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독서 - 한 권의 책이 리더의 말과 글이 되기까지
신동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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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전 《사기》의 <손자오기열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日子也,而將軍自吹其疽,何爲"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들이 졸병인데 장군이 몸소 아들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주었소. 어째서 우는 것입니까?" 울 필요가 없는데 왜 우느냐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장군의 행동에 감격해 전쟁터에서 죽기 살기로싸우다가 죽을까 봐 운 것입니다. 사마천은 장군 오기의 훌륭한행동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남편을 잃고 자식까지 잃을까 걱정한 부인의 안타까운 처지가 행간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영웅담에는 항상 스스로의 운명을 빼앗긴 평범한 사람들의 비극이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표현한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고,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카잔차키스는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한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세계가 지금 위기라고 여기는 것들은 평범한 삶이 해결해야할 것들이다. 작은 행동이 쌓여야 변화할 것들이다. 이제까지 국가가 하지 못한 것, 정치가 쫓아가지 못한 일을 더는 그들에게맡겨 놓을 수 없다. 매일 아침 대지에 발 딛는 것은 평범한 우리다. 권력 따위 지옥으로나 보내 버려! 의견이 다른 이들이 바로평범한 ‘나‘이고, 이웃이다. 당신의 춤판에 내가 먼저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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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정독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감명을 받았다. 아무것도 없는 독방에서 인류의 미래를 설계했다. 부수고 다시 짓는.
즐거운 상상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지침서였다.
-김대중, <21세기는 누구 것인가?>, <김대중 자서전 2》, 삼인, 2010《제3의 물결》은 김 대통령 자신뿐 아니라 이 나라에도 희망을 줄 책이었다. 특히 ‘아주 불행한 시기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다른 세계‘였다.
그로부터 17년이 흘러 사형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다. 세계는 이미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김 대통령은 더 큰 꿈을꾼다. 한국을 지식과 정보의 강국으로 만들고 싶었던 오래된 꿈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취임사에서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지식정보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한다. 세계에서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로 만들어 정보 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1998년 12월 21일에는 정보통신

문재인 대통령은 한 인터뷰에서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걸좋아한다고 말했다. 오랜 변호사 생활로 드러낼 기회가 없었지만, 문 대통령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도스트옙스키의 《죄와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의 필독서 목록에서 언제나빠지지 않는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입장, 시대의 절망과희망을 일찍부터 간접 체험해 왔을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원칙이 그 안에서 자랐고, "사람이 먼저다"라는 좌우명 역시(대통령을 염두에 두지 않은 삶이었음에도) 시공을 넘나드는 사람들과의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싹텄을 것이라 짐작한다. 어떤 삶이든소중히 여기며 권위주의를 내려놓은 지도자의 모습은 아직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 여행을 떠나는 총리는 기차역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역장은 기쁘겠소라는 인사 한마디만을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열고 들어가더란다. (...) 그 중립국에서는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

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 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신동엽, <산문시 1> 부분, <신동엽 시전집》, 창비, 2013

안《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필로그에서 알료샤가 소년들에게 남긴 믿음과 희망의 근거가 떠오른다. 알료샤는 "우리 마음속에 단 한 가지라도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우리의 구원을 도울 것이라 했다. "자기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선량하고 훌륭했는지만은 감히 마음속으로 비웃지 못할 것이라 일렀다.

導冻당신이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이유는 불행한 때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다른 세계를 갖고 다니는 것과 같다.
-오르한 파묵, 《다른 색Öteki renkler》,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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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함‘은 오늘날 우리의 핵심 욕망이다. 인위적인 외부 소음,
갈등하는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패션에서 조용한 럭셔리, 일에서 조용한 사직, 조용한해고, 조용한 고용, 조용한 휴가, SNS에서 조용한 숏폼, 여행에서 조용한 여행, 스텔스 캠핑, 리더십에서 내향적 리더, 경제에서 내향성 경제 등이 조용하지만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라이프트렌드를 바꾸고 있다.

