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막상스 페르민의 《눈》은 시 같은 소설이고 소설같은 시다. 열일곱 생일날 아침 유코는 은빛 강가에서 아버지에게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시는 직업이 아니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고, 한 편의 시는 흘러가는 물이라고 타이른다.
그러자 유코가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어느 아침, 머릿속에서 물병 깨지는 소리에 한 방울 시가 움트고, 영혼이 깨어나 그 소리의 아름다움을 받아내는 게 시인의 삶이고 하루라면, 유코는 그 아침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게될 것이다. 어찌 그 삶이 녹록하겠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사람의 눈에는 그게 어찌 그럴듯한 삶으로 보이겠는가. 그러나,
유코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기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 너무 억울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 에너지가 남았을때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추동력 있게 다음 단계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하기까지 다시 서너 해가 걸렸다. 그리고 학교를 떠났다.
어려운 일이었고 후회도 많았다.
지금까지의 삶의 트랙을 벗어난다는 게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를 선택했다.
내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믿는다.
조르바에 미치지는못하지만 그의 담대함의 한 자락을, 적어도 내 삶에서 결행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깨뜨리는 것, 두렵기는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가슴에 새기기만 하면 끝내 저지르지 못한다.
깨뜨려야 비로소 삶을 지킬 때도 있다.
누구에게나 그 결정적인 순간은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 없이 살았다며 삶을 마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영원히 현재진행형이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그 일부일 뿐 이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하루가 아니다. 따라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I am not what I was).
이제까지의 삶이 주로 크로노스(양으로서의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삶은 카이로스(질로서의 시간)이어야 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무엇을 하는시간이 아니라 창조적 영감을 가져다주고 삶의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주는 시간이다. 이제 그런 시간으로서의 삶을 누려야 할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년의 나이는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곡선의 시간이다.
빠르게 내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느려도 밀도를 채우는 시간이다. 속도가 풍경을 담고 풍경은 속도를 품는 시간이다.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에 길고 험한 길 건너왔다. 직선에 익숙해서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면 곡선의 시간에 적응하지 못한다.
감속에 분통을 터뜨리거나 정반대로 잔뜩 겁을 먹고 엉금엉금 긴다. 속도 조절을 배우지 못하며,살았고 그렇게 달려왔으니 그게 자연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늘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 함함하게 사는 지혜를 누릴 시간이다.
성찰은 그래서 필요하다.
영원한 삶은 없다. 매 순간 충실하면 된다. 성찰된 그 짧은시간들이 우리의 삶의 농밀함을 결정한다. 그런 시간이 되었다. 가끔 제주도에 가면서 걸었던 길, 올레, 오름, 해변은 단순히 이국적인 풍광이어서가 아니라 성찰과 사유의 깊이와 너비‘를 채우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