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 통계와 역사에 문학과 과학이 버무려진 생의 마지막 풍경
하이더 와라이치 지음, 홍지수 옮김 / 부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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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을 명쾌하게 정의하는 일도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은 죽음에 관하여 시시콜콜한 데까지 캐어본 책입니다. 이의 저자 하이더 와라이치 (Haider Warraich)는 의사이자 임상연구가이며 작가이기도 합니다. 2009년 파키스탄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201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의대 부속 베스 이스라엘 디커니스 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마치고, 지금은 듀크대학병원에서 심장학 전임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포의 죽음으로부터 인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자신의 경험을 포함하여 다양한 연구성과들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의학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죽음의 정의를 모호하게 만들었고, 저자의 말대로 죽음보다 더 끔찍한 목숨이 등장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입원한 환자가 의료진에게 살려 달라 애원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는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환자를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의학이 인간ㅇ로 하여금 생존할 능력을 강화해주는 동시에 세상을 떠날 권리를 침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의 불꽃을 중단시킬 수 있는 권리가 과연 의사에게 있을까하는 의문이 싹텄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정의가 심장사에서 뇌사로 옮겨가면서 인간답게 사유하는 기능이 무력화된 사람에 대한 연명치료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뇌기능이 사라져 이미 살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환자를 다양한 연명치료로 그저 심장만 뛰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라고 보아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에서 적극적 안락사에로 발전하는 경향도 생기고 있습니다.

죽음의 정의가 심장사에서 뇌사로 이행하게 된 배경에는 장기이식도 한 몫을 해왔습니다. 심장이 멈춘 다음에 장기를 적출하는 경우에는 이식된 장기가 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뇌사판정을 받게 되면 심장박동을 유지하는 장치를 끄고 죽음을 유도하고 이식할 수 있는 장기를 적출하게 된 것입니다.

저 역시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하여 새롭게 배우는 개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옮긴이의 참신한 번역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맛보기 죽음(pre-death)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만성질환이 증가하면서 대부분의 죽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질질 끌면서 서서히 소진해가는 과정을 말한다고 합니다. 만성 질환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기 전에 무력한 상태로 지내는 시간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심근경색 혹은 뇌졸중 등과 같이 죽음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경우와는 분명 차별되는 면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필자는 아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태어나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새롭게 가꾸고 나면 자리를 내어주고 떠난다(255쪽)’라는 부분이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저자가 한 무신론자 환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자는 믿을 수 없다고 인식하는 나라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는 ‘무신론자를 강간범이과 마찬가지로 미덥지 않고 범죄 의도를 지닌 사람으로 여기지만 종교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254쪽)’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 신앙인은 ‘무신론자’라는 용어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가면 뒤에 몸을 숨긴 채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는 더 양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말입니다.

이 책의 뒷부분은 안락사에 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하여도 설명합니다. 아무래도 이 책을 책장에 모셔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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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걸어갈 땅이 없었다
김동하 지음 / 필름(Feelm)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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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연식이 좀 되다보니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폭이 그리 넓지 못한 것 같습니다. 즉 젊은이들의 행동양식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요즘 젊은 것들이란, 쯧쯧쯧’이라고 기록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동서양이 꼭 같고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를 게 없단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는 걸어갈 땅이 없었다>는 스물다섯 난 우리나라의 젊은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벨라루스와의 국경을 넘어 오르샤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뒤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의 마지막 대서양가의 피스테라까지, 220일에 걸쳐 4,017km를 걸어간 기록을 담은 여행에세이입니다. 10살이 되었을 때 누군가의 책을 읽고 자신의 책을 써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왜 이런 쉽지 않은 여정에 도전하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젊음은 때로 무모한 듯한 도전도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무모한 도전과 무계획한 도전은 분명 의미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작가가 거쳐 간 나라는 러시아-벨라루스-폴란드-체코-독일-프랑스-스페인 등 일곱 나라입니다. 벨라루스보다 더 북쪽에 있는 발트삼국을 경유하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경계에 있어 강대국의 틈새에서 역사적으로 고초를 겪은 나라를 보았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폴란드에서 굳이 타트라산맥을 넘어 체코로 왔다가 다시 독일로 넘어간 것도 조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구요.