밖에서 하는 사회 활동이나 모임, 야외 활동이 줄어드는 반면 집안에서 하는 콘텐츠 소비는 늘어난다. 유튜브나 틱톡에서 더 많은 영상을 보고,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외식을 하기보다 배달 음식을 더 많이 시켜 먹고, 회식은 꺼리지만 혼술은 즐긴다. 온라인 게임, 웹툰, 온라인 쇼핑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쓰고, 사람보다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로봇에 대한수요와 지출이 더 많아질 것이다. 자기계발, 건강, 안티에이징, 패션 등개인을 둘러싼 다양한 영역에서 내향성 소비의 특성이 반영되는 이슈들이 계속 등장하고 새로운 유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는 시장과 뜨는시장, 지는 소비 트렌드와 뜨는 소비 트렌드를 분석할 때, 공교롭게도외향성 소비와 내향성 소비로 구분해서 보면 꽤 많은 것이 설명된다.

하지만 이제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이 미국의 소비와 내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엘리슨 슈래거의 주장이다. 그 근거로 든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의 전체 소매 쇼핑 중 온라인 쇼핑의 비중이 계속올라가고 있으며, 뉴욕 레스토랑의 오후 5시 30분 예약률은 급증한 반면 오후 8시 예약률은 감소했다. 공교롭게도 두 시간대의 증가와 감소를 합치면 거의 제로가 된다. 즉 8시에 예약하던 사람이 5시 30분으로약속시간을 당겼다는 의미다. 8시 예약 시 식사와 함께 술자리까지 하

산업 사회와 달리 지식 정보 사회에서는 내향적인 사람의 역할이갈수록 중요해졌고, IT 산업을 이끈 창업자이자 테크 리더 중에는 내향적인 사람이 많았다. 내향적인 사람은 앞으로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유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혁신하는힘은 활발한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실행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어릴 적 내향적인 성격에 대부분 집에서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그는 방에서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외향적인 어머니는 이를 문제가 있다고 보았는지 심리 상담이 필요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어머니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빌 게이츠는 성공 비결로 자신의 내향적 성격을꼽기도 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는 영업력이나 인맥, 정치력으로성공한 것이 아니다. 둘 다 내향적이지만 새로운 도전 앞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없었던 독보적이고 탁월한 기술과 제품을 만들어 성공할 수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시가 총액 세계 1, 2위에 오르는 회사를 창업했다.

조용한 럭셔리나 스텔스 웰스 둘 다 영국 부자들의 기본적 소비 태도였고,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부자들의 소비에 위화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초호화 저택을 짓거나 말도 안 되는 비용으로 결혼식을 치러도 ‘위화감을 느낀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 관심이 없다. 부자가 자기 돈으로 무엇을 하든 신경도 안 쓴다. 그냥 그들만의 리그로 여기고 그만이다. 사실 사람들은 타인과 비교를 하면서 불행해진다. 하지만 부자도 타인과 비교 우위로 과시하려 들지 않고, 서민도 타인과 비교하며 위축되지 않는다면 부의 양극화가 물질적 차이로만 다가올 뿐 정신적·심리적 차이로까지 다가오지는 않을 수 있다

조용한럭셔리와 스텔스 웰스에 대한 관심은 올드 머니old Money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고, 올드 머니가 그동안 누려왔던 패션, 인테리어, 운동,여행, 취미를 비롯해 의식주와 라이프스타일 전반이 새로운 트렌드의욕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새롭게 부자가 된 사람들이 먼저 올드 머니의 라이프와 소비를 따라갔고, 지금은 실제로 부자는 아닌 20대가 올드머니 스타일을 따라가고 있다. 올드 머니 트렌드는 미국의 2세대가먼저 시작해 전 세계로 번져가 메가 트렌드로 계속되고 있다. 패션에서만 유행했으면 금세 열풍이 꺼졌을 텐데 인테리어, 여행 스타일, 운동으로 계속 확산되고 단독 주택, 고급 가구, 고급 식자재, 기부 등 의식주와 삶의 방식 전반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올드 머니는 트렌드를 넘어 문화로 자리 잡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휴가와 일은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런데 ‘조용한 휴가Quiet Vacation-ing‘는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치 휴가를 가 있는 것 같은 상황을 일컫는다. 원격 근무 또는 하이브리드 워크를 하는 직장에서 가능한 조용한 휴가는 엄밀히 휴가를 따로 신청하지 않았지만 휴양지나 집에서 최소한의 일만 소극적으로 하면서 마치 휴가를 보내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근무 중이지만 몰래 쉬는 셈이다. 이렇게 요령껏 쉴수 있는 것은 원격 근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들과 직접 마주하지 않고 회사의 메시징 플랫폼에서 소통하며 근무 시간동안 일하고 있다는 흔적만 보여주면 실제로 일하는지 노는지 알 수가없다. 사실 이런 방법의 원조는 외근 나간다고 하면서 사우나 가거나아예 놀러 다니다가 조기 퇴근하는 것일 것이다. 출근해서 사무실 의자에 재킷 걸어두고 컴퓨터 켜놓고 책상 위에 일거리를 펼쳐둔 채 나가서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며 한두 시간 허비하거나, 심지어 하루 종일 밖

