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천천히 그곳을 걷는다 - 카뮈의 집에서 뒤라스의 바다까지 여행자를 부르는 작가의 흔적을 찾아
길혜연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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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의 해외여행은 업무로 다녀야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여행사 상품으로 다니고 있으니 여유 혹은 의지가 작용하기란 참 어려운 여건인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발길이 닿는 대로 혹은 보고 싶은 곳을 찾아가는 여행이 부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여행에서도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나름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합니다. <마음은 천천히 그곳을 걷는다>는 여유로운 가운데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여행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프랑스 시인 자크 르레베르의 흔적이 남아 있는 파리에서 <연인>으로 기억되는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살았던 트루빌에 이르기까지 10명의 프랑스 시인, 작가들의 삶이 어려 있는 장소를 찾아 그들의 작품에 녹아있는 무엇을 <마음은 천천히 그곳을 걷는다>에 담았습니다. 어쩌면 작가가 프랑스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작가의 생애에 대한 정보나 작품들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저자의 방문을 받은 작가는 자크 프레베르, 앙투안 생텍쥐페리, 알베르 카뮈, 에밀 졸라, J.M.G. 르 클레지오, 장 콕토, 프랑시스 잠, 쥘 베른, 에드몽 로스탕, 그리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입니다. 프랑스문학에 대한 앎이 많지 않은 저에게는 생소한 분도 있고,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장소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읽어보고 싶은 작품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문갑식의 <여행자의 인문학>의 경우에는 문학과 미술을 함께 다루었고, 프랑스와 영국으로 범위를 넓힌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기획입니다. 여행과 인문을 엮는 다양한 시도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주로 하고 있는 단체여행과 인문을 엮는 시도 역시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길혜연작가는 <마음은 천천히 그곳을 걷는다>에 그곳의 분위기에 잘 맞는 시를 소개하고 있어 책을 읽으면서 시를 음미하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나름대로는 꼼꼼하게 기획된 글이라는 느낌이 듭니다만, 저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았다”라고 프롤로그에 적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 역시 처음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여행을 시작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니 문학을 아카데미즘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내고 싶다는 소심한 불손함이 있었고, 그 불손함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되바라진 꿈이 배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라고 설명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 여행을 빌미로 하여 제가 가본 곳과 연관이 있는 책을 소개하고, 제 글을 읽는 분들이 한번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좋지 않을까하는, 혹은 그곳에 가시는 분들이 여행가방에 넣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작가적 상상력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장면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장 콕도의 도시 망통을 찾았을 때 발견한 종려나무를 보면서 작가는 롤랑 바르트를 기억해냈습니다. “나무들은 알파벳이라고 그리스인들은 말했다. / 모든 문자-나무 중에 종려나무가 가장 아름답다. / 솟구쳐 오르는 종려잎 같이 흘러넘치는, 명료한 글쓰기에 대해 종려나무는 ‘늘어짐’이라는 주요한 효력을 지닌다.(-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글쓰기를 향하여」중에서)” 그리하여 “내 글쓰기의 종려잎이 드리우는 ‘늘어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늘어짐’은 중력의 법칙에 의한 것이니 내 생관할 바가 아닐 것이다. 내가 중력의 법칙에 개입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손을 떠난 글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될 테니.(190쪽)”라고 적었습니다. 작가와 그의 글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였습니다.


프랑시스 잠이 치유를 꾀한 피레네산맥에서는 ‘프랑시스 잠의 노새처럼’이라는 싯귀를 적은 김종삼시인을 떠올린 작가는 자신의 젊은 날에 대한 소회를 들려주는데, 작가의 대학시절의 사회분위기와 함께 새겨둘만해서 옮깁니다. “저는 아이들의 조롱을 받으며 머리를 숙인, 무거운 짐을 진 나귀처럼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렵니다. 삼종의 종소리가 울립니다. - 프랑시스 잠의『새벽 삼종에서 저녁 삼종까지』서문 중에서(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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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길을 묻다 - 혼자 떠나는 세계도시여행
이나미 지음 / 안그라픽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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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격월간으로 여행과 책읽기에 관한 칼럼을 쓰고 있는데, 다음에 안내할 곳을 체코의 프라하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프라하에서 길을 묻다>가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잡지의 편집장을 지내다가 아예 편집디자인회사를 차린 이나미대표가 혼자 떠나는 여행을 즐기다가 어느 날 여행을 통한 글쓰기에 착안해서 기획한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쓰기 위한 여행이었다는 것이고, 그 첫 번째 여행지가 프라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여행을 통한 글쓰기는 온몸과 마음의 ‘인터렉션(interaction)’을 이용한 다큐멘터리 작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치 ‘배우’가 관객을 염두에 두고 감정을 잡는 것처럼 여행을 하나의 글쓰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혹은 누군가를 대신하여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 남긴다는 일종의 기획된 여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만치 않은 투자가 될 것 같은데, 수익은 어떻게 창출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저도 최근에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을 시작했습니다만, 아내와 저에 대한 포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것은 애프터서비스에 해당되는데, 출판시장이 얼어붙다보니 아직 책으로 묶어보자는 제의도 거절당하고 있는 편입니다.


