿지 않은 것 같아 자꾸 반복해서 읽게됩니다. ‘거리두기’는 중용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판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중용은 극단을 피하는 소극적인 개념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반면, 거리두기는 극단과도 소통하는 적극적인 개념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품이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거리두기는 저자의 말대로 ‘스스로를 지키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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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세계의 만남 - 교류사로 읽는 문명이야기
제리 벤틀리 지음, 김병화 옮김 / 학고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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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연말에 모 학회의 송년 임원회의에 초대를 받아 여행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다녀온 해외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해오던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앙코르와트, 이베리아반도, 아나톨리아반도, 발칸반도,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동유럽까지 모두 여섯 차례의 해외여행 가운데 제일 심혈을 기울여 여행기를 썼던 이베리아반도 여행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문명의 충돌에 두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이 충돌한 현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은 711년, 지금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던 우마이야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아랍인과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연합군을 이끌고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이래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왕과 카스티야의 이사벨여왕의 기독교 연합군이 그라나다를 함락할 때까지 무려 781년 동안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협력과 충돌을 반복하면서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를 돌아보면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세력들이 남긴 찬란한 유물과 그 안에 숨겨둔 놀라운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여행경험은 문명의 충돌현장을 찾는 여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문명의 충돌현장은 종교적 배경이 서로 다른 문명의 세력다툼으로 변질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소개드리는 제리 벤틀리교수의 <고대 세계의 만남>은 ‘교류사로 읽는 문명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종교가 다른 문명이 만났을 때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하와이 대학의 역사학과에 재직하면서, 역사적인 문화 간의 상호 영향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만, 문명 간의 교류는 어느 시기부터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세계의 만남>에서는 근대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문화 간의 만남의 역동적인 모습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로 다른 문명 출신의 사람들이 만날 때 일어나는 문화적 효과에 주목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사실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접촉하면서 갈등을 빚고, 타협을 하며 때로는 개종을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때 개종을 촉발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강력한 지원 없이 종교적, 문화적 전통만으로는 타 문명에 속한 사람들의 개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앞선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문화전통들이 폭넓은 절충주의적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역시 타 문명에 속한 사람들의 개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절충주의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이질적인 문화 전통의 틀 속에 기성의 신념과 가치 및 관습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며, 그 과정에서 팽창주의적 전통도 외국 땅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합니다. 절충주의란 문화적 타협으로 나가는 대로(大路)라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의 만남>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장 ‘문명들의 조우’에서는 우선 만남을 정의합니다. 두 번째 장 ‘고대 실크로드의 세계’에서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 한제국으로부터 인도의 마우리아제국, 중동의 파르티아제국 그리고 서쪽 끝으로는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를 통하여 이동한 문명의 속성을 설명합니다. 세 번째 장 ‘선교사와 순례자의 세계사’에서는 서기 600년부터 1,000년까지를 배경으로 동쪽 끝으로는 당제국, 그리고 중동에서 북부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세력을 펼친 아랍제국, 그리고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한 비잔틴제국과 북유럽의 카롤링거왕조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문명의 속성을 설명합니다. 네 번째 장 ‘유목제국의 시대’에서는 서기 1,000년에서 1,350년까지 동쪽 끝으로는 원제국으로부터 차카타이한국, 일한국, 그리고 유럽 동부에 접근한 킵차크한국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들이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을 통합한 시기의 문명을 설명합니다. 마지막 장 ‘세계의 질서를 향하여’에서는 1,350년에서 1,500년에 이르기까지로 동쪽 끝에는 명제국이, 인도에는 무굴제국이, 중동에는 사파비드제국이 그리고 아나톨리아반도로부터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오스만제국이 차지하던 시절의 문명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라는 단어는 “한 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바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개종이라는 단어는 개인적 경험, 즉 개인 영혼이 나아갈 방향이 재정립되는 것, 낡은 가치체계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체계로 전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와 옮긴이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신앙과 가치가 문화 간 경계선을 넘어가서 서로 다른 문명의 사람들에게서 충성심을 얻어 내고 생소한 문화 전통에서 개종자를 얻을 수 있었던 한계는 어디였을까?