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진부한 말로 형용할 때의 무심함, 또는 난감함, 그러나 어쩔 수 없음. 이에 대해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아도라블: 사랑하는 존재를 향한 자신의 욕망의 특수성에 명칭을 부여하는 데 도달하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진 주체는 약간 바보 같은 이 단어에 귀착한다. 아도라블해!" […] 사랑이 "사랑해"의 동어반복을 피할 수 없듯, 나는 "adorable"을 그저 아도라블이라 번역하는 수밖에는. 동어반복을 피하기는커녕 이것이야말로 내 능력으로 가능한 최선의 번역이기에. 모든 번역은 결국 동어반복이기에. 검은 숲은 슈바르츠발트이기에. 번역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경이로운 동어반복으로 우리는 타자의 언어를, 타자를, 사랑하게 되기에. 그리하여 마침내 생의 한 시점 그것을 향해 가고 그것과 있게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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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더카머를 재해석하는 현대의 몇몇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분더카머는 개별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겪어온 고유한 역사와 기억의 진열실이자 마음의 시공간의 상징체다. 기억이란 대부분의 경우 그보다 훨씬 거대한 망각의 잔여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지은 분더카머 안에는 결코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예술 작품의 원형이나 고도로 완성된 지적인 사유의 언어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언뜻 보면 무가치한, 부서진, 깨진, 닳은, 기원과 이름을 모를,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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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라는 게 그랬다.
지루하리만치 느리게 다가와도
일단 마음에 꽂히면 확 퍼진다.
내가 찾은 게 아니라 진리가 날 발견한 거다.
순식간에 내 마음 물들인 거다.
의미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나의 희로애락은 사라질 것들에 묶여 있었다.
없어질 것들 때문에 염려했다.
있는 것은 사라질까봐, 없는 것은 나타날까봐 두려워했다.
사라져가는 존재로서 사라져갈 많은 것들을 사랑한 거다.
아아, 그게 내 마음의 사슬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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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 사제의 밤 - 불확실한 시대의 신앙
토마시 할리크 지음, 최문희 옮김 / 분도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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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고 ‘굳건해 보이는 신앙이 사실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굳어 있으며 부풀려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신앙에서 유일하게 위대하고 굳건한 것은 절망의 불안을 감추는 방탄 갑옷‘뿐이다. 물러서지 않고 십자가의 불길을 통과한 신앙은 어쩌면 자신의신원이라 여기는 것 또는 자신에게 익숙했던 것을 상당 부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 신앙이 새로 무르익게 되었음은 그것이 더 이상 갑옷‘
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신비가들이 말하는 벌거벗은 신앙‘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그 신앙은 공격적이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조바심 낼 일은 더더욱 없다. 물론 ‘위대하고 ‘굳건한 신앙에 비교하면 그것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것이다. 어쩌면 겨자씨 한 알처럼 무無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방식이 바로 그러하다고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은 존재들의 세상에서 ‘무‘無이시다. 하느님은 존재들 가운데 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만나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무언가가 되고자 한다면, 곧 무언가를의미하고, 무언가를 소유하며, 무언가를 알고자 하며, 한마디로, 사물들의 세계와 각각의 존재들에 집착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만나는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신앙도 무언가의 속성을 지닌 많은 것들, 곧 우리의 개인적 개념들과 투영들과 바람들,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기대들, 우리가 만든 정의들과 이론들, 우리의 이야기들과 신화들의 세계, 우리의 ‘가벼운 믿음‘ 등에 짓눌려 있었을지 모른다. 아마 우리는 아직 그 모든 것에서 우리 양을 한껏 채우지 못해 더 많이 바랄지도 모른다. "이복잡한 삶에서 우리에게 더 많은 신앙, 더 많은 확신과 약속을 주십시오!" 하고 말이다.

세속적 낙관주의(‘진보’를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계몽주의 신앙)의 순진함과 그 실패에 관한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나는 그보다는 ‘종교적 낙관주의’에 더욱 반대하는 견해다. 속임수 같은 ‘하느님과의 흥정’ 가능성과 사람들의 불안을 활용하여 복잡한 문제들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신실한’ 대답들을 제시하는 안일한 신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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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길에 들어서려면 우리 자신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는 법을안다는 것은 도망치거나 자신을 소외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탈출을 감행하는 사람은 공간보다 시간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시간은 자신을 열어 영원이라는 지평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시간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 속 여행에도 함정이 없진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공간과 시간을 혼동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차원에서 자신에게서 ‘탈출‘했다고 믿습니다. 물론시간은 언제나 하느님께 속해있지만 말입니다.

