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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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근무하시는 분이 선물해주신 책입니다. 제목에서 보시는 것처럼 제가 요즘 힘든 상황이라고 여기신 듯, 힘을 내라는 의미로 주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위로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야생의 위로>는 박물학자. 설계자이자 창작자, 그리고 삽화가이기도 한 저자가 가깝게는 집안의 정원, 혹은 동네 어귀에 있는 숲, 가끔은 당일치기 여행을 통하여 자연을 관찰한 결과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정리한 결과물입니다. 저자가 사는 동네가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일 년 동안 우리 집 주변을 거닐며 관찰한 자연물에 관한 것’이라는 설명에 곁들인 사진을 영국의 ‘노샘프턴셔 페르민 숲의 오솔길’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런던과 버밍엄을 연결하는 M1국도의 딱 중간에 있는 노샘프턴셔의 북동쪽 끝에 페르민 우즈 컨트리 공원 부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야생의 위로>을 세 가지 관점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첫 번째는 저자가 25년 동안 앓고 있는 우울증의 변화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있어서, 필자가 맡게 된 우울증 치료에 대한 평가에 참고할 점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관련해서 멀리 영국까지 여행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노샘프턴셔의 야생에 관하여 공부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국의 남부지역이긴 합니다만, 저자가 세심하게 그리고 설명해놓은 꽃, 나무, 새, 그리고 작은 동물들에 관하여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관점과 관련하여, 12개월에 걸친 집 주변 산책의 결과를 정리하는데 있어 저자는 왜 10월부터 시작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아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봄은 3~5월, 여름은 6~8월, 가을은 9~11월, 겨울은 12~2월로 나누고 있는데, 영국은 10월부터 가을이 시작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0월, 가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3월의 겨울 동안 꽃과 식물이 주는 생동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는 저자의 고백을 읽고서 25년이나 앓아온 우울증에 대한 대비책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우울증의 치료에 야생을 산책하는 일이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분명하게 와 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자가 훌륭한 삽화가라고 소개해드렸습니다만,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그린 그림 등이 풍부하게 곁들여져 있는데, 영국과 우리나라의 식생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우리나라에도 있기하지만 드물어서 쉽게 볼 수 있지 못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즉 배운 것을 비교해서 익힐 기회가 흔치 않다면 쉽게 잊을 수도 있겠다는 점입니다.

저자의 우울증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면서 ‘도저히 못 넘을 만큼 높이 솟은 봉우리가 온몸에서 생명력을 쭉 빼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어쩌면 계절이 순환하는 일은 자연의 섭리일터인데, 그런 변화까지도 몸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일과 마찬가지로 상병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병증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면 투병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새에 관한 관찰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새들 가운데는 울음소리는 들리나 모습을 볼 수 없는 새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새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망원경 같은 장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새들은 일단 모습 보다 울음소리를 먼저 듣는 경우가 많아서, 일단 새 울음소리를 녹음한 자료를 책에 첨부해주시면 많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옮긴이는 저자의 자연묘사와 심리 묘사가 매끄럽게 연결되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우울증에 관한 작업을 하면서 많이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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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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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독서동아리에서 세 번째로 읽은 책입니다. 첫해이니만큼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문학 분야의 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그 남자네 집>을 고른 분은 선생의 작품을 여럿 읽어왔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이해가 깊었습니다. 선생의 작품을 읽다보면 언젠가 읽은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드는 것은 해방 이후, 6.25동란을 지나는 신산한 시절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보다도 한 세대는 앞서 사신 분의 글이라서 지금은 잊혀져가는 우리말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참 좋습니다. 외래어를 섞어서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써야 먹물 들어 보인다는 생각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정겹고 예쁜 우리말을 맞게 사용하는 사람이 더 유식하다고 인정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우리말을 익히는 길은 옛 분들이 남긴 글을 많이 읽어, 생각에 스며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저 역시 말을 하고, 글을 쓸 때도 외래어보다는 우리말을 찾는 노력을 강박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읽기 동아리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느낀 점입니다만, 같은 책을 읽는 시선이 많이 다르구나 하는 것입니다. 제가 놓쳤던 부분을 짚어주는 분도 계시고, 미처 몰랐던 점에 대하여 보충설명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전후세대인 만큼 전쟁의 참상은 그저 기록을 통하여 알고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철이 든 뒤의 전후 사정은 조금 알 듯도 합니다. 그러니까 북한군 치하에 있던 서울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수복 후 재건이 진행되던 때의 사회적 분위기는 조금 알 듯도 합니다.


