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응시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글쓰기가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든다. 그러나 공포가 나를 덮쳐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두워질 때까지 글을 쓸 테고, 이 새롭고 서툰 작업에 피로해진 나의 머리는 텅 빈 채로 잠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침은 두렵지 않다. 다만 어스름한 기나긴 오후가 두려울 뿐이다. - P6
나는 말을 걸며 개를 안심시켰다.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 우울하고 습한 계곡의 적막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너도밤나무 나뭇잎 사이로 초록빛 햇살이 비치고 돌 바닥이 거의 다 드러난 얕은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졸졸 울리던 계곡의 적막을. - P20
나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내가 조금 전 계곡에서 보았던 광경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그건 도무지 사실일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일어난다 해도 산속의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럽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햇빛 속에 가만히 앉아서 나비를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 P21
나는 걱정에도 절망에도 빠지지 않았다. 억지로 걱정거리나 절망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내 상황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를 알 만큼은 나이를 먹었다. […] 나는 첫 번째 가정을 믿기로 했다. 그래야 누군가가 며칠 뒤 나를 이 산속 감옥으로부터 구해줄 거라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이미 누군가가 나를 구해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확실히 그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나는 한동안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은 현명했다. - P26
내가 해둔 모든 조치들이 인간을 겨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조치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내가 경험했던 위험이란 모두 인간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기 때문에 내 관념을 갑자기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생애를 통틀어 유일한 적은 인간이었다. - P27
불현듯 이 화창한 5월의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하루를 살아 넘겨야 하며 도망갈 길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침착성을 잃지 않으면서 버텨내야 할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살아남아야 했던 날이 그날 생애 처음 닥친 것도 아니었다. 빨리 저항을 단념해야 더 견딜 만해질 것이었다. 전날의 멍함은 이제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전에 없이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 P33
그것이 만약 죽음이었다면 죽음은 매우 갑작스럽고도 부드럽게, 사랑스럽다고 말해도 좋을 방식으로 닥쳐 왔던 것이다. 만약 내가 후고와 루이제를 따라 마을에 갔더라면 나의 상황은 오히려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 P37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소가 나에게 축복인 동시에 커다란 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멀리 나가 돌아다니는 일도 힘들 것 같았다. 소 같은 가축은 먹이를 챙겨주어야 하고 젖을 짜주어야 한다. 그래서 붙어 앉아 보살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소의 주인이자 소의 노예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소를 원하지 않았더라도 그곳에 소를 남겨두고 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는 그만큼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 P42
선량한 후고, 그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그는 지금도 어느 주점에서 레모네이드를 한 잔 앞에 놓고 앉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떨쳐버리고 말이다. 이제는 회의와 회의 사이를 떠밀려 다닐 필요도 없다. - P46
나는 소에게 이름을 하나 붙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벨라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은 이런 산골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짧고 부르기 좋았다. 소는 자기 이름이 벨라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고 내가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렸다. 소가 전에는 어떻게 불렸는지 궁금했다. 디른들, 그레틀, 아니면 그라우에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소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었다. 그 소는 산속에 있는 유일한 소였고, 어쩌면 온 세상에 한 마리밖에 없는 소인지도 몰랐다. - P50
사실 룩스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어놓은 이름이다. 여하튼 오래전부터 계곡의 사냥개들은 모두 룩스라고 불렸다. 진짜 살쾡이는 씨가 마른 지 오래기 때문에 산속에 사는 사람들도 살쾡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잘 모를 것이다. 룩스의 선조들 중 하나가 마지막 남아 있던 진짜 살쾡이를 죽이고 룩스라는 이름을 전리품으로 얻었는지도 모른다. - P50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랬다. 구조의 손길을 더는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이 어리석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이성과 믿음의 모든 논리를 벗어난 희망이었다. - P51
오늘 내 아이들을 떠올려보면, 아이들은 다섯 살짜리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그 나이에 벌써 내 인생에 서는 멀어져갔던 것 같다. 아마도 자식들이란 그 나이가 되면 으레 부모의 인생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서서히 하숙인으로 변해간다. 단지 이런 일이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기 때문에 거의 느끼지 못할 뿐이다. 아이들이 멀어지는 것 같다는 서늘한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치는 순간도 있었지만, 나 역시 다른 부모들처럼 그런 생각을 얼른 머리에서 지워버리곤 했다. 나는 어쨌든 살아야만 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들의 그런 변화를 눈치채고서도 살아나갈 수 있단 말인가? - P52
나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 적은 없었다. 내가 슬픔을 느낀 것은 오래전 그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였다. 어쩌면 이런 말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누구한테 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나는 진실을 쓰기로 결심했다. 내가 일생 동안 거짓말을 하며 위해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다. - P52
희생자들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으로 추정하건대 그들이 고통스러웠던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두뇌가 생각해낸 가장 인간적인 악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54
사실 지금도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나는 이미 나로부터 너무 멀어졌고 이를 느끼는 것도 버거운 지 모른다. - P57
내 이름을 어디에도 적어놓지 않았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 이름은 벌써 거의 잊히고 있다. 그렇게 앞으로도 잊힐 것이다. 아무도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이젠 이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P58