220일에 걸쳐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생각들을 기록한 것을 책으로 정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들이 전체적으로는 이동경로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날자나 장소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여행에 관한 기록은 남긴 작가들 가운데 알맹이가 없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 느낄 수 있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작가가 이 여행에 나서기 전에도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일한 적도 있고 가까운 나라를 여행한 적도 있어서 그런 경험에 가족들과의 끈끈한 유대를 느낄 수 있는 대목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간혹은 두서가 없어 보인다는 생각도 들고 반복되는 이야기도 있어서 글을 읽는 흐름이 흔들린 적도 있습니다. 어떻든 뜻을 세우고 길을 걸으면서 부딪히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꺾지 않고 목적지까지 걸어간 의지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랜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왜 걷느냐’고 물었을 때, 처음에는 평화(peace)를 위하여 걷는다고 대답했지만, 결국에는 왜 걷는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험난한 일을 계획하면서 왜 걷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없이 떠났다는 것 같아서 앞서 말씀드린 무계획한 요즘 젊은이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조금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이도 여행이 마무리될 무렵에는 애매했던 그 이유가 점점 분명해졌던 것 같습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하여 스스로 갇혀있던 ‘편견’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한 행보였다고 말입니다. 220일이라는 긴 시간이었다고는 하지만, 매일을 걷다보면 하는 일이나 생각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할 수도 있는데, 무려 529쪽이나 되는 글을 써낸 것을 보면 작가의 필력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다만 초지일관하고 수미상관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서문이 짧았던 만큼, 피스테라에서 여정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이 책을 내기까지의 뒷 이야기를 적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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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우연한 시선 - 시인 최영미의 서양미술 감상
최영미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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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전반에 걸쳐 앎이 부족한 편이라서 기회가 될 때마다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특히 미술은 책을 읽거나 미술관에 갈 기회가 있는데도, 여전히 답답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화가의 우연한 시선>은 그런 이유로 골라들었던 것 같습니다. <화가의 우연한 시선>은 최영미 시인의 미술에 관한 에세이집입니다. 학부에서 서양사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셨으니 ‘미술을 강의한다’는 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저자의 말씀대로 이집트의 초상 조각으로부터 현대 미국회화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사에 큰 흐름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교과서적인 접근이 아니라 시인이 이들 작품을 보았을 때 받았던 감동을 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출판사에서 내놓은 도서정보에서는 시인의 산문집 <시대의 우울>은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수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만해도 여성들이 공공의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만, 시인이 젊었을 때만해도 이미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은 평범한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여성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에 대하여 타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지나친 피해의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거나 이 책에 담긴 그림과 조각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시인이 월간 <노블레스>에 연재했던 것들을 묶었습니다.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베르메르, 들라크로아, 모네, 드가, 세잔, 르네 마그리트,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 등 익숙한 화가들의 익숙한 작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고, 과문한 탓에 아직은 모르는 화가들의 작품들도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시인의 설명이 운율을 따라 흐르는 듯 시적이라는 느낌은 어쩌면 저만의 선입견 때문일까 싶어서 소개합니다. 기원전 200년 전후에 만들어진 사모트라케 섬의 니케, 즉 <승리의 여신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가슴과 다리를 막아서는 강력한 바람에 의해 그녀의 몸은 아직 공중에 떠 있지요. 바람은 앞으로 전진하려는 그녀를 방해하며 동시에 그녀의 옷에 수백 개의 풍부한 주름을 새겨 놓음으로써 그녀를 드러내는 힘입니다.(28쪽)’

