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을지도 모르는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 아기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선택의 시간, 4주 반
콘스탄체 보그 지음, 민세리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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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때, 대뇌의 대부분이 없는 무뇌증 아이를 제왕절개로 분만하는 수술을 보조한 적이 있습니다. 산모의 안전을 고려한 수술이었습니다. 수술로 태어난 아이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없습니다만,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데 필요한 뇌줄기 부분만 있는 아이가 오래 생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산전진찰을 받지 않는 산모들도 적지 않아서 분만에 임박해서야 태아가 무뇌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음파기기와 검사시약의 발전으로 신체적 장애는 물론이고 기능적 장애까지도 임신 중에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100퍼센트의 확률로 미리 맞출 수는 없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했지만, 막상 출산을 해보니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고, 문제없다고 했는데 장애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임신 초기에는 더욱 판단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신체적, 기능적 장애의 가능성이 크다는 검사결과를 받아들게 된 부모들은 대체로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재정적인 이유, 다른 사람들의 시선, 결국은 아이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이별 등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르는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는 그와 같은 고통을 모두 감수해낸 젊은 부모의 감동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결심을 한 사람도 드물지는 않은 듯, 예전에 다운 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임신한 젊은 부부가 결국은 출산을 결심한 이야기를 담은 <아담을 기다리며>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르는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를 읽다보면 주인공 콘스탄체의 결심에 대하여 양가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면서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여전히 어느 쪽이 우세한지 분명치 않습니다. 양가적인 감정이란 ‘출산 후 불과 2시간 생존한 아이를 낳은 것은 참 잘한 것이다, 반대로 임신 14주째 산전진찰에서 후뇌 두류(두개골 뒤쪽에 결손이 생겨서 대뇌와 소뇌의 일부가 두개골 밖으로 튀어나오는 선천성 기형)가 발견되었을 때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말합니다.


당사자인 콘스탄체와 그녀의 남편 티보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으로 충격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늬 부모처럼 쉽게 임신중절을 선택하지 않고 결정을 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 4주에 걸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결정을 하는 동안 참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특히 출산을 격려하는 사람들이 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녀와 남편은 임신중절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하는데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는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임신을 이어가는 쪽 사람들의 조언만을 주로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남동생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종교적,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임신을 유지하여 천명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지만, 의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공중절에 무게를 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콘스탄체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도,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관한다는 종교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점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고통의 순간들이 지난 다음에 그녀의 결정에 공감하지 못했던 친구들을 모두 정리했다는 저자에게서 편향된 사고를 가진 것은 아니었던가 싶기도 합니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할 때, 판단해야 하는 여러 요소들의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들의 무게를 따져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경우라면 ‘임신중절을 받는다’와 ‘임신을 유지한다’가 될 것인데, 콘스탄체와 티보 역시 그런 작업을 했지만, 깊은 고민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저자가 저에게 자문을 구했더라면 임신중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친구목록에서 지워졌겠지요. 그녀의 결정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반면에 꼭 그렇게 해야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아기가 아니라 살아서 태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아이라면 말입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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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결정 -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일상인문학 5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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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http://blog.joins.com/yang412/13549241>를 읽을 때 가졌던 의문이 파스칼 메르시어를 소설의 필명으로 쓰고 있는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 http://blog.joins.com/yang412/13861053>, 그리고 이번에 읽은 <자기결정>에 읽으면서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인 58세의 고전문헌학 교수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교수는 독자입장에서 보면 일탈처럼 보이는 행동을 합니다. 수업 중에 학생들을 교실에 남겨둔채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주인공의 행동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장악해야 한다는 작가적 인식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적어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삶의 격>에서 저자는 ‘삶의 형태로서의 존엄성’을 다루었던 것인데, <자기결정>에서는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결정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자기 결정’의 철학을 담았습니다. <자기결정>은 2011년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3일간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강연 순서에 따라 자기 결정의 삶이 무엇인지, 자기 결정을 위한 전제가 되는 자기 인식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관하여 ‘쉽고 친근하게 이야기’한다고 하였습니다만,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장을 넘기기 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몇 차례나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격>에서 자아와 타인 사이의 관계가 존엄한 삶을 규정했던 것을 이어받은 ‘자기 결정의 삶’의 성격을 다시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아가) 강물에 휩쓸려가는 모래알 같은 존재로 전락’하거나, ‘(내가) 타인의 도구나, 장난감, 일종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강의 제목을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자기 인식은 왜 중요한가?’, ‘문화적 정체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라고 정한 것처럼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어 읽는 내내 질문에 답을 생각해보느라 책읽기의 속도를 낼 수 없었습니다.


