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ween life and death there is a library,‘ she said. "And withinthat library, the shelves go on for ever. Every book provides achance to try another life you could have lived. To see how thingswould be if you had made other choices ... Would you havedone anything different, if you had the chance to undo yourregrets?

Do you ever think ‘how did I end up here?‘ Like you are in a mazeand totally lost and it‘s all your fault because you were the onewho made every turn? And you know that there are many routesthat could have helped you out, because you hear all the peopleon the outside of the maze who made it through, and they arelaughing and smiling. And sometimes you get a glimpse of themthrough the hedge. A fleeting shape through the leaves. And theyseem so damn happy to have made it and you don‘t resent them,
but you do resent yourself for not having their ability to work it allout. Do you? Or is this maze just for me?
Ps. My cat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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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에는 수백만 개의 결정이 수반된단다. 중요한 결정도 있고, 사소한 결정도 있지.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때마다 결과는 달라져. 되돌릴 수 없는 변화가 생기고 이는 더 많은 변화로 이어지지. 이 책들은 네가 살았을 수도 있는 모든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야."

나는 결코 되고 싶은 사람이 다 될 수 없고, 원하는 삶을모두 살아볼 수도 없다. 원하는 기술을 모두 배울 수도 없다. 그런데도 왜 그러길 바라는가? 난 내 삶에서 일어날 수있는 정신적 육체적 경험의 모든 음영과 색조와 변주를 살아내고 느끼고 싶다.

"네가 죽음에게 가는 게 아니야. 죽음이 널 찾아와야 해"
보아하니 노라는 죽는 것도 제대로 못 한 듯했다.
익숙한 감정이 밀려왔다. 모든 면에서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느낌이었다. 미완성된 인간 퍼즐, 불완전한 삶과 불완전한 죽음.
"그럼 왜 제가 안 죽은 거죠? 왜 죽음이 제게 오지 않았죠? 전죽음에게 초대장을 보냈어요. 죽고 싶었다고요. 하지만 아직 살아서 여기 있어요. 여전히 사물을 인식하고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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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다 보면 부정하고 싶은, 지우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모여 오늘의 내가 되었다. 부정하고 싶은 순간을 부정한다는 것은 오늘의 나를 부정하는 일이다. 자기를 부정하면 시기심에 사로잡히고, 시기심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기보다 뛰어난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된다. 행복할 리 없다. 부정하고 싶은 순간을 부정하고픈 자기 자신을부정하고 넘어서는 이가 바로 초인이다.

하지만 초인은 단 한 번의 넘어섬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느새 부정하고 싶은 순간을 부정하고픈 자기로 돌아가기때문이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자기 부정의 태도를 끊임없이넘어서는 게 초인이다. 우리는 자기를 부정하려는 자기와 자기를 긍정하려는 자기 사이의 끊임없는 겨룸과 혼돈 속에서살아간다. 초인의 끊임없는 넘어섬은 끊임없는 초기화와 같다. 늘 처음처럼 새롭게 태어나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다. 폭발하지 않는 별은 빛나지 않는다. 춤추는 별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자기 긍정으로 빛난다. 결국 끊임없이 넘어서는 초인 사상과 끊임없이 돌고 도는 영원회귀 사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은 자기의 모든 운명을 사랑하라는 운명애의 메시지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며, 어떻게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이고 철학적인 지침이다.
이것이 삶이던가.
좋다, 다시 한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태초의 아담과 이브로 돌아가 선도 악도 모른 채마냥 행복하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금지된 선악의 열매를 따 먹지 않는 이에겐, 자유의 독배를 삼키지 않는 이에겐 방황도 성장도 자유로운 삶도 없다. 초콜릿처럼 너무 달콤해서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악마의 입술에 입 맞추고, 매혹적에
인 위스키처럼 너무 달콤해서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독이 든성배를 목 깊숙이 들이켜는 삶, 내 몸 마음 영혼까지, 내 마지막 춤과 내 차가운 숨까지도 다 바치게 하는 삶은 그에겐 없다. 우리를 방황하게 하고 성장시키는 자유의 유혹도 자유로운 삶도 없다. 피도 땀도 눈물도.