어떻든 이 책을 내기 위하여 그녀는 두 차례에 걸쳐 프라하를 여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비행기로 갔다가 프라하까지 열차로 이동하는 방식이었고, 두 번째는 프라하까지 가는 직항로가 개설된 뒤라서 직접 프라하까지 왕복하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첫 번째 여정이다보니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여행은 ‘길을 잃다’라는 제목을 달았고, 두 번째 방문에서는 아무래도 친숙해진 프라하거리에서 많은 것을 느끼도 보았기 때문에 ‘길을 찾다’라는 제목을 달았던 것 같습니다.


여정을 꼼꼼하게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기록을 남기는데 상당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여행은 미리 상세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곳을 방문하지 못하면 큰일날 듯한 방식이 아니라 큰 일정만 짜두고 나머지는 현지 사정에 따라서 여유있게 움직이는 방식으로 보입니다. 자유여행이 가지는 장점이기도 하지만, 투입된 자원에 비하여 얻는 것이 너무 소략할 수 있는 한계도 있습니다. 식당과 숙소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반하여, 프라하에서 만나는 다양한 유적에 대해서는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놓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003년 가을, 그리고 2005년 여름에 걸친 두 차례의 프라하 여행은 순전히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자구책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나에게 귀기울여주지 않는다면, 내가 나의 고단함을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나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것인가를 반성하면서...”라고 적은 것을 보면, 그녀에게 프라하는 단지 일상에서 벗어나 어딘가 먼 곳에 가서 자유를 느낀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가족들이야말로 고단한 가족을 품어주는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가 방문한 장소 가운데 유대인 묘지는 자유시간의 짬을 내서 찾아보려고 포기한 바 있었기 때문인지 부러우면서도 그곳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어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프라하의 밤거리가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하긴 벌써 10년도 넘은 이야기라서 새로운 정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인형극이나, 연주회, 무용극 등을 관람하고 박물관도 돌아보았다고는 하지만, 프라하성과 카를교 그리고 몇 개의 교회를 돌아본 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보니 이 책을 읽은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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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 개정판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 르네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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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http://blog.joins.com/yang412/12878043>로 처음 만난 보르헤스를 [북소리]에서 소개한 것이 2012년이었으니, 보르헤스를 만난 지도 벌써 5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읽어가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라는 긴 이름을 가진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평론가입니다. ‘20세기 세계문학의 지배자’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현대문학에서의 그의 위치는 절대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인으로 출발하였지만, 기호학, 해체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후기 구조주의를 섭렵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여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학에도 뛰어나서 모국어인 스페인어 외에도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 등 5개 국어를 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하버드대학의 강연에서 호메로스의 시를 현대 영어와 9세기의 고대 영어로 낭송한 바 있습니다.