세계적 가전 전시회에서 ‘스텔스가전‘을 수년 사이 계속 선보이고 있다. 점점 화면 사이즈가 커진 TV는 집에서 큰 공간을 차지한다.
아무리 얇아져도 사각형의 검은 화면은 실내 공간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평소에는 안 보이다가 필요할 때만 화면이 나오는 TV, 벽에 걸어둔 대형 그림이나 사진 액자처럼 평소에는 아트 작품처럼 보이는 TV다. 냉장고도 주변 벽이나 벽지와 색상을 같게 하고,문손잡이도 없애서 냉장고가 아니라 그냥 벽이라고 인식하게 만든다(필요시 음성 인식으로 문을 여닫을 수 있다). 가전과 가구의 결합도 많다.

테이블처럼 생겨 위 판은 테이블로 쓸 수 있는데 아래는 냉장고인 제품도있고, 테이블과 공기청정기가 결합된 제품, 테이블과 스피커가 결합된제품, 천장 조명이 빔프로젝터도 되고 스피커도 되는 제품도 있다. 크고 고가의 가전제품일수록 집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보니 디자인이 중시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있는 듯 없는 듯 잘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진화 중이다. 아무리 가전이 생활필수품이라고 해도 집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이렇듯 조연처럼, 때로는 엑스트라처럼 존재감을 지워가는 것이 스텔스가전이다. 기능은 그대로이나 우리 눈에 두드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스텔스 가전 덕분에 좁은 공간이 더 넓어보이기도 하는데, 일본에서 유독 스텔스가전 시도가 많다. 한국에서도1인 가구 증가나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 증가가 스텔스가전에 대한 수요로 이어지는 배경이 된다.

하지만 캠핑카가 늘어나면서 해수욕장이나 캠핑장에서 논란이 되는 일도 많아졌다. 전망 좋은 해변이나 산 가까운 도로변, 무료 공영주차장에 장기 주차하는 캠핑카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을 만큼 캠핑카에 대한 시선도 곱지 못하게 변했다. 그래서 대형 캠핑카보다 일반 차량을 내부만 개조해 조용히 티 나지 않게 캠핑하려는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을 ‘스텔스 캠핑카‘라고 부른다. 캠핑은 좋지만 굳이 남의 시선을 끌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렇듯 카페, 서재, 술집 등에서 대화 금지, 침묵을 콘텐츠화하고있다. 갈수록 혼밥, 혼술, 혼커, 혼영, 혼여 등 혼자서 하는 활동이 늘어가고, 타인과의 관계나 교류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을 원하는이들도 늘어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타인의 대화는 소음일 뿐이다. 소음 없이 자신에게 집중하며 커피 마시고 술 마시고 음악 듣고 책 읽고사색할 수 있는 기회는 ‘돈을 내고서라도 이용하는 서비스가 되어버린 시대다. 소음이 기본값인 시대에 침묵은 돈이다. "침묵은 금"이라는격언과 의미는 살짝 다르긴 해도 결과는 같아졌다. 침묵을 돈으로, 금으로 만드는 비즈니스는 계속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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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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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국어학자 역할은 이렇습니다.
앞장서서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뒤쫓아 가면서 확인하는거죠.
다만 그 방향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면
"이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선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제 생각이 틀렸고 사람들의 방향이 맞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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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수거‘라는 단어가 ‘위생 관리‘로 바뀌고, 또다시 ‘환경 서비스‘로 바뀌었죠. 그리고 ‘변소‘는 ‘욕실‘과 ‘세면실‘을 거쳐
‘화장실‘로 바뀌었고, ‘깜둥이‘가 ‘흑인‘으로, 그리고 ‘아프리카계미국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단어 혹은 용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가는 현상은 사회, 문화, 그리고 기술의 변화를 반영한다.
언어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언어 변천을 견인하는 요인들 중에서세대 교체와 기술 발전은 특별히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사회에서 양심이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추는 과정에서 그를 대체한 말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기껏 떠오르는 말은 ‘쪽팔리다‘라는 비속어 정도였다. 충북대 국어국문학과 조항범 교수에 따르면,
이 말은 1980년에 출간된 소설가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에서불량배들이 사용하는 은어로 소개되어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비로소 사전에 등재되었다. "좋지 않은 일로 여러 사람에게 얼굴(쪽)이 알려져 기분이 몹시 상하다"는 뜻인데, 나는 개인적으로인터넷의 보급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느덧비속어와 욕설이 일상어로 쓰이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요즘엔 남녀노소 누구나 ‘쪽팔려‘를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다. 어떤 면에서는 ‘쪽팔리다‘가 양심의 빈 자리를 어느 정도 채워주고 있는 것도