자유는 선과 악을 넘나드는 저주받은 은총이다.
자유의 독배를 삼키지 않는 이에겐방황도 성장도 자유로운 삶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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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두려워하지말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불행하고,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두려움에는 늘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이런 감정들99을 따로 떼어 놓고 볼 수는 없는 법이다."
마르탱 파주 ‘완벽한 하루 중에서

나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 있는,
애매한 사람들이 궁금하다. 세상은 아주 밝거나 지나치게 어두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우울을 이해하지 못했던 주변의 반응이 떠오른다. 도대체 어떤 모습과 상황이어야 이해받을 수 있을까. 아니 이해의 영역이긴 할까? 아무쪼록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혹은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네‘라는 감상이 남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내게 믿음을 줬다. 오늘 하루가 완벽한 하루까진아닐지라도 괜찮은 하루일 수 있다는 믿음, 하루 종일 우울하다가도 아주 사소한 일로 한 번 웃을 수 있는 게 삶이라는 믿음. 또 내 밝음을 드러내듯이 어두움을 드러내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예술을 한다. 그 어떤 사심도 없이 누군가의 마음에 공들여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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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상의 공간들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관계성을 형성합니다. 저는 건축을 통해 표면의 미학적 가치뿐 아니라 그 이면의 사람들이 만나는 방식에 대한 틀을 깨고 싶습니다. 건축을 통해 좀 더 새로운 관계와 가치가생겨나고, 일상의 무대가 되는 공간들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건축은 결국 관계성의학문입니다. 그것이 가진 힘은 막강합니다. 좋은 건축과 도시는분명 우리들의 삶과 사회를 보다 창의적이고 개방되게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각기 다른 장점만큼이나 각기 다른 약점을 지니고 있다. 나는 개인의 개성은 장점이 아닌단점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라 본다. 단점이 치명적이고 복잡할수록 그만큼 발휘되는 개성은 남들과 차별화될 잠재성이있는 것이다. 나는 수많은 제약을 사랑한다. 제약이 많으면 많을수록, 꼬여 있으면 꼬여 있을수록 매력적인 프로젝트의 충분조건이 갖춰진다. 영화계 거장 오손 웰스orson Welles는 예술의 적敵

…쉬지 않고 계속 지었습니다. 돈은 빌릴 수 있지만 시간은 빌릴 수도, 갚을 수도 없다는 생각으로 마구 지었습니다.
역경을 겪고 있을 때일수록 그 반작용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일이 안될 때는 일을 더욱 벌이고, 반대로 잘될 때는 일을 더 가다듬어야 했다. 견디기 힘들 때일수록 투지를 왕성하게함으로써 난관을 극복하려는 자세였다.

나의 이력에서 당신이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이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도 포기하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는 타고난 완강함일 것이다. 삶에서 ‘빛‘을 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눈앞에 현실이라는 ‘그늘‘을 직시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용기 있게 전진해야 한다. 인생의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다. 참된 행복이 적어도빛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빛을 가늠하고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몰입의 시간 속에 충실한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 (안도 타다오)

좋은 건축이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공간을 제공하고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이 창조적으로 채워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비로소 집을 통해 새로운 가족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활동 공간인 ‘틈‘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이란 한자로 사이 간間에 해당한다. 즉, 건축은 인간人間이 앞으로 보낼 시간時間을 위한 공간空間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사람들 사이의 틈‘, 시간은 ‘순간 사이의 틈, 공간은 관계 짓기를 위한 틈이다

그들에게 복원이란 일차원적 원형의 재현이 아닌,
대상의 현재 의미를 되살려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고 오래된 가치와 지혜롭게 공존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움을통해 과거를 포용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혁신적인 발상 자체가 건축에 있어서 프랑스의 고유한 전통이 아닐까생각한다.