각각의 시를 우리말 번역과 함께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눈은 북쪽에서 날아오고, / 서리는 들판을 묶으며, / 가장 차디찬 낟알, / 싸락눈은 땅에 떨어진다. // It snowed from the north; / rime bound the fields; / heil fell on earth, / the coldest seeds. // Norþan sniwde / hrim hrusan bond / hægl feol on eorþan / corna caldast." 영어는 그런대로 의미를 알 듯도 합니다만, 9세기 영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떤 의미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나무위키에서는 “보르헤스는 착상을 서술한 책이 있거나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그 사실과 책, 인물에 대해 평을 하는 식으로 적는다. 그 사실과 인물, 책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추리 소설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리고 서술이 핵심에 닿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문장을 끝내 문장과 서술, 상상의 갈증을 표현한다.”라고 보르헤스 작품의 얼개를 설명하고,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라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평을 인용하였습니다.(나무위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서 인용함) 사실 보르헤스의 작품의 끝에 이르면 황당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상상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셈이니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 셈이 아닐까요?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는 ‘보르헤스의 문학, 취향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입문서’라고 하는 출판사의 설명처럼, 어렵다고 하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읽었습니다. 특히 이 책의 내용은 1960년대 말 보르헤스가 하버드대학교의 노턴강연에서 가졌던 여섯 차례의 특강을 녹취하여 편집한 것으로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인 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1967년 10월 24일 시작된 강연은 12월을 거르고 매달 한 차례씩 열려 1968년 4월 10일에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강연의 녹음테이프는 도서관 어딘가에 30년이 넘게 감춰져 있다가 2000년에서야 다시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는 강연의 제목을 따온 여섯 개의 장과 함께 이 책의 편집을 맡은 칼란-안드레이 미하일레스쿠의 해설을 담은 ‘이런저런 다방면의 기교에 관하여’를 뒤에 붙여 구성하였습니다. 그녀는 보르헤스의 강연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첫 강연 ‘시라는 수수께끼’는 시의 존재론적 위상을 다루고 있으며, 둘째 강연 ‘은유’는 수세기에 걸쳐 시인들이 동일한 은유 유형들을 되풀이하여 사용해 왔던 방식을 논하는데, 그 유형들은 12개의 ‘본질적인 유사 형태들’로 환원시킬 수 있으며, 그 나머지들은 놀라게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 뿐이므로 그 생명이 짧다고 보르헤스는 암시한다. 서사시를 다룬 셋째 강연 ‘이야기하기’에서, 보르헤스는 서사시에 대한 현대 세계의 무관심을 논평하고, 소설의 죽음에 대해 숙고하며, 현대의 인간 조건이 소설의 이데올로기에 반영된 방식을 검토한다. 넷째 강연 ‘시 번역’은 시 번역에 대한 전문적 고찰이며, 다섯째 강연 ‘사고와 시’는 문학의 위상에 대해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수필가적인 태도로써 실증해 준다. 마법적이며 음악적인 진실이 이성의 안정된 허구들보다 더욱 강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보르헤스는 시의 의미는 맹목적 숭배물이며, 강력한 은유들은 의미를 강화하기보다는 해석학적 틀을 불안정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강연 ‘한 시인의 신조’는 그가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에서’작성한 고백적 텍스트이며 일종의 문학적 유서이다.(191-192쪽)”


<픽션들>에 담긴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처럼 보르헤스의 기억력은 아주 비상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읽기를 좋아했고, 평생을 도서관 사서로 일한 탓에 30대 후반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한 그는 말년에 시력을 완벽하게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책읽기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는 논외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든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떨어진 시력을 보완하기에 충분했던가 봅니다. 원고를 써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르헤스는 여섯 차례의 노턴강연을 원고 없이 기억력에만 의존하여 치렀다고 합니다. 즉, 강연이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베어울프』, 『고대 북구 시가집』, 『아라비안나이트』, 꾸란 그리고 성경 등의 고전으로부터 라블레,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키이츠, 하이네, 포, 스티븐슨, 휘트먼, 조이스 그리고 물론 그 자신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에서 이끌어낸 인용문을 예로 들어가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의 기억력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 책을 선택하면서 보르헤스에 대한 이해를 높여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졌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실은 그 기대를 얼마나 채울 수 있었는지 단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청중의 이런 기대를 의식했음인지, 보르헤스는 “맨 먼저, 여러분이 제 강연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또는 오히려 무엇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관해 명확히 알려드리고 싶습니다(9쪽)”라고 말문을 열고는 “저는 제 인생의 대부분을 문학에 바쳐왔는데도, 여러분에게 의혹만을 제공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10쪽)”라고 겸손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의혹을 가진다는 것은 곧 생각을 하게 만들고 결국은 답을 얻을 수 있게 될 터이니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저는 시(詩)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를 제대로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별로 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시집에 적혀 있는 시는 그저 죽은 상징에 불과하지만 “적절한 독자가 그 책을 펼치노라면, 언어 또는 오히려 언어 너머에 있는 시는 살아나게 되고, 우리는 언어의 부활을 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경험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시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보르헤스는 ‘사과의 맛은 사과 자체에 있지 않고 먹는 사람의 입 안에도 없다’라고 한 버클리주교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럼 사과의 맛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보르헤스는 사과의 맛은 사과와 그것을 먹는 사람 사이의 접촉을 통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시의 의미도 시를 읽는 행위를 통하여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강연 ‘은유’에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장자는 자신이 나비였던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서, 자신이 나비였던 것을 꿈꾸었던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이 사람이라고 지금 꿈꾸고 있는 나비인지 헷갈린다(45쪽)’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고 ‘이 은유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읽으면서 그의 앎의 깊이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보르헤스는 은유의 전망이 아주 밝다고 하였습니다만 현실을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직설적인 것을 좋아하는 탓인지 은유법을 쓰거나 우회적으로 표현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은유의 전망이 어두울 것 같습니다.


