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막무가내로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희망은 마치 눈먼 두더지처럼 내 마음속에 들어앉아서 제멋대로 굴고 있다. 그 어리석은 두더지를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이놈과 나에게 마지막 일격이 가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의 눈먼 두더지는 우리 둘이 죽어가기 전에야 인정할 것이다. 내가 그의 고집스러움에 어떤 승리감도 안겨주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그렇지만 두더지도 제정신은 아니니 내가 그의 버릇을 고쳐줄 수 있다면 기뻐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 P104

젊었을 때 아무것도 모른 채 무거운 짐을 덥석 안고 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많은 의무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장부였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여장부 타입은 아니었고, 평범한 이성을 가진, 과중한 짐을 지고 고통받는 여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들에게 적대적이며 낯설고 불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별로 아는 것이 없었으며 어떤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머릿속은 끔찍한 혼돈 그 자체였다. 그녀가 살고 있던 사회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궁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대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가 항상 알 수 없는 불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것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 P113

그 밖에도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개울가에 피어 있는 꽃 이름 하나도 모른다. 과학시간에 책과 그림을 통해서 배웠겠지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수학도 몇 년 배웠지만 그런 것은 어디다 쓰는 건지,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몰랐다. 외국어는 쉽게 배웠지만 그걸 써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말하는 법은 끝내 익히지 못했고, 맞춤법과 문법도 고스란히 잊어버렸다. 카를 6세가 언제 살았는지, 서인도제도가 어디에 있으며 거기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우등생이었다. 모르겠다. 우리 교육제도에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면 이 시대의 정신박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다고 생각한다. - P114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는 내게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 나는 기회를 써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 나는 초반의 인생에서 어중간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곳 산속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유일한 교사는 꼭 나만큼 무지하고 무식하다. 그 교사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 P114

나를 이렇게 염려해주는 개의 모습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개는 젖은 발로 내 가슴에 뛰어오르면서 신이 나서 크게 짖었다. 룩스에게는 강하고 쾌활한 주인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삶의 의욕에서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개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즐거운 척해야 할 때도 많았다. 비록 내가 그에게 그다지 즐거운 일들을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개는 내가 얼마만큼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지, 그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 P131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들에 점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아무 계획 없이 살아온 것이 사실 내 탓은 아니었다.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관철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던 것뿐이다. 내가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내 계획을 수포로 돌리는 누군가가 나타나거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곤 했었다. 그러나 여기, 산속에는 내 계획을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만약 계획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었다. 내가 탓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 - P135

이상하게도 나는 일을 다 끝낸 뒤의 기쁨 같은 것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한 가지 일을 다 끝내고 나면 그 일은 금세 잊어버리고 새 일거리를 생각했다. 별로 많이 쉬지 않았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몸이 괴로울 정도로 일을 하는 동안에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 편안하게 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도 마침내 벤치에 앉게 되면 금방 불안해져서 새 일거리를 찾았다. 내가 유난히 부지런해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천성적으로 게으른 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기방어 본능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쉬고 있으면 자꾸 지난 일을 생각하게 되고 잡념에 빠지게 된다. 나는 그런 것이 싫었다. 내게 남은 선택은 계속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 P136

동굴에 대한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날도 있었다. 흙과 석회석이 걸러진 아주 깨끗하고 맑은 물이 땅 밑에 고이고 있을 것이다. 동굴에는 동굴 뱀과 하얀 장님 물고기 같은 동물들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커다란 종유석 동굴 안, 맑은 물속에서 끝없이 빙빙 도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곳에서는 물이 찰랑대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적막한 곳이 있을까? 내가 그런 물고기들을 보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굴에 무엇이든 살아 있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동굴은 굉장히 매력적인 동시에 무시무시하다. - P141

