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리고 지혜를 쥐어짜서 떠올려보라고, 중심이 여러 개 있고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그렇게 진지하게 피나는 노력을 하고서야 비로소 조금씩 그게 어떤 것인지 보이거든."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당연하지." 노인은 무슨 단단한 것이라도 뱉어내듯이 말했다.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치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게 하나라도 있는가." 그러고는 행을 바꾸듯 간결하게 헛기침을한 번 했다.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크림?"

"인생의 크림." 그가 말한다.
내가 말한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빠져나갈 때처럼."

어떤 것인지 대충 알겠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다보면 다시 알 수 없어졌다. 그러기를 되풀이한다. 아마 그것은구체적인 도형으로서의 원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원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언가에 깊은 연민을 느끼거나, 이 세상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거나, 신앙(혹은 신앙 비슷한 것)을 발견하거나 할 때,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그 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되는 게 아닐까 ㅡ 어디까지나 나의 막연한 추론일 뿐이지만,자네 머리는 말일세,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모르는걸 어떻게든 알아내라고 있는 거라고,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크림이 되거든.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이지. 백발의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가을이 끝나가는 흐린 일요일 오후, 고베의산 위에서. 그때 나는 작고 빨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지금도 여전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 특별한 원에 대해, 혹은 하찮고 시시한 것에 대해, 그리고 또 내 안에 있을 특별한 크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볼 줄 알았어 - 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살던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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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필리프 J. 뒤부아 외 지음, 맹슬기 옮김 / 다른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새들의 삶에는 우리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소멸과 재생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털갈이가 바로 그 예다. 원래 있던 깃털이 빠지는 이유는 더 아름답고 튼튼한 깃털을 얻기 위해서다. 새들은 이렇게 해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법을 배운다. 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재생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재생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소멸하도록 놔둘 줄 알아야 한다. 새들처럼 말이다. 낡은 깃털을 건강하게 빛나는 새 깃털로 바꾸기 위해 새들은 소멸을 받아들인다. 사실 털갈이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완벽한 깃털 없이 새는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털갈이처럼 과거의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발전할 수 없다.

Eclipse4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빈 시간을 가리키는 멋진 표현이다. 새들은 소중한 깃털이 새로 자라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신중한 태도로,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하며, 고요를 흐트러뜨릴 수 있는 움직임은 자제하며, 그렇게 새는 기다린다. 인내한다. 재생이 일어나고 마침내 힘과 아름다움을 되찾을 때까지.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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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과 삼손의 위기는 긍정적인 ‘멈춤‘입니다. 그 멈춤은 이탈리아어로 ‘베네세레 benessere‘라고 하는 세속적인생각, 자기중심적인 자기만족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기때문입니다. 방종한 삶은 불임의 원인입니다. 오늘날 많은 서구 국가가 겪고 있는 인구통계학적 위기는 이기적인행복에 만족하는 문화의 결과입니다. 베네세레‘의 사전적의미는 ‘안녕‘으로, 바람직한 단어처럼 들리는데, 이 단어가 우리가 어떻게든 벗어나야 할 상태를 뜻하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가 솔로몬과 삼손의 운명에서 얻을 수 있는 주된 교훈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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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필리프 J. 뒤부아 외 지음, 맹슬기 옮김 / 다른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기차로 바뀌면서 도시는 한결 조용해지고 그제야 사람들은 새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새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광고는 짧은 영상으로 도시의 소음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이 되어서야 도시의, 그리고 외부의 모든 소음보다도 내 머릿속에서 쉼 없이 부대끼는 온갖 생각이 더 큰 소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거리에서 새소리를 듣지 못한 진짜 이유는, 그리고 봄날 아침마다 나를 깨우던 새끼 새들의 울음소리를 단 한 번도 기분 좋게 듣지 못한 이유는, 나를 꽉 채우고 있는 마음속 소음 때문이라는 것을.

우습게도 그동안 주변에 그렇게 많은 새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리고 어느 날은 새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새의 존재를 생생히 느낄 때마다 바깥으로만 뻗어나가던 마음과 수많은 생각이 순간 정지하더니, 초점이 내면으로 향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목적 없이 저 새를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새도 그리고 나도 그저 이렇게 더할 나위 없이 가장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명상이 시작되었다. 이 책의 작가들이 강조한, "새는 언제나 현재를 산다"는 교훈을 경험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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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이른 아침마다 책을 읽는다. 최선을 다해 사수하는 매일의 피크닉이다. 본격 근무가 시작되기 전에 이일과를 누려야 하루를 좋은 마음으로 보낼 수 있다. 좋은마음이란 내게 부과된 업무량에 괜히 억울함을 품지 않는상태다. 쉬지 않고 일을 하면 나는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이 된다. 그때의 내 모습은 정말 최악이다. 그러므로 눈 뜨자마자 소풍 가는 기분으로 책이랑 노트를 챙겨서 집을 나선다. 머리는 안 감는다. 동행자는 없다. 걸어서 삼십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예술의 핵심은 하나뿐인 이야기를 내어놓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러지 않으려 싸우겠다는의지를 내보이는 데 있다"고, 맥스웰은 만나보지 못한 등장인물이 되어서 그의 시선으로 본 세계를 상상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저 인물에서 이 개로, 이 개에서 저 양으로, 저 양에서 이 밭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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