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대부분의 경우 그보다 훨씬 거대한 망각의 잔여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지은 분더카머 안에는 결코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예술 작품의 원형이나 고도로 완성된 지적인 사유의 언어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언뜻 보면 무가치한, 부서진, 깨진, 닳은, 기원과 이름을 모를,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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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진부한 말로 형용할 때의 무심함, 또는 난감함, 그러나 어쩔 수 없음. 이에 대해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아도라블: 사랑하는 존재를 향한 자신의 욕망의 특수성에 명칭을 부여하는 데 도달하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진 주체는 약간 바보 같은 이 단어에 귀착한다. 아도라블해!" […] 사랑이 "사랑해"의 동어반복을 피할 수 없듯, 나는 "adorable"을 그저 아도라블이라 번역하는 수밖에는. 동어반복을 피하기는커녕 이것이야말로 내 능력으로 가능한 최선의 번역이기에. 모든 번역은 결국 동어반복이기에. 검은 숲은 슈바르츠발트이기에. 번역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경이로운 동어반복으로 우리는 타자의 언어를, 타자를, 사랑하게 되기에. 그리하여 마침내 생의 한 시점 그것을 향해 가고 그것과 있게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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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더카머를 재해석하는 현대의 몇몇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분더카머는 개별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겪어온 고유한 역사와 기억의 진열실이자 마음의 시공간의 상징체다. 기억이란 대부분의 경우 그보다 훨씬 거대한 망각의 잔여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지은 분더카머 안에는 결코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예술 작품의 원형이나 고도로 완성된 지적인 사유의 언어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언뜻 보면 무가치한, 부서진, 깨진, 닳은, 기원과 이름을 모를,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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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라는 게 그랬다.
지루하리만치 느리게 다가와도
일단 마음에 꽂히면 확 퍼진다.
내가 찾은 게 아니라 진리가 날 발견한 거다.
순식간에 내 마음 물들인 거다.
의미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나의 희로애락은 사라질 것들에 묶여 있었다.
없어질 것들 때문에 염려했다.
있는 것은 사라질까봐, 없는 것은 나타날까봐 두려워했다.
사라져가는 존재로서 사라져갈 많은 것들을 사랑한 거다.
아아, 그게 내 마음의 사슬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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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 사제의 밤 - 불확실한 시대의 신앙
토마시 할리크 지음, 최문희 옮김 / 분도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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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고 ‘굳건해 보이는 신앙이 사실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굳어 있으며 부풀려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신앙에서 유일하게 위대하고 굳건한 것은 절망의 불안을 감추는 방탄 갑옷‘뿐이다. 물러서지 않고 십자가의 불길을 통과한 신앙은 어쩌면 자신의신원이라 여기는 것 또는 자신에게 익숙했던 것을 상당 부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 신앙이 새로 무르익게 되었음은 그것이 더 이상 갑옷‘
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신비가들이 말하는 벌거벗은 신앙‘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그 신앙은 공격적이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조바심 낼 일은 더더욱 없다. 물론 ‘위대하고 ‘굳건한 신앙에 비교하면 그것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것이다. 어쩌면 겨자씨 한 알처럼 무無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방식이 바로 그러하다고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은 존재들의 세상에서 ‘무‘無이시다. 하느님은 존재들 가운데 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만나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무언가가 되고자 한다면, 곧 무언가를의미하고, 무언가를 소유하며, 무언가를 알고자 하며, 한마디로, 사물들의 세계와 각각의 존재들에 집착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만나는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신앙도 무언가의 속성을 지닌 많은 것들, 곧 우리의 개인적 개념들과 투영들과 바람들,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기대들, 우리가 만든 정의들과 이론들, 우리의 이야기들과 신화들의 세계, 우리의 ‘가벼운 믿음‘ 등에 짓눌려 있었을지 모른다. 아마 우리는 아직 그 모든 것에서 우리 양을 한껏 채우지 못해 더 많이 바랄지도 모른다. "이복잡한 삶에서 우리에게 더 많은 신앙, 더 많은 확신과 약속을 주십시오!" 하고 말이다.

세속적 낙관주의(‘진보’를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계몽주의 신앙)의 순진함과 그 실패에 관한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나는 그보다는 ‘종교적 낙관주의’에 더욱 반대하는 견해다. 속임수 같은 ‘하느님과의 흥정’ 가능성과 사람들의 불안을 활용하여 복잡한 문제들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신실한’ 대답들을 제시하는 안일한 신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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