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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초상
찰스 디킨스 지음, 김희정 옮김 / B612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탈리아의 초상>은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가 1844년 가족과 함께 1년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여행한 기록을 담은 책입니다. 역자의 말대로 작가는 이 책에서 정확한 여행일정이라 각 지역의 음식, 숙소 등의 정보를 다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건물이나 유적, 예술 작품 등에 대하여도 설명을 곁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수년간 머릿속으로 그렸던 장소들에 대한 어렴풋한 감상을 엮은 것으로 ‘물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한 기억’이라고 비유했습니다. 흔히 여행에 관한 기록을 <OOO여행기>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남았습니다.
작가는 제노바에서 1년 동안 머물 예정으로 영국을 떠나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에 갔다고 하는데, 마차를 타고 가는 여정은 그의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서민적이었습니다. 마차 역시 전용마차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여정에 따라 마차와 마부를 수배하는 방식을 택했던가 봅니다. 프랑스 구간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차를 닦는 법이 없는 나라에서 마차가 창피하게 여겨질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제 마차에 묻는 진흙이 부끄러울 만큼 상쾌한 날이었다.(25쪽)”
파리에서 리옹, 아비뇽을 거쳐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제노바로 가는 여정이었던가 봅니다. 파리에서 르아브로로 갔다가 몽셀미셀, 루앙, 리모주, 툴루즈, 아를, 아비뇽, 엑상프로방스, 칸느, 니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나갔던 저의 여정과는 별로 겹치는 구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툴르즈를 지나는 가론강의 운하에서 본풍경은 디킨스가 론강에서 본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시속 20마일로 움직이는 증기선을 타고 화살처럼 빠르게 흐르는 론강을 따라 내려갔다. 배는 무척 지저분한데다 시장에 내다팔 물건들로 가득했고 동승한 사람은 서너 명 밖에 되지 않았다.(32쪽)”
아비뇽에서는 교황청에 딸린 감옥을 직접 돌아보는 경험도 했다. 교황청과 관련된 일화는 사실일까 싶기까지 합니다. 1441년 교황특사인 피렐 드 뤼드에 관한 내용입니다. 조카가 아비뇽의 좋은 집안의 규수들을 욕보이다가 가족들에게 팔다리를 못 쓰게 될 정도로 치도곤을 당했다는데 교황특사는 앙심을 품고 때기 무르익기를 수 년 동안 기다린 끝에 조카를 다치게 한 가족들과 화해를 한다면서 교황청 부속건물에서 연회를 베풀고 폭발시키는 바람에 오백여명이 모조리 타죽고 말았다고 합니다.(47쪽)
제노바에서 생활하면서 작가는 제노바가 하루하루 ‘마음에 스며드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언제든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노바의 경관이 뛰어나다는 점은 물론 식당 등 제노바 사람들의 삶을 흥미롭게 적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제노바에서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포도주를 사오는데 선장들은 포도주의 이름은 묻지 않고 사들인 다음에 샴페인과 마데이라라는 상표를 붙여 팔았다고 합니다. 포도주의 다양한 풍미와 품질, 산지, 재배연도는 무시하고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에서 나오는 포도주만이 마데이라 포도주라고 한다고 합니다.
베로나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작가는 이탈리아의 도시들 구경에 나섰나 봅니다. 파르마, 모데나, 볼로냐, 베로나, 만토바, 밀라노, 피사, 시에나, 로마, 나폴리,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파에스툼, 베수비오, 몬테 카시노, 피렌체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제가 가본 곳도 적지 않아서 180년 전 디킨스가 본 것들과 제가 본 것들의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베로나에서는 줄리엣의 집만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디킨스는 여관이 된 캐퓰릿 가문의 집에서 머물렀을 뿐더러 줄리엣의 무덤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줄리엣의 집으로 알려진 장소 역시 영화와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디킨스 시대에는 무슨 근거로 로미오와 줄리엣에 관련된 장소가 존재했는지 의문입니다.
디킨스는 나폴리까지는 갔으면서 나폴리 앞에 있는 카프리 섬은 물론 시칠리아에도 가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역사적인 장소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던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디킨스의 이탈리아 기행은 제가 정리한 이탈리아 여행기를 풍성하게 해줄 것으로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