신경철학자 퍼트리샤 처칠랜드(Patricia Churchiland)는 그의 저서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에서 양심은 신이 우리 안에 심어놓은 신학적 실체가 아니라우리의 신경회로망에 뿌리를 둔 뇌의 구성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양심은 절대 확실한 게 아니며, 뇌가 성장함에 따라 함께 발달하고 인정과 불인정에 민감하다. 따라서 "나쁜 습관, 나쁜 친구, 나르시시즘의 시대정신에 의해 뒤틀릴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형이상학적으로 설치된 게 아니라 실험과 경험에 의해 다듬어진다. 따라서 신경세포의 네트워크에 경험의 영향을극대화하려면 태어날 때 신경세포의 연결은 자궁 밖에서 생명을유지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최소한이어야 한다. 신경세포는 경험으로 익힌 바를 부호화할 때 발아하고 확장할 공간이 필요하다.

인간 신경세포의 소형화는 이런 점에서 매우 탁월한 진화적 적응이다. 사회성 포유류는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그 배경에는 양심의 힘이 존재한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룰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명예는 밖으로 나타난 양심이며, 양심은 안에 깃든 명예이다"라고 설명한다. 평생 대학교수로 살다가 난생 처음 국립생태원이라는 국가기관을 운영해 보고 그 경험을 적은 책 《최재천의 생태 경영》에서 나는 "서로 상대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상호허겁相互虛)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평화를 유지하게 만든다. 우리 인간은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이러한 힘의 균형을 깨고 홀로 거머쥐려는 속내를 내보인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관찰해 온 자연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연에서제일 먼저 배울 게 있다면 이 약간의 비겁함이다"라고 적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다. 모두 수시로 제발 저리는 세상을 꿈꾼다. 양심과 명예가 살아 숨 쉬는 그런 세상.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한강 소설 《흰>

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이해하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가왔다고 봅니다. 그냥 머릿속으로 ‘이거 심각한데. 그냥 있다가는큰일 나겠는데‘, 그러고 말 일이 아니라는 거죠. 부디 주변에 알리고 동참해 주길 바랍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이해하면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정말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가 왔습니다."

추격할 때의 전략과 추격을 끝내고 난 다음의 전략이 똑같으면 될까요?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추격했던 나라들은 한결같이응용과학도 잘하지만 기초과학에도 투자를 아낌없이 해왔어요.
그렇기에 선진국이고, 앞서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어느 순간 그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기초과학에 과감히 투자하는 전략을 써야 그 위치를 유지할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여전히 똑같은 전략을 쓰고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끊임없이 쫓아갈 뿐이에요. 우리가이끌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자기 비하를 합니다. "아직 안 돼. 아직 더 따라가야 돼."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상당 부분 따라잡았어요.

이런 생각을 갖는 데는 아마도 노벨상이 가장 큰 이유이지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지요. 일본은 20여 명이 노벨과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일본 과학에 너무 주눅들어 있는 것 같아요. ‘일본은 스무 명 넘게 받았는데 우리는 한 명도 못 받았다, 우리는과연 과학선진국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일본과 한국의 과학 수준이 그렇게 큰 차이가 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생각합니다.

