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과일이 있고 제철 음식이 있는 것처럼 제철 풍경도 있고 제철에 해야 가장 좋은 일도 있다. [...]사전에서는 제철을 ‘알맞은 시절‘이라 풀어쓴다.
제철 행복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제철‘의 단위를사계절로, 한 달로 고민하다가 ‘절기‘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달에 두 번씩 달력의 숫자 아래 조그맣게 쓰여 있는 이름들. 절기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계절의표준이 되는 것‘이라는 기본 뜻 아래 또 다른 뜻이 반짝이고있었다. ‘한 해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기에 좋은 시기나 때‘
한 해를 지나는 동안 우리는 계절에 들어서는 네 번의 ‘입절기‘를 맞는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 그건 곧 우리가 어떤계절에는 함께 도착하게 된다는 말. 더 빨리 가거나 뒤처지는사람 없이, 보이지 않는 계절의 선을 나란히 넘어오며 "오늘이입춘이래" 하는 말을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아직은 얼어 있는 땅에서 겨울을 난 냉이를 캐듯 春봄춘 자를 뜯어본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을 살펴보면 풀초와 새싹이 올라오는 모습을 그린 진칠 둔과 해일이 합쳐진 글자. 하나의 글자 안에 따스한 봄 햇살을 받고 올라오는 새싹과 초목이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한자 안에 숨겨진 그림을 찾아낼때면 꼭 옛사람들이 그린 그림에 미농지를 대고 따라 그려보는 기분이 든다.
내게 입기는 늘 ‘배웅‘과 ‘마중‘의 시간이다. 입춘은 떠나는 겨울을 시간 들여 배웅하고, 다가오는 봄을 마중 나갈때라고 알려준다. 미루다 놓친 겨울의 즐거움이 있다면 이참에 챙겨두라고 눈을 내려주기도 하고, 이른 꽃 소식을 통해봄엔 어떤 즐거움들을 통과하고 싶은지 묻기도 하면서.
입춘 날 각자 맡은 일을 아홉 번씩 하던 ‘아홉리‘라는풍속도 있었다. 그렇게 해야 한 해 동안 복을 받는다고 믿었기에 공부하는 아이들은 천자문을 아홉번 읽고, 나무꾼은 나무를 아홉 짐 하고, 나물을 캐도 아홉 바구니를 캐고, 새끼를꼬아도 아홉 번 꼬았다는 얘기. 이날은 매를 맞아도 아홉 번을 맞았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거참 중간이 없네, 싶어 웃음이 났다. 하지만 꼬박꼬박 세어가며 어떤 일을 아홉번 채웠을마음에는 역시 희망이 깃들어 있었겠지.
절기 풍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옛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종잇장을 살짝 들춰 가려진 답을 알아낼 때처럼 머릿속에 느낌표가 뜬다. 아홉차리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평소 하던 일을 굳이 아홉 번 해야 했던 이유는? 라는 숫자를 가장 큰 한 자리 양수로 길하게 여긴 영향(예로부터 동양에서는 홀수를 양수로 밝은 것, 짝수를 음수로 어두운 것이라 여겼다)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맡은 일을 요령 부리지 않고 묵묵히 하여 실력을 갈고닦는 일
적선공덕행‘, 입춘 전날 밤에 남몰래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던 풍습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한 해 동안 나쁜 일을 면할 수 있다 믿었다고. 방점은 ‘남몰래‘에 찍혀 있었다. 밤을 틈타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냇물에징검다리를 놓기도 하고, 눈길을 깨끗하게 쓸기도 하고, 아픈사람 집 앞에 약을 지어다 놓는 등의 일을 했다. 내게는 이 마음이 어떤 풍속보다 따뜻한 입춘첩으로 느껴진다. 좋은 행동을 먼저 하면 좋은 마음을 갖게 된다는 걸,
복이란 가만히 기도하여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움직여 만들어내는 것임을 일찍이 알았던 이들의 풍속, 풍작을 기대하며보리 뿌리를 캐보고, 같은 일을 아홉 번 하고, 종이 위에 희망을 적어보는 것도 좋았겠지만,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밤, 누군가에게 도움되길 바라며 궂은일을 마다치 않을 때그건 징검다리 모양을 한, 혹은 구불구불한 산길 모양을 한입춘첩이 되지 않았을까. 동이 터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걸음을 서둘렀을 그 사람 곁에 이미 ‘진짜 운‘은 함께 걷고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몸을 움직여 만들어낸 훈기가 그 밤 추위로부터 그를 지켰듯이, 마음에 품은 온기가 사는 내내 그자신을 지켜줄 테니.