<그 남자네 집>은 작가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젊은 시절과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의 신혼시절까지 첫사랑과의 인연을 이야기합니다. 요즈음에는 양 다리는 기본이고 여러 다리를 걸치는 것조차 거리낌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들 합니다만, 정비석 선생님의 <자유부인>이 장안의 화제가 되어 지탄을 받던 시절에 새댁시절에 첫사랑을 만나고 다녔다고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에 목을 맨다는 속설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기억의 심연에 잠들어있었다는 선생의 고백이 놀랍기도 합니다.


궁금한 것은 첫사랑이 아닌 분과 결혼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선생은 ‘그때 난 새대가리였구나’라고 말합니다.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101쪽)’는 것입니다. 체면을 따지면 첫사랑이 나아보이는 면이 있지만, 씀씀이는 부군이 나아보였더라는 것인데, 막상 결혼하고 속내를 알고 나서 후회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것이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부군께서 처가 쪽을 본가만큼 챙겨주었다고 하니 나름 속이 깊은 분이었다는 생각에 그 선택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 싶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오래 살아봐야 느끼게 되는 점이라서 결론을 말하면 그 남자보다 내 남자가 낫더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인가요?


선생이 책머리에 적은 ‘그때 문학은 내 마음의 연꽃이었다. 진흙탕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이었고, 범속하고 따분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었다.(5쪽)’라는 대목을 짚은 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신혼초 시집살이를 할 무렵이던 50년대 초반 사시던 동네에 ‘현대문학사’가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동네 구멍가게 같던 집은 물론 골목까지도 찬란해진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전후 삭막하던 시절임에도 문학이 살아있음을 천명한 셈이니, 현대문학사에 대한 지극한 헌사처럼 보이는 이 대목이 너무나도 당연해보인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먹고사는 것이 어렵던 시절에도 문학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선조들의 뒷심 덕분에 오늘날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부흥을 일구어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생기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오랫동안 담금질을 하고 산고를 겪어야 무언가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요즈음 세상은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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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와 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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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기욤 뮈소의 <사랑하기 때문에; https://blog.naver.com/neuro412/221927219953>에서도 10대 소년들이 살인을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성이 여물지 못하고 혈기에 넘치는 나이라고는 하지만 상대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을 다룬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일러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욤 뮈소는 <사랑하기 때문에> 보다 더 나간 젊은 시절의 일탈을 <아가씨와 밤>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젊은이들의 일탈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젊은이들을 바로 잡아주어야 할 어른들이 오히려 일탈을 부축이고 극한 상황으로 이끌어가는 바람에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끔찍한 범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사랑이라고 믿는데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한때 짝짓기 예능이 범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호감을 가지는 짝을 이어주었는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끝나면 누구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가를 공개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묘하게도 서로 호감이 일치하는 쌍이 많이 나오는 경우도 있는 반면, 한 사람에게 관심이 쏠리는 경우도 있고, 호감의 방향이 꼬리를 물고 비켜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합니다.