(17쪽)”라는 의문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즉 특정 집단에서 대규모적으로 발생한 개인들의 개종으로 새로운 문화 전통이 자리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개념을 확대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근대 이전에 사회적 맥락에서 일어난 문화 간의 개종을 분석해보면 자발적 제휴를 통한 개종,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압력에 의하여 유도된 개종, 동화를 통한 개종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자발적 제휴를 통한 개종이 성격을 구분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편인데, 대체로 근대 이전의 시기에는 문화적 경계선을 오가면서 장거리교역을 담당하던 상인들처럼 정치적․경제적․상업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자발적 제휴에 의한 개종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경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지만, 개인을 위협하지 않고도 조세나 재정지원, 혹은 신분 등에서 차별하거나, 종교행사의 참여를 제한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종교시설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문화의 경계를 넘어 신념과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절충주의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실크로드의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때 중국 토착의 도가사상을 비집고 들어가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불교는 도가의 용어와 사상을 마음대로 빌려 썼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부전이나 삼신각은 인도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토착신앙을 받아들임으로서 신도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교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기독교이지만 로마제국 초기에는 교세를 확대하기 위하여 이교도의 문화를 반영하였을 뿐 아니라 이교적 가치를 수용할 여지를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이교 영웅들의 특질을 기독교 성인들과 결합시키고 이교도 신을 기념하는 날을 기독교 축일로 정하여 이교의 전통을 흡수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입니다.


총론에 해당하는 문화간의 만남에 대한 설명에 이어 다룬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적 교류의 설명에서 주목할 점은 고대 실크로드시대에는 세 가지 차원에서 문화발전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차원은 중국, 인도, 근동, 지중해지역 등 유라시아 전역의 정착 농경문명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문명에 일관성을 부여할 신앙과 가치체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는 각각의 문명권에서 성장한 문화적 전통이 해당 지역의 국제도시에 유입된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에게는 대안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규모 개종이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문화적 교류를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차원은 상인들의 역할입니다. 문화권을 넘나드는 상인들은 자신의 토착문화전통을 이주한 도시로 가져옵니다. 그들이 가져온 문화적 전통이 이주도시의 엘리트층의 관심을 끌게 되면 개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각각의 시대를 통하여 명멸한 제국의 문명을 설명하는 가운데, 기독교, 불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의 발전과 쇠퇴과정을 흥미롭습니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 인도는 브라만교 중심사회였는데,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에 머물던 사회가 교역과 상업중심사회로 변환이 되면서 도덕과 윤리적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불교가 사제계급이 주도하는 비교(秘敎)적 제례중심이던 브라만교를 대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브라만 사제들은 오직 자신들의 이익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상인들과 연대하여 호혜적 공생관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초기 불교의 교리는 단순하였지만, 오히려 다른 종교의 도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중반에는 아쇼카왕이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면서 불교는 폭발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불교가 상인들과 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크로드를 따라 다른 문명권으로 확산되는 기회도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중국에 자리잡기까지는 무려 50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유가와 도가의 전통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북부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자발적 개종이 시작되면서 중국사회에 불교가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3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동안 인도의 불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많은 인도의 승려들이 중앙아시아 국가나 중국으로 여행하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역으로 불교가 시작된 인도를 찾아 원천교리를 배우려는 승려들의 발길이 잦아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혜초스님이 인도를 방문하고 그 여행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11세기로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목제국들이 이슬람을 바탕으로 유라시아대륙을 석권하면서 이슬람교가 부상하고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인도에서도 불교가 탄생의 모태가 되었던 힌두교의 전통으로 흡수되면서 인도의 불교로부터 배울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이 점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에서도 당제국 시절 불교가 탄압을 받기도 했으며, 송왕조에 들어서 중국적인 문화전통이 살아나면서 불교의 세력도 퇴조하였습니다. 반면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크메르문명에서는 불교가 꽃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몽골제국에 이어 중동지역을 차지한 오스만제국이 아랍의 이슬람을 통치의 이념으로 삼으면서 이슬람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꾸준하게 확장을 하게 됩니다. 아랍지역은 물론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까지 중심종교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절충주의적 특징때문에 토착 문화전통과 병행할 여지가 컸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지역에서는 기존의 문화적 전통이 완전히 소멸하고 새로운 전통이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적 대안들이 절충적으로 뒤섞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지역의 그림자극에는 힌두교의 서사시를 담고 있으면서, 시바와 비슈누에 바치는 주문이 알라에 대한 기도와 함께 읊기도 하는 것입니다.