자기결정의 삶을 살려면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없이 내적 독립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오르려면 우선 스스로를 테마로 삼아 스스로를 알아가야 합니다. 구체적 방법으로 자신을 말로 표현하고 시간을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경험된 과거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하나는 자아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는 면과 그 모든 자아상이 진위가 모호하고, 착각과 자기기만과 자기 설득으로 가득 찬 구조물이라는 면입니다.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26쪽)”라고도 했습니다. 자기결정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문학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타인의 시선과 관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에 관해 결정하는 것의 한 형태인데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다(55쪽)”라는 막스 프리쉬의 말을 인용하면서, 표현을 통하여 자기인식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글을 씀으로해서 스스로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언급합니다. “나는 그레고리우스를 무작정 리스본으로 가게 만듦으로써 그것이 그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임을 독자들이 얼핏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문장들 속에서 느끼도록 했습니다.(61쪽)”


마지막 강의에서 저자는 한 사람의 정체성은 유전자, 신체 구조, 물리현상 등 신체가 가진 조건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도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문화적 존재로 만드는 기본능력은 언어라고 잘라 말합니다. 교양을 쌓는다는 것, 그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앎의 진실을 가릴 수 있게 되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자기인식이 확고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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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역사, 문화
Harvey Green 지음, 김명태 옮김 / 미강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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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는 지구상에 있는 나무에 관한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나무의 나이테가 그려진 표지를 보면 인간의 삶에 들어온 나무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라는 성격이 분명해지는 듯합니다. ‘내가 사는 중남부 뉴햄프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부분적으로라도 난방을 나무로 한다.’라고 시작하는 머리말이 잠시 헷갈리게 합니다만, ‘몇 천년 동안 이어져온 서민들의 삶에서 나무는 익숙하고 일상적인 재료였다’는 구절을 읽으면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좋은 리뷰방식은 아닙니다만, 저자가 요약해놓은 이 책의 얼개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어, 그대로 옮겨둡니다. “본 서문에서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목재들의 몇 가지 모순과 복잡성을 관찰하였다. 특히 서양의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목재와 다른 제재들의 관계에서 오는 모순과 복잡성을 다뤘다. 제1장에서는 독자들에게 재료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물리적인 설명을 통해서 나무들의 종에 대해서 설명하고, 목재의 겉모양을 결정하는 결과 무늬 같은 나무의 특징들과 물리적 구조에 대한 간단한 배경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제2장은 목재의 주거 기능으로 시작하여 책 전반적으로 계속되는 목재의 역할을 분석하고 있다. 제3장은 사람들의 전통적으로 목재를 사용했던 방법을 분석하고, 통나무를 판자, 플랭크(두꺼운 판자), 커브스 그리고 베니어판으로 만드는데서 오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가공물들과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기 시작한 판자 및 들보를 사용하는 점에서 목재를 분석하고 그들이 조소, 조각상, 악기 그리고 가구에 어떻게 쓰였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종교와 예술이라는 입장에서 제5장은 독특하고 중요한 형태의 구조물인 상자에 대해서 설명한다. 배럴과 대바구니에서 서랍장과 관에까지 다양한 발로를 설명한다. 제6장에서는 이쑤시개, 골프 티, 담뱃대, 지팡이, 옷핀, 성냥, 나무젓가락 그리고 장난감과 같이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인간 생활에 꾸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은 물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제7장에서는 난방, 음식 저장, 의식과 고문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으며 벌목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변해왔는지에 대해서 논의한다. 마지막에는 목재가 건축자재로써 그리고 예술적이며 기능적인 면에서 어떻게 지속적인 매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끝을 낸다.”