노벨상은 현재 가장 활발하게 연구하고 업적을 많이 내는 연구자에게 주는 상이 아닙니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우리나라 언론은 올해 노벨상을 받을 것 같은 학자들을 소개해요. 저는 매번회의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 학자들은 논문의 인용도가 높아 세계적으로 인정받지만, 노벨상은 그런 사람에게 주는 상이 아닙니다. 노벨상위원회는 학자를 먼저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 상을 줄지를 결정하죠.

예를 들어, 코로나19 백신 관련 분야에 상을 주기로 결정하면, 그 분야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나 최초로 논문을 쓴 사람을 찾아 상을 수여합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신기하게도 그 끝에 종종 일본 학자가 있어요. 일본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오타쿠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의시선에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계속하는 속성을 갖고있어요. 그리고 사회도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이 스무 명 넘게 노벨상을 받았지만, 그것이 곧 일본이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투유유(屠吻, Tu Youyou)라는 여성학자가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말라리아를 치유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개똥쑥이라는 식물에서 추출하는 데 성공해서 받았죠. 그학자는 인터뷰를 통해 중국 정부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정부에서평생 충분한 연구비를 줬기 때문에 이런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고요. 그 학자는 북경대 교수도, 칭화대 교수도 아닙니다. 변방에있는 한 연구소에서 연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충분한 연구비? 그렇다고 매년 10억 원씩, 100억 원씩 연구비를 받은 것도아닙니다. 그 학자가 말한 충분한 연구비는 조금씩이라도 끊김없이 지원해 줘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제가우리 연구재단에 개똥쑥을 연구해서 뭔가를 해보겠다고 연구비 신청을 하면 그냥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개똥쑥이 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날 강연에 아오키 교수가 참석했지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는데 내일 본인 학교에 와달라고 해서 다음 날 그의 연구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연구하는 것들을 보여줬는데,
말하자면 여전히 진딧물 뒷다리 털을 세는 수준이었습니다. 10년전, 20년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발견을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같은 흐름의 연구를 하고 있었고, 일본 정부에서는 그런 연구에 연구비를 계속 지원해 줬습니다. 사실 30년 전에 쓴 논문이나 지금 논문이나 보면 비슷하지만 그렇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연구비도 끊긴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기초과학연구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한국에서 연구비가 끊기지 않고 잘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탁월한 능력이 있느냐 하면, 매번 새로운 연구를 하는 것처럼연구비를 신청한다는 점입니다. 실은 똑같은 선상의 연구를 하는데, 마치 새로운 연구를 하듯이 잘 포장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이미 한 연구를 앞으로 할 것처럼 포장해서 연구비를 신청하기도합니다. 그래야 2~3년 동안 차질 없이 논문을 발표할 수 있기 때문에 연구비를 받을 때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최재천 교수 연구는 다 좋은데 솔직히 안 해도 그만이잖아그렇습니다. 제 연구는 안 해도 그만입니다. 저는 까치, 긴팔원숭이, 돌고래를 쫓아다니는데 제가 그런 연구를 안 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망할 리 없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잠시 정적이 흐른 다음 심사위원장이 "그럼 의견이 모아진 걸로 알고 넘어가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늘 그렇게 힘없이 탈락했습니다.
기초과학을 위한 연구비는 규모 자체가 클 필요 없습니다. 기초과학은 꾸준히, 끊기지 않고 연구비를 지원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까치 연구를 25년 넘게 해오고 있어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는 박새 연구를 100년이 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작은 연구비를 끊임없이 제공했기 때문에 옥스퍼드대학교는 100년이 넘는데이터베이스를 갖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 경험과 연구를바탕으로 저는 호주제 폐지 운동에참여했습니다. 자연계에서는암컷 중심의 질서가당연시되는데, 인간사회에서만남성 중심의 제도가 옳다고여기는 것은 명백한 모순입니다.
결국 호주제 폐지는 이루어졌고,
저는 이 변화에 기여한 것을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진화는 철저하게 상대적인 현상입니다. 혼자서 "내가 진화할 거야" 하며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 함께 진화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자꾸 세상을 내 관점뿐 아니라 남의 관점에서 보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사실 저도 답답했어요.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 싶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 입장에서는 더황당했을 것입니다. 남녀 차별이라는 걸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는데 드디어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뭐 말도 안 되는 가부장적얘기를 막 해대니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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