<아가씨와 밤>은 남프랑스 코트다쥐르의 앙티브라는 지역에 있는 생텍쥐페리 고등학교의 학생들의 사랑이야기입니다. 물론 사랑이라 하면 남녀 사이의 사랑은 물론 동성 간의 우정과 사랑을 모두 포함합니다. 물론 동급생들 사이의 사랑도 있고, 학생과 선생님 사이의 불장난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 뒤틀린 관계가 끔찍한 비극을 불러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던 1992년 겨울과 묻혔던 사건이 드러나면서 2차 사건이 일어나는 2017년 봄의 시점에서,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엮여있습니다. 생텍쥐페리 고등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학생 빙카 로크웰과 철학을 가르치는 알렉시 선생님이 실종되는 사건이 1992년 겨울 발생합니다. 앙티브에서 사라진 뒤 파리에 있는 호텔에 묵은 것을 끝으로 두 사람의 행적이 묘연해진 것입니다.


누가, 왜, 어떻게 사건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성격 상 많은 사람들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고, 그 이유도 다양하다는 것 정도는 말씀드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즐겨도 그만입니다만,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엮여있는지를 추측해가면서 읽는 재미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꼭 기욤 뮈소의 자전적 소설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작가가 어린 시절 살인사건을 저질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작가는 허구의 사건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미국에서 영어 공부하는 시간에 ‘니스에 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시간이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해변에서 해맞이를 하겠다고 답했는데, 영어선생님이 ‘정말?’ 그랬던 이유를 이 책을 읽고서야 이해했습니다. 1992년 12월 19일 니스에는 8cm의 눈이 내렸다는 것입니다. 영어공부를 하던 때가 12월이었는데, 한겨울에 해변에서 해맞이를 하겠다고 했으니 선생님이 그렇게 물을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들렌 효과 덕분에 학창시절의 추억이 꼬리를 물고 기억의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229쪽)’는 대목을 읽으면서 작가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참 멋있게 인용했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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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때문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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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큰 아이 덕에 읽게 된 기욤 뮈소의 소설입니다. 이야기는 아이의 실종이 부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녀의 실수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옳은지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에 따라 여러 시점과 여러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섞여들기 때문에 읽는데 집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도시의 숨겨진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아하고 기품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사람들을 위협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범법자, 거리에 숨어사는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습니다. 뉴욕에는 꼭 한번 가보았습니다만, 생각한 것보다는 치안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해서 한밤에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올라 뉴욕의 야경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딸아이의 실종으로 부부는 위기를 맞습니다. 정신과의사인 남편, 마크는 딸아이를 찾는 일에 몰두하느라 본업을 버렸다가 그마저 여의치 않자 노숙자로 전락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내, 니콜은 한동안 악기를 놓았다가 재기에 성공한 것 같습니다. 마크는 9.11사태를 겪은 희생자 가족, 혹은 참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심리전문가팀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막상 딸아이의 실종이라는 사고에서는 전문가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점에 관하여 작가는 “참담한 비극을 겪으면 누구나 깊은 후유증을 앓게 된다.(23쪽)”라고 말합니다.  비극의 현장의 끔찍한 상황에 대한 기억이 스스로를 옥죄기도 하고,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왜 네가 살아남았는가?’라고 말입니다. 특히 자녀의 실종 혹은 죽음을 맞는 경우에는 이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크와 동업을 하는 커너는 시카고의 빈민가 출신입니다. 두 사람의 성장배경에도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빈민가에서도 범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올곧게 성장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이나 용케도 빈민가를 탈출하여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은 뒷부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크와 커너의 성공적인 삶을 완성하기 위하여 작가는 에비라는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역시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는 인물인데, 의지만으로 쉽지 않을 일을 삼자의 도움을 얻는 구조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등장인물 앨리스를 통하여 마크와 커너와는 다른 인생을 보여줍니다. 억만장자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제멋대로 살다가 사고를 치고, 그 사고로 인하여 삶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입니다. 