입춘 다음에 오는 우수는 이름 그대로 눈이 녹아 비가 되어 내린다는 절기. 봄을 부르는 비가 내리면 농부들은본격적인 한 해 농사 준비에 들어간다. 예로부터 ‘봄비는 일비,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 겨울비는 비‘라고 불렀다. 봄비에는 부지런히 농사일을 해야 하지만 여름에는 비가오면 일을 쉬면서 낮잠을 자고, 가을에는 비가 내리면 햅쌀로떡을 해먹고, 겨울에 찬비 내리면 아랫목에 앉아 술 마시며논다는 의미. 계절마다 비에 따른 제철 숙제가 있었다는 얘기
옛사람들은 하나의 절기를 다시 세 마디(초후, 중후, 말후)로 나누어 섬세하게 계절 변화를 살폈는데 우수의 삼후는 이렇다. 초후엔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늘어놓고 제사를 지내며, 중후엔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고, 말후엔 초목이 싹튼다. 음, 그렇군......이 아니라, 수달이 제사를 지낸다니?
문학적 표현인가 싶어 찾아보니 수달은 물고기를 잡은후 물가나 바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는 습성이 있는데, 이 모습을 본 옛사람들이 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믿었다는 것. 하필 수달이 평소에도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는 모습을자주 보여준 탓에 생긴 오해 같기도 하다. 삼후 내용은 계절에 따른 이 무렵의 자연 변화를 담은 짧은 시와 같다. 우수에는 얼음이 녹으니 수달이 물고기 사냥을 시작한 것이고, 봄기운이 번지니 겨울 철새인 기러기가 북쪽 땅으로 돌아간 것이다. 제사라는 표현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투영한 것이리라. 혹독한 겨울이 지나가고 얼음이 녹는 것을 보며 무사히 봄으로건너온 것을 하늘에 감사하고 싶었을 테니까.
시간이 흘러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 ‘봄한담‘ 편을 듣다가 다산 정약용이 만든 문예 모임 ‘죽란시사‘규약을 알게 되었을 때, 자목련 모임을 떠올리며 얼마나반가웠는지.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가을이 되면 서쪽 연못에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겨울이 되어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세모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 마시며 시 읊는 데에 이바지한다. -<죽란시사첩서欄詩肚帖)
처서 무렵이면 이른 새벽 서쪽 연못에 조각배를 띄우고 ‘연꽃이 피는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알았던 사람, 친구에게 자고 가라 권한 다음 국화 앞에 촛불을 켜두고서 꽃 그림자가 빈 벽에 너울거리며 만들어내는 수묵화를 보여주었던 사람. 풍류란 한자 그대로, 계절에 따라 바뀌는 바람의 흐름을 느낄 줄 아는 것일 텐데 다산과 그의 벗들은 풍류를 구체적인 삶으로 살아낸 사람들이었으리라.
청소는 결국 빈자리를 만드는 일. 매년 이맘때 찾아오는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듯 바닥을 쓸고 닦고, 화분을 옮기고,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을 나눈다. 봄에게 앉을 자리를 내어주어야지.
봄 춘‘에 나눌 분", 봄을 나눈다니 무슨 뜻일까? 봄을둘로 나눈 중심이 되는 날이니 한여름과 한겨울이 있듯이 춘분은 ‘한봄‘, 봄의 한가운데란 뜻으로도 읽히고, 영상과 영하를 나누어 기온이 더 이상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기준이 되는 날로도 읽힌다. 물론 둘로 나눈(分) 듯 낮과 밤의 길이가같아지는 날이라는 뜻이 가장 크겠지만. 이제 하지까지 낮이계속 길어질 테고, 추분이 오기까지는 낮이 밤보다 조금이라도 더 긴 ‘빛의 계절‘을 살게 된다.
