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1월에 다녀온 펀트래블의 일본근대문학기행에서 로쟈선생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시마자키 도손의 첫 번째 소설 <파계>를 읽었습니다. 시마자키 도손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에밀 졸라가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자연주의문학은 “자연의 사실을 관찰하고 ‘진실’을 묘사하기 위해 모든 미화를 거부하라”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즉, 이상이나 관념을 버리고 철저하게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려했고, 자연과 자연의 법칙, 유전과 사회 환경의 인과 법칙의 영향 아래 있는 인간을 뻔뻔하게 묘사하고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파계>는 메이지유신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되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신평민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백정[워낙이는 부락민(部落民)이나 우리말로 옮기면서 우리나라에도 존재했던 백정으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은 에도 시대 때부터 최하층 대접을 받으며 특별지역에 거주하던 천민 계층을 말합니다.
에도시대의 신분제도는 병농공상(兵農工商)의 4단계로 구분되어 세습되었는데, 이들보다 낮은 불가촉천민으로 가축의 도살, 형장의 사형 집행인, 피혁 가공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에타(穢多, 예다)’와 사형 집행 보조인 및 그 관할하의 걸인, 육류 납품·판매업, 죄인 및 시체 매장, 도로 청소, 사찰의 종자, 광대 등 ‘히닌(非人, 비인)’이 있어 ‘히사베츠부라쿠(被差別部落, 피차별부락)’라고 하는 제한된 장소에 거주해야 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세수확대를 위해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부락쿠민을 일반국민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부라쿠민에 대한 일본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 때문에 평민과 동등한 지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해방령 반대 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이들에게 신평민(新平民)이란 호칭을 붙여 배척하였다고 합니다.
소설 <파계>에서는 신평민에 대한 일본사회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세가와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부락을 떠나 목장에서 목부로 일하면서 신분을 속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세가와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공부에 매진하여 사범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끝에 보통학교 교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세가와는 ‘절대 신분을 밝히지 마라’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각별하게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하숙집에 부라쿠민이 들었다가 쫓겨나는 일이 있자 곧바로 하숙을 옮긴다거나 하는 주변에서 보면 오해를 살만한 일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신평민으로 지목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사회활동을 하는 이노코 렌타로의 사상에 동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에게만은 자신도 부락쿠민이라는 사실을 고백할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목부로 일하던 아버지가 씨소에 받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러 고향에 가면서 일이 꼬이게 됩니다.
렌타로가 지지하는 이치무라 변호사와 맞붙게 된 다카야기 리사부로가 고향이 같은 부라쿠민의 딸과 결혼을 해서 처가의 지원을 받을 속셈이었는데, 그 부인이 우시마쓰의 신분을 남편에게 알리고 다카야기는 이를 우시마쓰가 근무하는 학교의 가쓰노 분페이라는 신참선생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장학관의 조카라는 이유로 교장이 각별하게 챙기면서 우시마쓰를 제거하려 획책하는 교장과 분페이는 은밀하게 이 사실을 확대하면서 우시마쓰 제거 작업을 시작합니다.
고향에서 만난 렌타로에게 자신 역시 부락쿠민이라는 신분을 밝히려다가 아버지의 계명이 마음에 걸려 결행하지 못했던 우시마쓰는 다카야기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가 렌타로를 습격하여 살해하는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지금까지 신분을 속여 왔음을 주위사람들은 물론 자신이 지도하던 학생들에게도 알리면서 사죄하고 학교를 사직하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우시마쓰의 신분을 알게되면서 흥분을 하는 쪽이 많은데 반하여 학생들은 평소 존경하던 우시마쓰가 부라쿠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메이지 정부가 주도한 신분제도 폐지 문제는 결국은 세대교체가 되어서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우시마쓰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스스로 알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가, 세상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 뒤에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했다는 것이니, 이야기의 제목처럼 아버지의 계명을 파기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