마크와 커너, 에비와 엘리스의 삶을 긴밀하게 엮어 낼 수 있었던 작가의 역량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네 사람 모두 끔찍한 사건을 벌이거나 벌일 예정이었지만, 이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기제로는 마크와 커너가 개발하여 임상에서 적용하고 있는 최면요법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역시 신경과의사인 장 마르탱 샤르코로부터 최면술을 배웠다고 하니 최면술을 의학 분야에서 적용하려는 노력은 역사가 꽤 되는 것 같습니다. 최면의 효과에 관하여 제한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과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커너가 개발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마크와 에비 그리고 앨리스가 함께 하는 상황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이라서 어쩌면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그런 치료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나 소설 등에서는 최면이라는 주제가 상황을 풀어내기에 적절한 방법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여전히 허구적인 요소가 많으니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끔찍하거나 참담한 사건도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그 또한 극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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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 소돔과 고모라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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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뒤랭부인의 살롱은 발베크에서도 작은 열차를 타고 1시간을 가는 라 라스플리에르에 있습니다. 부르주아답게 열차를 타고 살롱에 오는 분들을 위하여 역까지 마차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 살롱에 초대받지 못한 지역의 유력인사는 ‘저녁 식사 하나 때문에 이런 밤중에 한 시간이나 기차를 타게 하는 것을 뻔뻔한 일’이라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아마도 살롱에 초대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평이 섞여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마르셀의 경우 만찬에 초대받은 것도 기쁘지만, 작은 열차로 가는 여행이 더해져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행을 구현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마르셀이 알베르틴과 함께 발베크 해변으로 갈 때 탔던 작은 열차의 모습에 대한 프루스트의 서술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작은 열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차가 달리는 도중에 내뿜은 연기가 한가롭게 서서히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고, 그것은 이제 거의 움직이지 않는 구름이라는 유일한 수단으로 환원되어 크리크토 절벽의 녹색비탈을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11쪽)” 이제는 증기기관차를 구경할 수 없지만, 옛 기억을 되살려보면 기차의 화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작은 열차가 도착하고 출발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교적인 모습과 비유한 458쪽의 한 대목도 재미있습니다. 시골 역을 운행하는 작은 열차라서인지 발차에 여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점에 대하여 프루스트는 ‘열차 자체도 (…) 뭔가 인간적인 상냥함을 띠었다. 인내심 많고 온순한 성격의 기차는 뒤처진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오래 기다려 줬고, 출발한 후에도 사람들이 손짓하면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멈춰 섰다.(458쪽)’ 이어서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은 희화화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기차와 비슷했지만, 인간은 전속력으로 기차를 따라잡고, 기차는 지혜로운 느림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사실 이미 발차한 기차를 세우려가 아등바등 뛰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런 사람을 태우기 위하여 속도를 줄이는 기차의 모습을 대비시킨 것입니다.

게르망트 대공부인의 살롱과 베르뒤랭부인의 살롱이 비교되는 몇 가지가 있는데, 대공부인의 살롱의 참석자는 드레퓌스에 반대하는 입장이 많은데 비하여 베르뒤랭부인의 살롱에는 드레퓌스 지지자가 많은 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르뒤랭부인은 미술계에서는 인상파를 지지하고, 드뷔시와 뱅퇴유의 음악을 소개하는 입장입니다. 즉 유행의 변화에 민감하고, 혈통주의라는 낡은 가치대신 새로운 경향의 예술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를 부제로 삼고 있는 까닭인지 여기에서는 샤를뤼스와 쥐피엥 그리고 모렐, 알베르틴과 앙드레 등으로 대비되는 남녀 동성애적 접촉에 촉각을 세우는 것도 모자라 매춘업소까지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프랑스 사회의 타락상을 드러내보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만, 김희영 교수님의 민음사판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풍부한 각주을 통하여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것들, 예를 들면 작가가 인용한 책이나 인물 등에 대하여 설명을 붙이고 있어서 서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전체의 번역본이 한 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나오고 있어 앞서 읽은 내용들이 기억의 심연으로 사라지는 느낌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전체 이야기가 완간되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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