시간을 ‘하느님의 메신저‘라고 한 성 피에르 파브르saint Pierre Favre, 1506-154626가 떠오르는군요.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에도 소유의 영역을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순간을 절대적이고 무언가 결정적인 것인 양살아냅니다. 그럼으로써 시간은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우리만 있습니다. 이것은 순례자의 길을 가장한 행정 사무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동하지만, 결국 우리의 왕국 속에 정착한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가 앞을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한 공간은 사실은 우리를 가두는 미로일 뿐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리아드네가 언젠가 우리를 풀어주기를 막연히 기다리면서 목적 없이 우리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것입니다.

롯은 좀 더 나은 땅을 차지했지만, 땅과 더불어 좋지 않은 것도 물려받았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창세 13,13 롯의 부인도 공간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부인은 ‘떠나법을 몰랐기에 뒤를 돌아보았고, 결국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19,26

뒤를 돌아보는 것은 기억을 통해 ‘정착‘하려는 또 다른 시도입니다. 사실 기억은 악하게 변질되기 십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은총으로 뽑아주신 것을 끊임없이 기억하지신명5.15; 8,2-5; 32,7 않거나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일상에서 기념하지루카22,19; 1코린 11,24-25 않는다면, 기억은 뒤로 돌아보게 유혹하는 그리움으로 변질됩니다. 그리고 이 뒤돌아봄은 주님 안에서 유목민이 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수많은 불평이 생겨나는 근원이 됩니다.

우리 마음을 건드립니다. 기도를 통해 바뀌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순종하고 포기하면서 변화하니까요.

기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하던 하느님이 아니라 ‘참 하느님이 어떤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말없이 성장해 하느님의 신비 앞에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무엘기 하권 15 16장이 서술하는 망명자 다윗의 모습을 보며우리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 내맡긴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 중인 다윗이지만왕인 그의 겸손이 눈에 띕니다. 특히 그의 도망에 시종일관 동반되는거룩한 분위기에서 그의 권위가 느껴집니다. 그는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포로들처럼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을 완전히 맡긴 채 마치 예배행렬에 참여라도 하는 양 침착하게 행동했습니다.

이 망명은 도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라리 충직한 신하들의 충성파, 자신의 권위를 강요하지 않는 임금의 품위가 드러나는 속죄와 예배의 길입니다. 다윗은 백성을 인도합니다. 백성 가운데 어떤 이들은그를 따르게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자유의사로 집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런 행동은 통제‘가 아니라 지휘입니다.

다윗의 망명은 신중했습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고, 자신이 처한상황의 한계를 인식하고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현실화 되도록 애를 썼습니다. "그대들이 나에게 소식을 보낼 때까지 나는 광야의 길목에서 기다리겠으니 그리 아시오."15.28 필요한 만큼만 후퇴합니다. 그는 하느님 안에서 물러날 줄 알았고, 하느님께 자리를 내드릴 줄 알았습니다. 그의 전략은 예수님이 자신의 ‘때‘가 시시각각 다가오던 바로그 순간 취하신 전략과 비슷했습니다.

유혹이 어떻게 자신을 공격했는지, 외적 힘이 자신을 얼마나 속박했는지를 말합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외적인 방해에만 정신이 팔려 기도는 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의 종이 아니라 희생자의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순교 성인으로 들어높여 우리의 한계를 시성식의 향 연기로 가리는 법을 배웁니다. 곧 우리 자신의 거룩함의 향내로 우리의 나약함을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자유란 아버지의 계획넘겨짐을 받아들여 그분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위엄은 ‘자유와 ‘포기‘라는 바탕 위에 세워집니다. 얼핏 보면이 두 개념은 서로 상반되어 보입니다. 자유는 결정 능력을 뜻하고, 포기는 결정을 상대방의 손에 맡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유의깊은 뿌리는 자발적인 포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실패는 이러한 역학의 일부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곁에아무도 없는 그때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마태 26,31)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활의 힘으로 개입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아닙니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아 절망의 나락에떨어졌을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아버지의 권능이 드러나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실패의 길을 받아들인사람을 주님으로 선포하는 하느님의 개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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