하지만 그럴까 싶은 대목이 없지 않습니다. 같은 작품에 대하여 이어지는 설명입니다. ‘세계를 향해 날개를 펼친 상상력의 원천은 세계시민으로서의 넘치는 자신감이었지요. 도시국가의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인더스강에서 나일강까지 세계가 더 넓어졌지요.(29쪽)’ 아마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정벌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이전까지 그리스의 관심사는 소아시아까지였고,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정벌은 그의 죽음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니 그리스 예술의 시야가 넓어지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분명치 않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시인은 서양미술사를 통하여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풍경화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에게 치인 탓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풍경화에 관한 이야기만을 담은 것은 아닙니다. 인물, 정물, 조각 작품 등까지 다양한 그림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영역 이외에도 다양한 영역을 다룸으로 해서 책 읽는 이들의 다양성까지도 챙긴 셈입니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들은 어쩌면 시인이 직접 보고서 느낀 점을 적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도 필자처럼 스치듯 지나면서 카메라에 담아오는 방법이 아니라 무언가 분명한 느낌이 끓어오를 때까지 오랫동안 그림을 지켜본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노르망디 지방의 르아브로로 가는 길에 옹플뢰르의 부댕 미술관에서 <흰 구름, 파란 하늘>을 보기 전만 해도 저는 부댕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지요.(130쪽)’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한 점을 보더라도 제대로 보는 방식으로 그림구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처럼 화가의 우연한 시선에 공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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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소통법 - 신화의 나라, 이집트에서 터득한 대화의 기술 51가지
이정숙 지음, 조창연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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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이 주목을 받은 적 있습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으로 칭송받던 멀티태스킹이 오히려 집중도가 떨어지면서 속도도 늦는 등 실제로는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질적인 요소를 접합해서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퓨전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멀티태스킹은 이질적인 요소가 녹아드는 퓨전의 개념보다는 서로 충돌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멀티태스킹과 퓨전의 개념을 따로 정리해본 이유는 이집트 여행과 대화의 기술을 접목하였다는 <여행 소통법>을 읽은 느낌이 퓨전이라기보다는 멀티태스킹의 느낌이 나더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책은 ‘국내 최고의 대화전문가’라는 분이 아들 내외와 함께 이집트를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입니다. 일단 읽는 내내 불편했다는 점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표지에 적은 ‘옆 사람과의 성공적인 관계는 기본 소통에서 시작된다’는 문구에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화의 나라, 이집트에서 터득한 대화의 기술 51가지’라는 부제는 잘 못된 것입니다. 그저 대화전문가라는 저자가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겪은 일을 인용하여 대화의 기술을 설명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우선 대화체의 문장이 거슬립니다. 그것도 마치 아랫사람에게 가르치는 듯한 어투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흔히 사용하는 설명체 보다는 친근한 느낌을 주려는 시도였는지 모르겠지만, 불특정 다수가 읽는 책의 경우 저자보다 나이가 많은 독자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이집트 여행이나 소통분야에서 저자보다 더 전문가가 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대화의 기술 부문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저자가 이집트에 관하여 인용한 내용들이 사실과는 다른 듯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저자의 전문분야라고 할 대화의 기술에 관한 내용에 대한 신뢰마저도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하루에 다섯 번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하여 남성이 경전을 읊조리는 소리를 ‘부카’라고 한다는데, 이슬람 국가에서 ‘무에진’이라고 하는 남성이 사원의 첨탑 미나렛에 올라 기도시간을 알리는 성구를 읊조리는 것을 아잔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보았는데, ‘부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유럽이 이집트 점령하자 이집트 사람들이 유럽으로 흘러들어와 집시가 되었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내용으로 유럽의 집시는 인도 북부의 펀잡지방 출신이라는 설이 언어학적 근거가 있다는 주장을 보면 집시가 이집트에서 온 것이라고 단정하는 저자의 입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파피루스에 관한 내용도 지나치다 싶습니다. 파피루스에 관한 기록 역시 이집트에서 개발된 파피루스가 문서작성에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파피루스가 8-9세기 유럽사회에서 중요한 기록문서였는지는 생각해볼 일입니다. 