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을 제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거, 기억납니까? 그 세계는 우리가 디디고 선 이 땅의 아래에 있습니다. 지상의 사람들은 몰라도 되는 세계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광부들의 세계는 존재합니다. 조지 오웰에게 소설가란 이 두 세계 사이를 넘나드는 존재입니다. 비유하자면 소설가는 마르고 젖은 존재인 셈이죠. 소설가는 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 가능성으로만 숨어 있던 발밑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 P113
관계라는 건 실로 양쪽을 연결한 종이컵 전화기 같은 것이어서, 한쪽이 놓아버리면 다른 쪽이 아무리 실을 당겨도 그전과 같은 팽팽함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 P119
이미 잡았던 손을, 이미 입맞췄던 입술을, 이미 안았던 몸을, 다시 한 번 잡고 입맞추고 안는다면, 다시 한 번 그 인생을 살면서도 마치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 손을 잡고 그 입술에 입맞추고 그 몸을 안는다면, 그렇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요, 라고 말하며 이진혁씨는 전시 제목에 얽힌 이야기를 끝냈고, 나는 몇 년 전 동네를 떠난 그 여자를 다시 생각했다. 한번 더 그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과연 어떨까? 여름 환한 빛 아래, 어떤 사람은 곧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서 정든 동네를 떠나고, 어떤 사람은 창밖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녀를 동정한다면. 그 푸른 나무들 사이로 수업을 마친 아이가 돌아온다면. 마치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그 아이를 맞이할 수 있다면. - P123
십 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 지 나로서는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그 일이 일어나고 난 뒤부터 시간은 제멋대로 흐르기 시작했으니까. 어떨 때는 시간이 그대로 멈춰 있는 듯했고, 어떨 때는 한평생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과거로, 오로지 과거로만 치달았다. - P126
"그게 아니라 너무 아름다워서, 청년은 그 아름다움에 지칠 때까지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네요"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무덤을 두고 아름답다니, 그래도 되나요?‘라고 내가 물었고 "그럼요. 그래도 됩니다"라고 그녀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 P127
만약 그날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경주행 수학여행 버스 기사가 내리막길에서 과속하지 않았다면? 아니, 아이가 문과가 아니라 이과를 선택했다면, 그래서 사고 직후 멈춰 선 뒤쪽 버스에 탑승한 아이들과 같은 반이었다면? 아니, 아니, 빈말이었을지언정 수학여행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을 때 선뜻 그래, 이번에는 나도 안 갔으면 좋겠어, 라고 말했더라면? 가정의 지옥으로 흘러든 마음은 고통의 하구를 지나 마침내 죄책감의 바다에 이르렀다. 그 바다에서 모든 질문은 ‘너는 죽었는데 왜 나는 살아 있는가?‘로 귀결됐다. 지금 나 역시 그 바다의 한복판에서 표류 중이다. 그 바다 위로 천 년 전의 푸른 무덤들이 마치 다도해의 섬들처럼 군데군데 솟아 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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