소는 어떻게 혼자 이 침울한 외양간 속에서 밤낮 참으며 서 있는 것일까. 나는 벨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소도 이따금 꿈은 꾸겠지. 햇볕이 등에 내리쬐고 맛있는 풀을 뜯고 송아지가 달려와 따스한 몸을 비비던 일, 그 다정함과 지난겨울 주고받았던 끝없는 침묵의 대화들에 대한 꿈을. 꿈속의 송아지는 건초더미 안에서 뒹군다. 친근한 숨결을 콧구멍으로 내보낸다.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억이 소의 무거운 몸에서 피어올랐다가 흐르는 피를 타고 다시 가라앉는다. 소는 그런 꿈을 꾸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매일 아침 소의 얼굴을 쓰다듬고 말을 걸면서 내 얼굴을 향한 소의 촉촉하고 커다란 눈을 들여다볼 뿐이다. - P144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두려웠다. 나는 지금도 두렵다.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P151

숲속 생활에서 나에게 지루함을 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묵은 신문들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갇히기 전에도 나는 신문들을 볼 때마다 지루해했을지 모른다. 다만 언제나 따라다니던 그 희미한 불쾌감이 지루함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나의 가여운 딸들도 지루함을 참지 못해 단 10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지루함에 마비되어 있었다.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의 끝없는 파동과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이상 놀랄 만한 일은 없다. 벽 역시 고통받던 한 인간의 절망적인 마지막 시도였을 것이다. 부서져야만 했던 한 인간. 부서지지 않으면 미치고 말 한 인간의 몸부림. - P151

산속에서의 생활은 개에게 흥밋거리들을 많이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태양, 비, 바람, 소나기, 이 모든 것이 룩스를 신나게 했다. 룩스가 곁에 있으면 오래 슬픔에 잠길 겨를이 없었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그를 그토록 행복하게 하는데,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개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야생에서 자란 개들이 모두 그렇게 행복하고 밝은 성격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 개에게 그런 능력을 일깨워주었을 것이다. 왜 우리가 개에게 그런 묘약 같은 존재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인간의 과대망상증은 아마도 이런 개들이 키워준 것일지 모른다. 내가 던지는 눈길 한 번에 룩스가 기뻐 날뛰는 것을 볼 때면 내가 어떤 특별한 존재가 된 착각에 빠진다. 물론 나한테 특별한 것이라곤 없다. 다른 개들과 마찬가지로 룩스도 그냥 사람을 좋아하는 것뿐이다. - P161

아무리 다른 모습을 떠 올려보려고 해도 바뀌지 않는다. 머릿속의 그림들을 억지로 지우려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은 단지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그것을 거부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 P171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내키는 대로 사는 만큼의 대가는 누구나 치러야 하는 법이다. - P172

산속에서 정당한 일과 부당한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오직 나만이 자비를 베풀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을 벗어던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었다. 인간답게 생각하고 인간답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뿐이다. - P177

나는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순간이 무서웠다. 저녁 내내 이 두려움이 나와 함께 탁자에 앉아 있었다. […] 나 혼자 카드를 앞에 두고 무서움을 견디며 앉아 있었다. 매일 잠을 자긴 자야 했다. 너무 지쳐 탁자 아래로 몸이 쓰러질 것 같다가도 막상 침대에 누우면 어둠과 적막 속에서 잠이 달아 나곤 했다. 그러면 온갖 생각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힘겹게 잠이 들면 꿈을 꾸었고, 울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그 끔찍한 꿈속으로 되돌아갔다. - P180

등잔에 불을 붙일 때, 불현듯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세차게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만 포기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회피하는 일에 나는 지쳐 있었다. 이제는 그만두고 싶었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더는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심장이 서서히 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받아들이기로 결심만 했을 뿐인데도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지난 일들이 또렷이 다 기억났다. 나는 솔직해지겠다고, 지난 일들을 미화하지도 왜곡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 P183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에 나가보았다. 등잔의 불빛이 길 위를 비추었다. 어린 가문비나무 위에 쌓여 있는 눈이 불빛을 받아 노랗게 반짝였다. 이런 풍경들이 의미해왔던 것들을 나의 눈이 잊게 되기를 바랐다. 모든 사물 뒤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기다리고 있다. 내 머리가 과거의 일로 가득 차 있고 내 눈이 새로운 것을 찾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나는 과거를 잃어버렸고 아직 내 앞에 몸을 숨기고 있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왜 나에게 작은 설렘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오랜만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 P186