이집트가 파피루스는 제작비용이 싸기 때문에 대중적인 기록도구였는지 모르나 양피지에 비하여 내구성이 약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가장 주요한 기록문서로 사용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학문에 대한 비하도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인문학이 아예 없어 서양으로부터 일본을 통해 전해진 것을 배웠다는 시각이나 수사학이 빠져 제대로 된 화법을 익힐 수 없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과거 동아시아 학문의 중심이라고 하는 중국의 학자들도 조선의 학자들의 학문수준이 높아 서로 학문을 논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고 하고, 거슬러 오르면 서희의 담판과 같이 우리나라 고유의 수사학 수준도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기술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전개하려다 보니 이집트 여행이 뒤죽박죽 섞이는 것도 책읽는 흐름을 흩어놓았고, 저자가 흥정의 달인이라는 자랑과 영국 사람들의 배품을 배웠다는 것이 정리되지 않는 것도 헷갈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차라리 이집트 여행과 대화의 기술을 별도로 정리하는 편이 훨씬 나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남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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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주명철 지음 / 소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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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프랑스 여행에 대비한 공부 차원에서 읽은 책입니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프랑스는 물론 서구 여러 나라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고 알고 있지만 대혁명을 전후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은 오랫동안 프랑스 혁명을 연구해온 주명철교수가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대중 교양 역사서입니다. 저자는 ‘우리나라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데 왠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면서도, 프랑스 혁명이 서구사회는 물론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프랑스 혁명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건이지만, 우리에게 사회에 대한 이해와 더 나아가 인간성에 대한 성찰의 기회까지 제공’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의외로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무렵까지도 프랑스는 철저한 신분제에 기반한 절대왕정체제가 이어져왔습니다. 중세부터 프랑스 사람들은 왕족을 제외하고는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 등 3가지 신분에 속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성직자, 기사, 그리고 나머지 농부 어부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참 관리들도 기사와 같은 부류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관과 문관이 같은 부류로 쳤던 모양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하늘이 내린 왕을 모시는 것이야 말로 타고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무던하게 참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계몽주의 사상이 꽃을 피우면서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인식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루이 14세 시절부터 이러저러한 전쟁을 벌이는 통에 나라 빚이 늘어만 갔고, 이렇게 빈 돈은 이자에 이자를 쳐서 눈덩이처럼 부풀어만 갔습니다.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빚을 해결해볼 요량으로 175년만의 전국 신분회의(우리가 배운 삼부회의는 일본식 표현이라고 합니다)를 개최토록 하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 그리고 평민대표인 제3신분의 모여진 의견이 각각 1표씩으로 계산하던 것을 신분회의 참석자 각각의 표로 주권을 행사하자는 요구가 나왔던 것입니다. 즉 전국신분회의가 의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루이 16세는 빚을 해결하기 위하여 모은 신분회의를 결국은 용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탄압하려 들었다가 실패하면서 사태가 꼬여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왕이 상황을 오판하여 대중의 뜻이 반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적극적인 저항에 나섰습니다.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고 시내에 병력을 배치하자 시민들은 무장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상황이 꼬여가면서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전면에 나서면서 상황은 악화되었고 결국 총과 대포로 무장을 하고 대치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총격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혁명에 성공한 다음에도 사태는 쉬이 수습되지 않고 꼬여만 갔고, 혁명세력끼리 세력이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에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성공의 과실을 다투기 시작한 것입니다.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혁명 후의 처리과정을 보면 아군이 아니면 처형하는 식으로 악순환이 이루어지다보니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희생된 인명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던가 봅니다.

1789년에 시작된 혁명은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 후 들어선 공화정부를 무너뜨릴 때까지 10여년의 기간을 이릅니다. 결국 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렸지만 잠시잠깐의 공화정을 거쳐서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읽다보니 우리나라의 제1공화국의 독재정치를 무너뜨린 4.19혁명의 마무리 과정이나 혁명세력들이 5.16 쿠데타에 의하여 무너지는 과정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역사는 반복되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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