생활공간에서 나무가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책읽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있던 목공소에서 나무를 다듬는 흉내를 내던 어릴 적 추억이라던가, 연필을 깍을 때 예쁘게 깍으려 노력하던 추억까지도 되살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무가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될 정도로 성장하려면 적지 않은 세월이 소요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 필요하다는 이유로 나무를 남획한 선조들의 우로 인하여 지구의 허파라고 할 엄청난 규모의 숲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도 새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무에 관한 문화사를 적어 내려가게 됨으로써 나는 인간들이 이 놀라운 자재인 나무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이해력을 갖고 과거를 돌아보며 균형적인 사용을 하기를 바란다.’라고 마무리한 부분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하겠습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짚어보면, 우선 유럽으로부터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에서 나무를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중국과 일본까지 섭렵하면서 우리나라는 빠트리고 있어서 아쉬웠습니다.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의 목공들은 장부이음을 사용하였는데 동양의 가구에서 보이는 이음들은 심미적인 이유 때문에 더 복잡한 형태를 띠기도 한다.(78쪽)’라고 싸잡아 넘어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편집상의 실수인지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떼어 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듯한 기본적인 것부터 매끄럽지 못해 보이는 번역도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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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놀란 한국의 과학기술
그레고리 포코니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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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한반도 안에서 부대끼며 살다보면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가 어디쯤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모르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깨닫게 되는 것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도 삼자의 시선을 통하여 가늠하게 되면 아무래도 객관적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세계가 놀란 한국의...’라는 제목의 연속기획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세계가 놀란 한국의 과학기술>이 책을 내놓은 자음과 모음의 기획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세계가 놀란 한국의 과학기술>에서는 천문학, 의학, 정보통신기술, 지식정보 등 4개의 분야에 대하여 세분의 외국인과 한 분의 한국인을 통하여 그 수준을 가늠하고 있습니다. 역시 세분은 국내에서 활동하시는 분이고 한분은 캐나다에서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분야마다 몇 개의 작은 주제로 나뉘어 세계적인 성과를 기록하고 있으며, 사이에 네 분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는데, 읽다보면 과연 각장의 주제들을 인터뷰하신 분들이 정리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겉장에는 분명 네 분이 저자로 표기되어 있기는 합니다.


천문학 분야의 경우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세계가 놀랄만한 유물은 물론 최근 천문학분야에서 한국이 이룩한 성과를 소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천문학의 현재와 이 분야를 선도하는 나라의 수준과는 엄청나다는 느낌입니다. 다만 그 격차를 좁히려는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세계가 놀랄 한국의 천문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안중에도 없던 ‘한국에서 이런 것도 해냈다는 거지?’하는 정도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의학의 경우는 저의 전공분야이므로 어느 정도는 정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분명 응용분야라고 할 임상의학의 수준은 세계수준에 이른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초의학의 경우는 세계와의 격차는 분명합니다. 물론 여기서 소개하는 이호왕교수님의 한탄바이러스 발견이나 장기려박사님의 생체간절제술의 성공 역시 앞서의 천문학의 경우처럼 한국에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생각해보니 ‘세계가 놀란’이라는 책 제목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해당 분야들에서 한국의 수준이 세계 사람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부족함이 많아 보임을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생체간이식술의 경우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것들이 많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정밀의료처럼 이제 개념이 만들어지고 있어서 비교가 불가능한 영역에서 가능성만 가지고 ‘세계가 놀란’이라는 전제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쌓아올린 건강보험체계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는 점은 짚어볼만한 성과입니다.