룩스가 의자로 뛰어오르더니 머리를 내 무릎 사이에 묻었다. 나는 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개가 좋아하는 것이 보였다. 지난 몇 주 동안을 우울하게 보내야 했을 테니 이제는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어야 했다. 개는 내가 다시 자기 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나한테 달려들고 킁킁거리며 내 손을 핥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 룩스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러더니 금세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개는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가 따라갈 수 없었던 낯선 세계로 훌쩍 떠났던 주인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이제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밤이 힘겹든 즐겁든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결코 그것에 맞서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 P187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매우 현명했지만 나의 현명함은 너무 늦게 나타났다. 태어날 때부터 현명했다 하더라도 현명하지 않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던 사람들 모두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는 일이 좋다.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그들은 내 삶의 일부다. 내가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나의 새로운 인생에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잠 속에서 죽은 사람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전에 꾸던 꿈들과는 달랐다. 무섭지 않았다. 다만 슬플 뿐이었다. 슬픔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 P188

나는 별로 힘이 센 편이 아니었다. 단지 우직하고 끈기가 있을 뿐이었다. 어느샌가 나는 내 손으로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손이란 정말 놀라운 도구였다. - P190

무엇인가를 죽이는 일이 즐겁다고 느끼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었다. 팔뚝의 털이 모두 곤두섰고 혐오감에 입안이 타들어갔다. - P195

그동안 너무 큰일들을 치렀다.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벤치에 누워 눈을 감았다. 먼 지평선에 눈 덮인 산들이 보이고 거대하고 하얀 적막 속에서 내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들이 보인다. 생각이란 생각, 기억이란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고요한 눈의 반짝임만 남아 있었다. 머릿속에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외로운 사람에게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저항할 힘을 낼 수 없었다. - P207

첫해 겨울 꿈 속에 나타나던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그들은 더 볼 수가 없다. 꿈속에서 사람들이 다정하게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아무 관심 없다는 표정 정도를 보여줄 뿐이었다. 그러나 꿈에 나타나는 동물들은 항상 다정하고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사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건 단지 내가 사람들과 동물들에 대해서 평소 품은 생각이 표출된 것뿐이다.
꿈은 차라리 꾸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 P209

벽은 이제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몇 주씩 벽을 잊어버리고 지내기도 한다. 벽을 떠올릴 일이 있더라도 이제 벽은 내 발길을 가로막는 벽돌담이나 정원의 울타리 같은 것일 뿐이다. 사실 벽이 그들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내가 모르는 물질과 방식으로 만들어진 대상일 뿐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런 것들은 벽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벽 때문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이전이나 다름이 없다. 태어남, 죽음, 계절의 바뀜, 성장과 소멸. 벽은 죽어 있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다. 말하자면 벽은 내가 마음을 쏟을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벽에 관해서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는 벽과 맞설 날이 올 것이다. 영원히 이곳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까지 나는 벽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싶다. - P210

이제껏 나는 내 눈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신체의 일부에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눈이 멀게 되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마 약간 원시가 된 것뿐, 더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 P211

까마귀들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공터로 날아와 하늘을 몇 바퀴 선회한 다음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황혼이 깃들 무렵이면 다시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다시 숲속으로 사라졌다. 까마귀들은 묘한 이중생활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까마귀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전에는 왜 까마귀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도시에서는 더러운 쓰레기더미 위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까마귀를 형편없고 지저분한 새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곳에서 반짝이는 가문비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은 완전히 다른 새다. 그래서 나는 까마귀를 싫어했던 기억들을 전부 잊었다. 지금도 나는 매일 까마귀들이 날아올 때를 기다린다. 까마귀들이 시각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 P212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는 모든 일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시계를 수천 개 가져다놓고 가리킨다 한들 시간에 쫓기지 않을 것이다. 재촉하고 등을 떠미는 것도 없다. 산속에서 조급해하는 것은 나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 때문에 힘이 든다. - P216

마음을 줄 대상이 남김없이 사라진 데 안도감이 드는 때가 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망갈 길은 없다. 이 산속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살아 있는 한 나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게 되는 날, 나는 삶을 멈출 것이다. - P226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일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 대한 그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고원의 초원과 그 너머의 숲, 서쪽에는 창백한 달이 떠 있고 동쪽에서는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대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원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비밀스러운 유혹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든 낯선 것들처럼 낯설고 위협적이기도 했다. - P245