염려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나는 사람들 대부분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한지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런 편이 다행이다. 상상력은 사람을 과민하게 만들고 상처받기 쉽게, 무기력하게 만든다. 상상력은 퇴화의 증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상상력이 없는 사람을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한 적이 많았다. 그들이 더 쉽고 편안한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 P59
룩스도 내가 오래 쳐다보면 시선을 돌린다. 나는 인간의 눈이 최면 작용을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람의 눈이 너무 크고 반짝거리기 때문에 동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접시만큼 큰 눈이 나를 바라본다면 나라도 싫을 것이다. - P67
전쟁 때 그런 상태를 겪어보고도, 사람이 채워지지 않는 육체적 열망에 끌려 다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나는 잊고 있었다. 햇감자를 거두었을 때 갑자기 그 무서운 식욕은 씻은 듯 사라졌다. 신선한 과일과 초콜릿, 아이스커피의 맛이 어땠는지도 서서히 잊기 시작했다. 갓 구운 빵 냄새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빵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가끔 빵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엄습하곤 한다. 평범한 검은 빵이 나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맛을 자랑하는 음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 P73
너무나 힘에 부친 나머지 내 상황을 똑똑히 헤아려 볼 여유도 없었다. 견뎌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나는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잊은 채 나는 그날그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 P75
산장으로 돌아가는 긴 길 위에서 나는 나의 지난 삶을 돌이켜보았다. 그러고는 모든 면에서 불만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했던 것 가운데 이룬 것은 거의 없었고, 내가 이루어놓은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얘기를 나누어본 일이 없다. 다른 사람들과 그런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언젠가 나에게 다시 주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순전히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 P82
어떤 것에 대한 삶이 몸 구석구석 까지 스민 뒤에야 그것을 정말로 안다고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손, 나의 발, 나의 내정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나에게는 그토록 비현실적인 것이다. - P83
숲은 한낮의 햇살에 안겨 있었고 왜송나무 쪽에서 훈훈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때 석남꽃이 피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꽃들은 산등성이 위로 붉게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한낮이 달밤보다 훨씬 더 고요했다. 숲이 노란 태양 아래 노곤하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 한 마리가 푸른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룩스는 귀를 쫑긋거리며 잠이 들었고 거대한 적막이 나를 덮어버렸다. 나는 영원히 거기 앉아 있고 싶었다. 따스함 속에, 햇살 속에, 발밑에는 개가 잠들어 있 고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맴돌고 있는 그 한 가운데에. 걱정과 기억이 전부 다 사라진 것처럼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발길을 떼어야 했을 때는 마음이 정말 무거웠다. 산장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서서히 이 숲속의 고요에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존재, 머릿속은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뒤죽박죽이며 무지막지한 신발로 나뭇가지를 밟고 피비린내 나는 살생을 불사하는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 P84
인간이 없는 곳에서 정확한 시간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 전에는 5분도 늦지 않고 약속 시간에 도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던가 생각날 때가 가끔 있다. 시계를 마치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태도가 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노예로 살고 있을 때는 규정들을 잘 따르면서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공적인 시간에, 째깍거리는 시계에 맞춰 사는 것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많았다. 나는 시계를 좋아한 적이 없다. 시계를 마련하면 모두 얼마 안 가서 망가지거나 없어졌다. 체계적인 시계 제거의 방법을 나는 자신에게까지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던 것인지 물론 다 알고 있다. 지금은 그만큼 생각할 시간도 많고, 나이를 먹으면 모르는 것이 없게 된다. - P87
그렇다, 차라리 나 혼자 지내는 편이 낫다. 나보다 힘이 약한 파트너와 함께 지내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받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죽도록 키워가기만 할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은 숲에서 홀로 지내는 삶도 바꾸지 못한 것이다. 나를 참아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동물들뿐인지도 모른다. 후고와 루이제가 여기 남아 있었다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공동생활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89
내가 지금 함께 있을 사람을 고를 수 있다면 현명하고 재미있어서 함께 웃음을 나눌 수 있는 할머니를 원할 것이다. 웃음은 지금도 너무나 그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라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고 나는 또다시 혼자 남게 된다. 그것은 할머니를 아예 모르고 지내던 것보다 더 힘들 것 같다. 웃음에 대한 대가 를 너무나 비싸게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죽은 뒤에는 계속 할머니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다. 지난 추억이라면 안 그래도 넘칠 지경인데 더는 싫다. 그러다 머리가 터져버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 P90
되돌아보면 나는 항상 그런 불안에 떨며 살았던 것 같다.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생명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불안의 고통을 떨치지는 못할 것이다. […] 하지만 이 무거운 짐에 대해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말해보았자 남자들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나와 똑같이 처신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차라리 옷이라든가, 친구들, 연극에 관해 떠들면서 웃어댄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근심들은 두 눈에 숨긴 채로.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무언가를 사랑하는 능력 때문에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 P96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보잘것 없다. 그것은 아마 종이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외적인 자유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 내면이 자유로운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이것이 치욕스럽다고,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부과된 짐을 지고 가다가 결국에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죽는다. 나는 명예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태어나고 죽는 일은 명예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그저 일어나는 일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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