15세기를 중심으로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5세기 동안의 발전과정을 토대로 예측해본다면 이슬람에 멀지 않은 미래에 세계를 주도하는 문화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5세기가 흐른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근대 이후 기독교국가의 적극적인 선교에 힘입어 기독교의 비중이 가장 크고,이슬람이 뒤를 잇고 있으며, 인도대륙에 국한되어 있는 힌두교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불교는 그 세가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 간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좁혀져 종교적 특징 이외에 권역을 구분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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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 건네는 인사 - 감춰져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새롭게 읽기 두 번째 티켓 5
정희정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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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양은 몰라도 6대주는 발자국을 찍어보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여행일정을 만들다보니 5대주에 있는 나라들은 적어도 하나씩은 다녀왔지만, 호주는 남겨두고 있습니다. 20여년 전에 호주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퍼스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비용이 해결되지 않아 못 같던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한번 꼬이면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호주와의 인연의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호주가 그리 가깝지도 않으면서도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가보고 싶은 호주를 속속들이 소개한다고 해서 <호주에 건네는 인사>가 반가웠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호주는 시드니와 맬버른 등 동남부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호주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10개 도시를 찾아,  그 도시들의 형성된 배경은 물론 그 지역의 관광명소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단순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중요한 정보를 담은 여행서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맬버른과 시드니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갈등 같은 것도 흥미로운 정보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건 지역 간의 미묘한 갈등은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치인들이 그것을 필요이상으로 부각시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 역시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만, 여행지에 관한 정보(제가 말씀드리는 정보에는 숙소나 교통편에 관한 것은 없는데,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잘못된 정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와 여행지에서의 느낌을 어떻게 균형을 잡는가 하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제 경우는 가급적이면 줄이려고 합니다만, 이 책의 저자는 참 적당한 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지의 분위기를 잘 전할 수 있는 정도의 사진도 돋보입니다. 인터넷에 넘치는 여행기를 보면 사진만 늘어놓고 설명은 없거나 두어 줄 정도 달고 있어 무었을 말하는 사진인지도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저자는 유럽인들이 몰려오기 전에 호주대륙에서 살던 원주민, 에버리진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책의 영어제목을 <Say Palya to Australia>라고 했는데, 팔랴(Palya)는 에버리진의 말로 안녕, 잘 가, 고마워 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호주정부가 오래도록 유지한 백호정책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호주사람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여전히 앙금처럼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영어권 국가에서 온 학생은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하는 반면, 동양에서 온 학생은 부당한 차별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먼 선조가 유럽에서 끌려온 죄수였거나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 인생이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호주사람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자는 이 책에 담은 열 곳을 모두 직접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브리즈번에 있는 그리피스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304일 동안 호주에 체류했다고 합니다만, 열 곳을 여행하느라 소요된 시간은 물론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하여 도서관에서 혹은 현지 사람들과 보낸 시간들을 계산하면 호주에 있는 내내 호주여행에 관한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학교에 출석은 어떻게 하셨는지.... 어떻든 저자의 가상한 노력이 담긴 <호주에 건네는 인사>가 빛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담은 에버리진에 대한 저자의 지극한 마음도 빛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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