마음을 들뜨게 하는 수천 가지의 냄새들, 등 위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혀끝에 닿는 차가운 샘물, 가쁘게 산짐승을 향해 달리던 사냥, 겨울바람이 집 주변에 휘몰아칠 때 따스한 난로 앞에서 잠들던 일, 쓰다듬어주는 인간의 손길, 다정한 인간의 목소리, 그것이 룩스의 삶이었다. - P253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에 불과하다. 때로는 어쩔 도리 없이 그저 섭리에 몸을 맡긴다. 나는 죽어가는 동물을 구해주기도 했다가 고기가 필요하면 산짐승에게 총을 겨눈다. 내가 어떤 서툰 짓거리를 해도 산은 변함이 없다. 노루가 새로 태어나 자라나고, 또 어떤 동물은 죽는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훼방꾼에 불과하다. 외양간 곁의 쐐기풀은 계속 자란다. 내가 수백 번 뽑아낸다 한들 쐐기풀은 죽지 않을 것이다. 쐐기풀은 나보다도 오래 산다. 언젠가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풀을 베지 않을 것이다. 잡초가 자라 숲이 벽을 덮고, 사람들이 강탈해간 평지까지 다시 뒤덮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마치 숲이 내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고, 그 속에서 영원히 끝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숲은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 P257

글을 쓰면서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새로운 나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것이 서서히 보다 큰 ‘우리‘로 녹아 사라지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 고원 때문이었다. 거대한 하늘 아래 초원의 적막 한가운데에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나‘로 머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보잘것없는 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나, 고집스러운 나로 남아 거대한 공동체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때는 내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었지만, 고원에 올라간 뒤 나는 그런 내가 매우 초라하고 우스꽝스럽다고 느꼈으며 빈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P258

어렸을 적에 나는 내 눈앞의 모든 것이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설명도 그 걱정을 덜어주지 못했다. 학교에서 집 생각을 하면 집이 커다란 공터로 변해 있을 것 같았다. 식구들이 집에 없을 때에는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자리에 누워 있거나 식탁에 다 함께 앉아 있을 때만 안심이 되었다. 나에게 확실하다는 것은 보거나 만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 P260

나의 두려움은 정말 바보스러운 것이었을까? 벽은 내가 어린 시절 가졌던 공포의 증거는 아니었을까? 하룻밤 사이에, 내가 집착하던 나의 모든 과거가 사라져버렸다. 그런 일도 가능했으니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런 두려움이 덮치려고 할 때마다 물리칠 만큼의 이성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성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 정상적인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정상적 반응은 아마 미쳐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 P260

도시에서는 항상 불을 켜놓고 지내던 밤이 이 고원에서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돌로 지은 집 안에서 덧창을 내리고 커튼을 치고 갇혀 지낼 때 나는 밤을 몰랐던 것이다. 밤은 전혀 으스스하지 않았다. 밤은 아름다웠으며 나는 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을 때에도 나는 그 너머에 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빨강별, 초록별, 파랑별, 노랑별. 그들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내가 그들을 눈으로 볼 수 없는 한낮에도. - P266

문득 도망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랬다. 이곳을 떠남으로써 동물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도 아니었고, 순간적인 감정에 따른 결정도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어떤 것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나는 내게 의지하고 있는 동물들을 궁지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그걸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고 겁도 나지 않았다. - P279

고양이와 나 사이에 사실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선택은 할 수 있었다. 다만 머리로만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고양이와 나, 우리 둘은 결국 같은 성분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고, 우리는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거대한 암흑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배. 인간이기 때문에 다만 나는 이를 인식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인식이라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쓸모없는 선물일 뿐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집어치우기 위해서 고개를 저었다. - P281

