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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겨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1
안토니오 무뇨쓰 몰리나 지음, 나송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이베리아반도를 다녀와서인지 제목만으로도 반가운 소설입니다.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의 <리스본의 겨울>은 스페인의 북서해안 도시 산세바스티안과 수도 마드리드 그리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연결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먼 과거로부터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그 과거는 기억과 상상이 교차되고 있어 책읽기에 나름 신경이 쓰이기도 합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노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비랄보를 화자가 2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화자의 정체는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도 밝혀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이야기의 주인공인 산티아고 비랄보를 객관화한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체 이야기는 비랄보가 산세바스티안에 있는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의 술집에서 연주활동을 할 때 만났던 루크레시아와 그녀의 남편 말콤 사이에 벌어지는 위태로운 삼각관계가 기본 골격입니다. 여기에 미술품을 암거래하는 말콤의 사업파트너 투생 모퉁과 그의 비서 다프네, 그리고 비랄보와 함께 연주하는 트럼펫 연주자 빌리 스완,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오스카, 드럼을 연주하는 부비, 그리고 레이디 버드의 주인 플로로 블룸 등이 엮여듭니다.
옮긴이는 작품해설을 통하여 이 소설에서 도시의 밤, 서스펜스, 도망과 추적, 폭력과 죽음, 권총, 레인코트, 중절모, 우울한 호텔방 등을 그려내고 있어 마치 이 마치 누아르 영화의 장면이 연상된다고 적었습니다. 사실 부적절한 관계는 아슬아슬하기 마련입니다만, 레이디 버드에서 만난 비랄보와 루쿠레시아는 단숨에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말콤이 눈치를 채면서 말콤과 루크레시아는 밀항선을 타고 베를린으로 빠져나가고 맙니다. 유럽 각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던 가운데 루크레시아와 연락이 닿아 편지가 오가면서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이야기의 주요 무대는 리스본이 됩니다. 비랄보가 루크레시아를 만날 때 리스본을 꿈꾸는 그녀를 위해서 ‘리스본’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하는데, 정작 비랄보는 리스본에 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잠시 본 리스본은 예뻤다기 보다는 신비로웠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그래서 “산세바스티안이나 파리만큼 안개가 많은 도시일 거라 상상했었다. 투명한 공기, 붉은 황토색이 뚜렷한 가옥들, 하나같이 똑같은 빨간 지붕들, 방금 내린 빗물처럼 영롱함이 감싸는 도시 언덕에 정적인 황금 빛줄기는 그를 놀라게 했다.(165쪽)”라고 그린 리스본의 인상이 공감되었습니다. 비랄보가 리스본에서 묵은 호텔은 꼬메르시우광장 가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광장 한 복판에 서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랐다고 하지만, 1755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된 리스본을 재건한 주인공 주제1세의 기마상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루크레시아가 ‘리스본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끝에 도달하는 것과 같을 거야(167쪽)’라고 말한 이유를 알듯합니다.
루크레시아의 행적을 찾는 말콤과 투생 모퉁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 비랄보가 말콤과 열차에서 사투를 벌이고, 한적한 곳에 은신하고 있는 루크레시아를 만나 다시 사랑을 이어가는 곳도 리스본입니다. 그래서 리스본의 모습은 비교적 많이 그려지고 있는 반면, 정작 현시점에 되는 마드리드의 모습은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산세바스티안의 풍경은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만에서 조용하게 부서지는 파도와 타마린도 나뭇가지에 깃든 장밋빛 황혼(32쪽)’, ‘암초에 부서져 만들어진 차가운 물거품이 가끔씩 튀기는 마리티모 산책로(104쪽)’ 등입니다.
작가는 1975년 프랑코의 사망과 함께 스페인 사회에도 고립된 인간들로 채워진 불안정한 도시의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정열적인 사람들이 투우와 플라멩코로 넘치는 축제가 일상이던 스페인의 전통적 이미지를 과거로 묻고 있다고 했습니다. ‘옛것은 아름다운 것이여’라던 광고카피가 생각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