세 번째 강연 ‘이야기하기’는 건너뛰고, 네 번째 강연 ‘시 번역’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앞서도 호메로스의 시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정말 지난한 일입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정말 어렵다고 합니다. 보르헤스 역시 영미문학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자국에 많이 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반역이다(Ttraduttore, traditore)”라는 이탈리어 경구(警句)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외국어 작품을 우리말로 읽을 때 의역된 작품이 나은 지, 아니면 직역된 작품이 나은 지는, 쉽게 결론을 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결국 제가 직장에서 좋아하는 표현, ‘사례별로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보르헤스가 매슈 아널드를 인용하여 ‘직역은 기이함과 어색함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신기함과 아름다움을 자아내기도 한다’는 점을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직역이라는 개념 성경의 번역으로부터 나왔다는 보르헤스의 생각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다섯째 강연 ‘사고와 시’에서는 시를 쓰는 방법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보르헤스는 평범한 문체와 정교한 문체로 시를 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것은 문체가 평범한가 정교한가에 있지 않고 시가 살아 있느냐 아니면 죽었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작가를 읽을 때, 그 작가를 믿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합니다. <돈키호테>의 예를 든 보르헤스는, 돈키호테가 벌인 모험의 일부가 과장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 그 자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돈키호테의 모험의 일부는 책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로서 다소 부풀려졌을 수도 있겠으나, 돈키호테의 성품 자체는 신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르헤스가 마지막 강연에서 이 점을 다시 짚고 있는 것을 보면 책읽는 이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강연 ‘한 시인의 신조’는 보르헤스의 문학적 삶에 대한 진솔한 자백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작품활동 초창기만 해도 화려한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천박하다고 남들로부터 경멸을 받지 않을까 생각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허영심의 발로일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쓸 때, 그것을 사실적으로 충실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깊은 무언가에 충실한 것을 담아내려 노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쓰는 이유는 어땠건 그것을 믿기 때문이라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단순한 역사를 믿는 것처럼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꿈이나 생각을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153쪽)’


젊었을 적에는 표현을 믿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망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독자도 그 자신도 생각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표현을 믿지 않고 암시만을 믿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시인으로서의 특별한 신조라고까지 할 것은 아니라고, 즉 자신은 시인으로서의 신조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강연을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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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팀장이 답하다 -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 팀장 리더십
이진수 지음 / 이담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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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퇴근시간을 앞둔 직원들의 들뜬 마음에 ‘약속도 없으니 야근이나 해야지...’라며 찬물을 끼얹는 상사의 모습을 그린 광고가 있습니다. 퇴근 준비를 하던 직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야근할 준비를 합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우리네 직장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부부처의 간부로 일할 무렵부터였으니, 개인적으로 야근을 해본지가 꽤 오래되었습니다. 퇴근시간에 딱 맞춰서 사무실을 나선 것은 사정이 있는 직원들이 눈치를 보지 말고 퇴근하라는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야근은 직장인의 애환이 많이 서린 근무형태일 것입니다. 때로는 좋은 결과가, 때로는 실망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야근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고, 특히 시한 내에 처리해야 하는 비상상황에서 하는 근무형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상황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근무형태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야근이 일상인 직장이라고 한다면 적정인원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조직자체의 문제가 발생하였음에도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라하겠습니다.

 

<야근, 팀장이 답하다>는 우리나라 조직사회에서 일상처럼 되고 있는 ‘야근’이라는 근무형태를 주제로 하여 조직관리에 관한 이야기, 특히 ‘팀장’이라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팀장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조직을 건강하게 유지하면서도 좋은 성과를 달성하기 위한 비법을 소개한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야근을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저자는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가 국내 9개 기업 45명의 대리급 직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시간 활용실태에 대한 보고서 <한국 기업의 조직건강강도와 기업문화 진단 보고서>의 내용을 근간으로 우리나라 기업조직의 문제점을 짚고, 저자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매킨지보고서는 앞서 말씀드린 광고에 나오는 야근의 행태를 ‘눈치보기 야근’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정말 처리해야 할 일이 밀려서 야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고과의 숨통을 쥐고 있는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 근하는 척’해야 하는 상황을 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사는 나쁜 상사의 전형일 우려가 높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상사가 나쁜 상사라고 규정합니다. 1. 문제나 책임질 일이 생기면 발뺌하는 상사, 2. 지시가 분명하지 않고 계속 말을 바꾸는 상사, 3. 폭언을 일삼고 부하직원을 감시하는 상사, 4. 팀원의 성장에는 관심 없고 오히려 공을 가로채는 상사, 5. 정보를 독점하고 공유하지 않는 상사, 6. 아무 생각 없는 상사 등입니다.