옥상은 자연, 경관과 문화, 공동체의 가치를 배양하는 장소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지난 세월 숨 가쁘게 도시가 개발되면서마당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우리에게 그것은 만남과 소통, 사유와 휴식의 소중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사라진 마당의 기능을다시 옥상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삭막한 도시에서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해내는 하늘 마당이 될 수 있다. 옥상의 적극적개방과 활용은 시민의 일상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는 ‘마당‘이라는 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관혼상제의 의식을 치렀다. 마당은 사유지가 아닌 공유지였으며, 이상적으로 이웃과 만나고 소통하는 커뮤니티 공간이었다. 삭막한 도심에서 옥상은 마당처럼 일상성을 회복하고 공동체 정신을 북돋는 희망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또한 친환경적 측면에서 태양광과 빗물을 저장하고 텃밭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부수적인 가능성도 지닌다.

우리는 특이하게도 집을 만든다"고 말하지 않고 짓는다‘고말한다. 집 말고 우리가 짓는 것에는 밥, 농사, 시 등이 있다. 이들을 짓는다고 표현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뚝딱뚝딱되풀이해서 만드는 것과 달리 짓는 것은 이러한 행위가 우리개개인의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는 중요한 창조이기 때문이다.

건물에서 물이 새는 것은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감기‘ 와도비슷하다. 환자는 괴롭겠지만 감기는 의사의 문제라기보다는간단한 처방으로 치유 가능한 문제이다. 누수뿐만 아니라 단열,
차음 같은 것들만을 좋은 집의 절대조건으로 친다면 우리 건축문화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집이란 통풍, 채광, 조망도 중요하다. 물론 사는 이의 안락함과 디자인의 심리적 측면도 간과할 수없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의 조화 속에서 좋은 건축은 만들어진다. 문명의 편의성이라는 함정 앞에 전문적 요소에만 집착하

안방, 건너편에 있으므로 건넛방, 문간에는 문간방이 있다. 화장실도 뒤에 있어 뒷간으로 불렀다. 그러나 기능주의**에서는 철저히 그 목적에 따라 공간의 이름이 정해진다. 거실, 침실,
식당, 화장실 등이 그러한데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공간에는소파나 침대, 식탁 등의 특정 사물이 늘 자리를 채우고 있다. 우리는 정해진 목적에 따라 거실에서는 소파에 앉고, 침실에서는 잠을 자며, 식당에서는 식사를 한다. 요소화된 기능을 가진 방이 우리 삶의 형태를 미리 규정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한옥의 방들은위치에 따른 이름만 있을 뿐 정해진 목적이 없으니 방안에 정해진 가구도 없다. 그저 밥을 먹고 싶으면 밥상을 가져와 식당으로쓰면 되고, 탁자를 놓으면 서재가 되며, 요를 깔면 침실로 변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간에 대한 이 같은 자유로운 쓰임이 본능처럼 남아 있는 한국인들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소파나 침대를등받이로 쓰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따듯한 온돌에서 가능했던좌식에 대한 본능 때문일까?

20세기, 우리의 삶은 기술 진보에 의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편리해졌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편리함이나 효율성에의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기능이라는 개념에 의해 요소화 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지속 가능한 관계는 절대 편리함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이러한 효율과 편의성 우선주의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우리는 그간 많은 것들을 상실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반대편에 우리의 집‘에 대한 고유한 가치가있다. 우리는 방의 이름을 기능이 아닌 ‘위치에 따라 정했다. 안에 있어 안방…

부분적인 불편함, 기분 좋은 불편함은우리를 더 창의적으로 만들고, 다양한 행위를 창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 생각해보면 건물의 용도는 늘어느 특정한 시점에 당시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일뿐, 좋은 건축은 단순하게 기능이 형태를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태가 미래의 새로운 기능을 유발하는 것이 보다 지속 가능한 퍼포먼스의 건축이라 하겠다.

좋은 건축은 말이 필요 없고, 말로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있다. "제대로 된 화가가 되고 싶다면 먼저 혀를 뽑아버려야 한다. 그래야 전달하고 싶은 것이 오로지 붓질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 될 테니." 화가 앙리 마티스Heni Matisse가 1942년 어느라디오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하는 것은 어제 했던 방식을 또다시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함께 작업했던 이들로부터 전해지는 그의 창작 태도는 여전히 깊은 울림을 남긴다. 우리가 사물을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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