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소년이 배트맨과 함께 아침을 준비하고 있어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게요. - P129

소년과 배트맨이 있는 풍경에 나는 점점 익숙해져 가요. 하지만 이 풍경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한 가지 마음만 품기에도 버거운데 왜 여러 가지 마음을 동시에 품게 되는 걸까요. 소년이 영원히 이곳에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과, 소년이 더 좋은 곳으로 갔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해요. - P130

피란 행렬을 따라갔을 때 폭격으로 껍데기만 남은 버스를 색칠하고 있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어요. 이미 망가진 버스를 왜 칠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 알겠어요. 그 아이들은 잿빛을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숨이 막히는 잿빛을. - P140

이제 바람이 불면 우리는 넷 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요. 쓸모없어진 물건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작은 소리를 들으려고요.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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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는 어른이 되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익숙해지는 것뿐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무뎌지는 것뿐이었다. - P92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슬픔을 안고 있어요. 그 사실이 나를 버티게 해요. 가끔은 슬픔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그만 잠겨 버리고 말 것 같을 때, 내 옆에 나처럼 턱밑까지 차오른 슬픔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헤엄쳐 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아, 아직 괜찮구나, 하고 따라서 헤엄을 쳐요. 헤엄치는 나를 보고 또 다른 누군가 역시 헤엄을 치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시커먼 슬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지어 헤엄을 치고 있어요.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요. - P104

원래 그랬잖아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이렇게 웃었죠. 왜 웃었는지 설명을 하려고 하면 하나도 웃기지 않은데, 그때는 눈물이 나도록 웃기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요. 나는 그렇게 웃어 버렸어요. - P120

아침을 먹으면서 말할 상대가 있으니 좋아요. 날씨라든가, 뜰에서 본 신기하게 생긴 벌레라든가, 헐거운 문고리라든가, 세상의 심각한 일들이 아니라 그냥 사는 얘기들이 오가요. 그래서 나는 소년과 아침 먹는 시간을 기다려요. 눈을 뜨고 일어나 아침을 먹을 때까지는, 예전처럼 사는 것 같다는 착각도 들어요.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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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까 봐 아무 인사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거짓말처럼 저 올리브나무가 연두색 손을 뻗어 인사를 건넸다고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다음 날도. 그 인사 한마디에 또 내일이 오더라고요. - P73

비누가 다 굳을 때까지 이틀 정도가 걸릴 거래요. 그때까지 만지지 말고 참고 기다려야 한대요. 비누 만들기의 핵심은 인내심이라고요. 오래 말릴수록 더 좋은 비누가 된대요. - P79

우리는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들을 오래도록, 시간을 들여 바라봤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요. - P81

그들은 오래 머물고 싶어도 두려움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요. 신속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소중한 것들을 잃은 사람들은 더 빠르게, 더 민첩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죄책감이라는 걸 난 너무 잘 알아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요.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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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인사는 느긋하고 우아해요. 다시 만나기 위해 하는 인사니까요. 마지막의 마지막에, 최후의 순간에 두 손을 꼭 잡고 조급하고 간절하게 전하는 그런 인사가 아니니까요. 안녕히. 너무 무겁고 두려워서 우리는 차마 하지 못했던 인사예요. - P57

시간은 상대적이에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 초가 일 분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일 년은 육십 년이 되겠네요. 그러면 나는 전설 속의 용만큼 늙은 존재예요. 모든 것을 다 지켜보면서 혼자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아주 늙은 용이요. - P62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어요. 나나가 간직해 온 세이라 언니의 스웨터를 풀어 그 실로 레이스를 짜 커튼과 식탁보를 만들었어요. 파티마 아줌마의 옷을 자르고 바느질해 메이에게 새 옷을 만들어 주었고요. 내가 쓰던 쿠션은 천을 갈아서 조로에게 주었어요. 서운해하지는 마세요. 물건들에게도 계절이 있다면, 긴 겨울이 지나 봄이 온 것뿐이에요. - P69

저 반짝이는 것들은 하늘에 난 작은 구멍들이라고 나나가 그랬죠. 지상에서의 시간이 다하면, 그 영혼이 저 구멍을 메꾸러 가는 거라고요.
나는 똑같은 얘기를 메이에게 해 주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은 다 하늘의 작은 구멍을 메꾸러 떠난 거야, 라고요.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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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건 정말 종잡을 수가 없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마음을 정리했는데, 갑자기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니까. […] 나는 어떻게든 이 모험을 함께할 생각이었어. 어쩌면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르니까. - P26

오늘은 분명 세상이 끝나는 날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매번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요. 전쟁도 그래요. 남겨진 사람들한테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요. 영원히. - P42

내가 기다리는 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에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 P42

그 수많은 ‘만약에‘ 중에, 왜 이것일까요.
이별을 받아들이고, 무력감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내 삶을 받아들이고. 이 삶에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 숨을 들이켜듯이 받아들이고, 다시 내쉬듯이 체념해 버린 우리의 삶을요.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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