정보통신기술 분야만큼은 분명 우리나라가 세계를 선도하는 분야라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 분야를 선도하신 전길남박사가 주도한 성과가 세계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정보통신기술만큼은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기술개발과 함께 일찍이 전국을 연결하는 정보통신망을 구축하는 투자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땅덩어리가 넓지 않아서 결단이 쉬웠을 수도 있습니다. 전국을 연결하는 정보통신망을 바탕으로 초연결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으니 세계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주제인 지식정보분야인데, 이 분야를 과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우선 해봅니다. 소셜 커뮤니케이션, 지식기반 경제 등의 주제어만 놓고 보더라도 이 분야는 사회과학의 한 영역으로는 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과학기술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한국인의 특성으로 보아 세계를 선도하는 분야가 될 수 있다는 해외 전문가의 견해가 듣기 싫지만은 않습니다.


정리해보면 이 책을 통하여 4가지 분야에서의 한국의 수준이 어디쯤인가를 가늠해보는 기회였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이 책의 기획의도를 분명하게 하는 글이 덧붙여졌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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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서 생명으로 - 인간과 자연, 생명 존재의 순환을 관찰한 생물학자의 기록
베른트 하인리히 글.그림, 김명남 옮김 / 궁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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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아프리카의 세렝게티에서는 누를 사냥한 사자들과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한 입 얻어먹을 궁리를 하는 하이에나와 흰등독수리 등을 보면서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떼의 대이동은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면서 다양한 지역의 포식자를 살찌우는 역설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태계는 그렇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명한 생물학자 베른트 하인리히교수의 <생명에서 생명으로>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의 범위가 생각보다는 훨씬 넓게 엮여있다는 것을 알게 한 책읽기였습니다. 특히 자연의 장의사라고 하는 청소동물들의 역할이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청소동물은 생명의 재료를 재분배하는 ‘생명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에나와 흰등독수리가 청소동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생태계의 먹이사슬과 생명의 재료를 재분배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광범위합니다. 일차로 탄소와 질소와 같은 무기물로부터 생명체가 활동하는 에너지의 원천을 만들어내는 것은 식물입니다. 하지만 그 식물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인 아미노산 등은 오랜 세월을 두고 만들어져 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식물이 만들어지고, 그 식물을 초식동물이 먹고, 육식동물은 그 초식동물을 먹는 먹이 사슬의 정점에 있는 듯하지만, 그 육식동물이 죽으면 청소동물이 해체하고, 그 나머지는 굼벵이나 곰팡이 등이 미세하게 분해하여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자연으로 돌아간 원초적인 구성요소들은 다시 식물을 만들어내는 순환에 투입되는 것입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입니다. ‘외계의 접촉이 없는 고립계에서 에너지의 총합은 일정하다’라는 물리학의 기본이 되는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지구라는 고립계에서 생명의 원천이 되는 기본물질(탄소, 수소, 산소 등을 비롯하여 인, 황, 칼슘, 칼륨 등과 같은 화학물질이 만들어낸 아미노산)의 총량은 고정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구상에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가면서 멸종되어가는 생물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라’라고 했다는 성경의 창세기의 한 구절이 과학적으로는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생명에서 왔고 또 다른 생명의 원천이 된다는 의미를 충분히 나타낸다고 보았습니다. 하인리히교수는 미국의 메인주에 가지고 있는 삼림 속에 지은 캠프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의 초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조류에서 곰팡이에 이르기까지 생태계의 다양한 생물종을 관찰해왔습니다. 그러한 연구 활동을 통하여 얻은 생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생명체가 죽었을 때 일어나는 일을 정리한 것이 바로 <생명에서 생명으로>입니다. 이 책에는 동물과 식물 등 육상생물은 물론 강과 바다를 아우르는 수생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태계에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간혹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면 유럽인들이 건너오기 전에 이미 버펄로를 씨를 말렸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함께 사는 법을 깨달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유럽인들이 저지른 버펄로남획의 책임을 슬그머니 미루는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현대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지구의 생태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조림을 한다지만, 사실은 나무들도 오랜 세월을 통하여 거친 자연에서 살아남은 것들이었는데, 인간이 심는 나무들이 더 자연적인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정리하는 책읽기였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앞선 시대에 살던 생명체가 가지던 요소들을 이어받아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을 맞으면 다시 뒤에 오는 생명체에게 모든 것을 전하는 것인데, 인간만이 숭고한 그 일을 포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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