한 해를 잘 보낸다는 건, 계절을 더 잘게 나누어둔 절기가 ‘지금‘ 보여주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것. 네 번이 아니라 스물네 번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는 일이겠지. 이래서 지금이 좋아 할 때의 지금이 계속 갱신되는 일. 제철 풍경을 누리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고 틈틈이 행복해지는 일. 네 번째 절기 춘분을 지나며 올해 들어 네 번째로 생각했다. 아, 내가 이래서 이 계절 좋아하지. 그렇다면 아직까지는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다그치는 인간 세상과 달리, 자연은 나무라지도 채근하지도 않는다. 나무가 나무로 살고 새가 새로 살듯 나는 나로 살면 된다는 걸 알게 할 뿐. 세상에 풀처럼 돋아났으니 다만 철 따라 한 해를 사는 것. 봄에새순 같은 희망을 내어 여름에 키우고, 가을에 거두며, 겨울엔 이듬해를 준비하는 게 자연스러운 한해살이다.
환한 꽃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앉아 시시각각 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 이 맛에 산다‘ 하는 흡족한미소를 띨 그날까지. ‘이게 사는 건가‘와 ‘이 맛에 살지‘ 사이에는 모름지기 계획과 의지가 필요한 법이다. 제철 행복이란 결국‘이 맛에 살지‘의 순간을 늘려가는 일.
기온의 특징을 담고있는 이름에는 소서(작은 더위), 대서(큰 더위), 처서(더위가 그침), 소한(작은추위), 대한(큰 추위)이 있고, 강수 현상을 나타낸 이름으로는우수(봄비), 곡우(곡식 비), 소설(작은 눈), 대설(큰 눈)이 있다. 백로(흰 이슬), 한로(찬 이슬), 상강(서리가 내림)은 수증기의 응결현상을 나타내고, 경칩, 청명, 소만, 망종 등은 이 무렵 만물의변화를 관찰해 붙인 이름이다. 뜻을 알게 된 것만으로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내고 계절의 풍경을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날이자 ‘계절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춘분이 지나면 낮의 길이가 밤을 넘어서며 봄이 깊어가고, 추분이 지나면 밤의 길이가 낮보다 길어지기에 가을이 깊어가는 것. 춘분과 추분에 낮이 가장 긴 하지와 밤이 가장 긴 동지를 더해 계절의 기초가된다는 뜻의 ‘기절기‘라 부른다. 말하자면 춘분하지-추분-동지는 해의 운행에서 전환점이 되는 ‘해의 사계절‘이고, 이로부터 한 달 반 뒤 해의 영향이 땅에 이르러 계절이 시작되는 입춘-입하-입추입동은 ‘땅의 사계절이다. 이름에 춘하추동이 들어가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절기들이기도 하다. 이여덟 절기 사이사이에 그 무렵의 기상 현상이나 자연 변화를담은 이름의 절기가 두 개씩 더 들어가 24절기를 이룬다.
그때 나는 ‘나중‘을 믿었지만 그런 식으로는 바쁜 오늘과 바쁠 내일밖에 살 수 없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어." 지친 목소리로 자주 그렇게 말하는 동안 알게 됐다. 무얼 하든 무엇을 ‘하는 데에는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는걸. 밥을 먹는 데에도, 산책을 하는 데에도, 대화를 나누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시간의 자리를 마련해줄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Sólarfrí아이슬란드에는 ‘날씨가 화창하다는 이유만으로 예정에 없이 주어지는 휴가‘를 뜻하는 ‘솔라르프리 Solarfit‘라는 단어가 있다. 번역하면 태양 휴일 혹은 날씨 휴가쯤 될까. 이토록좋은 날씨엔 노동자에게 마땅히 태양 아래서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해주는 말. 실제로 화창한 날 사무실 게시판이나 상점 유리창에 ‘Solarfri‘가 붙어 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된다고. 그저 날씨가 좋아서 쉬는 날이라니. 예고 없이 주어진 하루짜리 휴가나 오후 반차는 얼마나 선물 같을까? 회사점심시간에 공원을 걷다가 이 좋은 날씨를 두고 바깥 풍경도보이지 않는 사무실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않아 눈물이 날 것 같았던 몇 해 전의 내 손에 쥐여주고 싶은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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