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동안 계속 눈이 내렸다. 날씨는 내가 바랐던 대로 바람이 잔잔하고 고요했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나 벼락이 친 뒤 내리는 조용한 여름비보다 평화로운 것은 없다. 칙칙한 하늘의 한쪽이 이따금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숲은 부드럽게 반짝이는 눈의 베일 너머로 가라앉았다. 태양은 눈 덮인 이 세상 어딘가에 떠 있겠지만 우리에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까마귀들은 몇 시간씩 가문비나무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회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까마귀의 침침한 실루엣에는 내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낯설지만, 그러면서도 친밀한 삶, 검은 깃털 속을 흐르는 붉은 피, 까마귀들은 나에게 금욕적 인내의 상징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다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인내의 상징이었다. 까마귀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내가 만약 공터에 쓰러져 죽는다면 까마귀들은 나의 시체를 뜯어 먹을 것이다. 숲에서 시체를 치워버리는 게 그들의 임무다. - P332

사랑에 빠지는 일이 동물들에게 행복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동물들은 그 순간이 지나가버리는 것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매 순간이 영원이다. […] 그 어디에도 행복의 흔적은 없다. 그 뒤에 남는 것은 허탈뿐이다. 윤기가 사라진 털과 죽음과도 같은 잠뿐이다. - P336

나는 내 겉모습에 신경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무슨 옷을 입든 동물들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동물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외양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동물들에겐 미적 감각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동물에게 아름답게 보이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다. - P359

나의 냉정함이 놀라웠다. 무엇인가 달라져 있었다. 나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내가 불안에서 벗어날 길은 불안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뿐이다. 해묵은 슬픔을 억지로 삶 속에 끼워놓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삶은 나로 하여금 속임수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를 속일 만한 어떤 이유나 핑계가 없다. 내 주변에는 이제 사람들이 없다. - P368

그 여름, 나는 룩스가 개이고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인간이고 룩스가 개라는 사실이 우리들의 차이를 뜻하지는 않았다. 룩스도 변했다. 내가 거의 모든 시간을 룩스와 함께 보내고부터 룩스는 침착해졌다. 5분만 자리를 비워도 그사이 내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걱정 따위는 이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돌이켜보면 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일이었다. 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룩스의 움직임이나 소리를 거의 다 알아듣게 되었다. 우리 둘 사이에 마침내 무언의 공감대가 성립된 것이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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