 

저자는 조직의 팀장이 참고할 조직관리의 비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설명한 내용을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핵심과제’라는 제목으로 몇 쪽으로 짧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만 제대로 이해해도 어느 정도는 개괄할 수 있을 듯합니다. 1. 스스로 명확해질 때까지 일의 방향을 고민한다, 2. 일의 방향과 내용에 맞는 적임자를 정한다, 3. 주어진 시간을 치밀하게 관리하여 목표 일정에 맞춘다, 4. 권한을 위임하여 팀원을 성장시킨다, 5. 일이 진척되지 않을 때는 질문을 통해 돌파한다, 6. 문제는 즉시 공유하고 정확히 정의하여 해결한다, 7. 생각 시스템 1과 2를 상황에 맞게 적용한다, 8. 회의는 가능하면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접근한다, 9. 연결고리 일은 리더가 솔선수범하여 주도적으로 관리한다, 10. 나누어진 일을 통합하여 일을 마무리한다.

 

조직관리 이론을 설명하다 보면 아무래도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심리학 실험이나 문학작품 등 다양한 자료들을 인용하여 상황을 쉽게 풀어내고 있어 쉽게 읽히는 점도 특장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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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어, 욕망을 삼키다 - 어원과 상식을 관통하는 유쾌한 지식 읽기
노진서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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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상식을 관통하는 유쾌한 지식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노진서교수님의 <영단어, 욕망을 삼키다>를 받아들고 보니, 같은 부제를 달아 선보였던 <영단어 지식을 삼키다; http://blog.joins.com/yang412/13477175>의 후속편이었습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30개의 영어단어의 내력을 동서고금의 자료를 인용하여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문에 적은 저자의 기획의도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언어라는 숲을 구성하는 단어들은 저나마 그 나름의 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연을 알아보는 것은 숨겨진 그들의 비밀을 찾아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입니다.” 누군가의 뒷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하는 것처럼 하나의 단어에 숨겨진 뒷이야기 역시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전작과는 차별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제목을 고려하여 30개의 영어 단어를 두 개로 묶어 각각 ‘욕망,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심연’과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고’라는 작은 제목으로 구분한 것은 뜻을 분명히 알 수 없었습니다.


단어의 유래라 하면 그저 반쪽 정도의 분량이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만, 단어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거리들을 인용하여 읽는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단어의 유래를 추적해 올라가다보면 다양한 유럽 민족의 고어는 물론 라틴어, 그리스어 심지어는 히브리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까지 거슬러 뿌리를 캐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학에 대한 내공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기획을 하다보면 하나의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따라 글 내용을 배치하는 편이 쉬울 터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그 틀을 따라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포로수용소의> 경계선, 혹은 마감시한을 의미하는 'deadline'을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는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말꼬리를 풀어냅니다. 죽음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특히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사후세계를 상정하였고, 사후세계와 관련된 미이라의 어원을 따져 들어가기도 합니다. 저 역시 다양한 고정칼럼을 쓰고 있으니 원고의 마감시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만, deadline은 어떤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을 의미하는 마감시한이라는 의미보다 사후세계로 넘어가는 문턱 즉 죽음과 관련되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1861년 남북전쟁 때 남부군이 운영하던 조지아주 앤더슨빌의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탈주를 막기 위하여 막사 주위에 경계선을 쳐놓고 그 선을 넘으면 무조건 사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을 deadline이라고 했다니, 특히 글을 써서 투고하는 사람들에게 deadline 상징하는 의미가 아주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간혹 저자가 인용하는 내용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성씨가 생기게 된 동기가 한 동네에 사는 이름이 같은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왠지 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씨는 한 집안 사람임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한다면 단순하게 동명이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다 심오한 뜻이 담겨있을 듯합니다. 또 다른 예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규정한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돈키호테가 편력기사의 흉내를 내기 위하여 세상을 주유해보기를 권유했던 것에 응한 것이니 엄밀하게 말하면 주종관계라기 보다는 계약관계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 더 짚자면, 절대적 주종관계의 전형으로 인용한 일본의 사무라이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주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리는 희생정신,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단결하는 동지애, 이런 것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그것, 놓치고 있는 그것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닐까요(145쪽)”라는 설명은 시대착오적 인 것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조금 거시기한 느낌이 든 곳이 두어 곳 있었다는 말씀이고요. 전체 내용은 흥미롭고 상식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책읽기였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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