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상대측과 마주치고 말았다. 우리 쪽 둘, 상대 쪽 둘. 네 명 모두 숨 한번 크게 쉬지못하고 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의 숫자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때, 상대 쪽 직원이 별안간 침묵을 깼다. 그가 한 말은 귀를 의심해야 할 만큼 그 상황에서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혹시... 사인... 한 장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 전까지 발톱을 내세우고 으르렁거리며 나를 공격해온 사람이 내게 사인 요청이라니. 무려 법원에서 조정을 앞두고 어색하고 뻘쭘한 얼굴로 내게 요구하는 게 고작 사인이라니…
사인이라니. 허탈함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바람에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결심했다.
‘오늘 합의해줘야겠다.‘
화가 나고 서운했던 대상이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 사람과 나를 그렇게 만든 ‘세상‘
에 화가 난 것이었다. 그날 나는 알을 깨고 나오는 작은 새처럼, ‘현실‘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무리 사람과 사람 간에나쁜 감정이 없어도 사회와 세상이 정한 역할에 따라 서로미워하고 등 돌릴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역지사지의 의미를 알려준, 운명의 엘리베이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