나는 더 이상 삶을 견뎌낼 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의미 같은 것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바람은 어쩐지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역할을 하며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인생들 거의 모두가 형편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에 대해 내가 불평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기에 그들을 심판할 수 없다. 그들을 너무나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해와 달과 별의 위대한 운행은 탁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니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주의 깊고 열광적인 관객에 불과했다. 나의 생애는 이 우주의 일부분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것이다. 나는 생애의 대부분을 일상적인 일들에 허비해버렸다. - P292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무한히 멀리 떨어져나와 있었다. 내가 삶을 지속하고 싶어 한다면 이런 상태에 붙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는 초원에서 내가 경험한 일들을 모두 잊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그때 알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한 것 모두가 서투른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흔적을 좇아가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초막 앞의 벤치에서 보낸 그 시간은 나의 현실이었고, 또한 불완전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개인적 체험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이 눈보다 빨랐고, 그래서 현실의 진면을 보지 못했다. - P292

잠에서 깨어날 때,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눈으로 보면 어떤 사물을 잘 알아볼 수 없는 때가 있다. 그때 사물은 무섭고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내 옷을 걸쳐둔 의자였음을 알게 된 후에야 사물은 친숙한 대상으로 다가온다. 그러고도 잠시 동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게 보이고 가슴이 쿵쿵거린다.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내가 그런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 데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곳에는 내가 마음을 쏟고 정신 적으로 몰두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책도 없고 대화할 사람도 없고 음악도 들을 수 없다. 아무것도 없다. 어려서부터 나는 사물을 나 자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이 오래전에는 싱싱하고 완벽하고 매우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나는 돌이킬 수 없었으며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고독은 나로 하여금 모든 기억과 의식을 던져버리고 다시 한번 삶의 위대한 광채를 바라보게 했다. - P293

나는 환상을 격렬히 거부하고 모든 희망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오로지 현실에 둘러싸인 채로 살아가는 것을 내가 참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를 마치 로봇처럼 조종할 때가 많다. 이걸 해, 저리 가, 그걸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그렇게 나 자신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나는 로봇치고는 형편없는 로봇이다. 아직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 P295

드디어 바람이 바뀌더니 동풍이 불기 시작했다. 날씨는 다시 좋아졌다. 점심때는 햇볕이 따뜻해서 벤치에 앉아 햇볕을 쪼일 수 있을 정도였다. 커다란 불개미들이 열심히 움직이면서 새까맣게 행렬을 지어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개미들은 목표가 뚜렷해 보였으며 오로지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개미들은 가문비나무의 가지라든가 작은 풍뎅이, 흙덩이 같은 것을 나르는 데 열심이 었다. 개미들은 보면 나는 왠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번도 개미굴을 부숴본 적이 없었다. 이 작은 로봇들은 경탄스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하게 큰 왕개미의 눈에는 아마 내 행동이 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 P306

내가 느려지기 시작한 후에야 산은 생생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적합한 방식인 것 같다.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물론 많은 일들을 겪어야 했다. 전에 나는 항상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성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목적지에 가서는 또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차라리 천천히 가는 편이 나았다. 나의 처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확실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것을 깨고 나올 능력은 내게 없었다. 때때로 나를 엄습했던 지루함은 자동차 생산업자들의 회의에 앉아 있는 정원사가 느낄 만한 지루함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평생 동안 그런 회의 한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내가 권태에 지쳐 죽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 P308

나는 위령의 날(11월 2일)을 좋아 하지 않았다. 병과 죽음에 관한 노파들의 수군거림, 죽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무정함, 이런 장례 의식에 아무리 아름다운 의미를 덧붙이려고 해도 죽은 사람에 대한 산사람의 공포는 없앨 수가 없다.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묘지를 장식하는 것은 그들을 잊기 위해서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는 자기도 죽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입을 종이꽃과 초와 근심스러운 기도로 막아버릴 것임을. - P316

죽은 사람들은 마침내 죄를 범하는 사람들의 무지막지한 손길로부터 벗어나 쐐기풀과 잡초로 뒤덮인 채 땅의 습기를 마시고 끝없이 살랑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 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언젠가 생명이 다시 이 땅에 생겨난다면 그것은 흙이 된 이들의 몸에서 자라날 것이다. 무생물로 태어나 영원히 돌덩이로 남는 것에서는 생명이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연민을 느꼈다. 연민이야말로 내게 남아 있던 사랑의 유일한 형태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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