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노동자 자신이 무엇을 생산할지, 생산품은 어떻게 처리할지 등을 자주적으로 주장하는 데 노동의 의의가있다고 생각했다. 작은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은 자신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족감과 의의를 느낀다. 손님을 위해 요리하지만 자신만의 노하우와 창의성을 발휘해 요리할 수 있고, 맛있게 먹는 손님을 보면서 만족감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요리사는 자기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만큼 요리에 열정을 갖기 어렵다. 둘 다 손님을 위해 요리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월요일에 대한 공포는노동에 대한 혐오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지금 하는 일에 자아실현이라는 요소가 존재한다면, 월요일이 그렇게까지 두렵지만은 않지 않을까? 그런데 내 월급은 나의 노동에 진정으로 합당한 가치인가?
회사는 망하고, 배우자는 떠나가고…………… 이제까지 익숙했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릴 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카뮈에 따르면,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할 때 인간과 세계 사이의긴장관계와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카뮈는 이 모든 것이 나쁘기만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우리가 부조리를 의식하고 그 근원을이해하는 것은 자유를 획득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
시원찮은 이유를 대면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낯익은세계다. 그러나 갑자기 환상과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서, 인간은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낀다. _<시시포스 신화에서이처럼 낯설고 유리된 감각이 부조리감이다. 마치 유령처럼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그것은 언제 갑자기 나타날지 알 수없다. 하지만 습관처럼 익숙하고, 그러다가도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감각이다.
무력하기 그지없는 우리에게 이 세계가 돌려주는 대답은침묵뿐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 일은 그냥 그렇게 발생했을 뿐이고, 우리는 무력하게 하늘을 향해 "왜?"라고 외칠 뿐이다. 카뮈는 인간이 이렇게 세상의 침묵과 대면할 때, 모든 일은 순전히 우연에 지나지 않음을 의식할 때 모종의 향수(nostalgia)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자신의 삶에서 이성적 원칙이나 질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세상은 본래 혼돈으로 가득 차 있고 이성적예측에 따라 돌아가지 않음을 발견하고 상실감과 부조리를느끼게 된다. 1015카뮈는 부조리가 인간 혹은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이 세계를 이성으로 길들일 수 있으리라고기대하지만, 세계는 결코 인간의 이성적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이렇게 인간과 세계 사이의 ‘밀당‘에서 생겨나는불협화음은 둘 사이의 관계를 잇는 유일한 끈이 된다. 즉 부조리 자체가 곧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다.
카뮈가 인정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인간은 세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둘째, 세계는 인간의 이러한 갈구에 응답하지 않는다. 셋째,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이러한 불협화음에대해서 이성은 무력할 뿐이다. 카뮈에게 있어 부조리는 도피해서는 안 될 현실의 일부분이었다.
부조리를 대하는 세 가지 태도-반항, 자유, 열정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매일 산꼭대기까지 거대한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돌은 산꼭대기에 도달하자마자 산 밑으로 굴러 떨어져버리고, 시시포스는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돌 밀어 올리기를 영원히 되풀이한다. 카뮈는 이런 상태가 삶의 부조리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돌이 다시 산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은 모든 노력이수포로 돌아갔음을 의미하지만, 그럼에도 시시포스는 매일매일 그 무의미한 행위를 되풀이한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반항(revolt)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신이 내린 형벌을 거부하는 것이아니라 정신적 차원의 반항이다. 시시포스는 영원히 돌을 밀어 올리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신이 그에게 부여한 운명과 돌을 밀어 올리는 형벌의 의의를 멸시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말의 의미를 찾아낸다.
병이 났다는 것은 쉬어야 할 때라는 신호이듯, 부조리감은 삶을 돌아봐야 할 때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모든 외재적 가치는 이성의 산물이다. 거기엔 아무런 절대적 · 고정적 이유가 없다. 부조리는 똑바로 서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인간의 공통된 운명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사회적 기대라는 속박을 떨쳐낼 수 있게 된다. 시시포스와 마찬가지로반항 자체가 우리를 삶의 부조리에서 벗어나게 하진 못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자유를 의식하고 삶에 우리가 소망하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 바로 이것이 삶에 대한열정, 뜨거운 애정의 표현이다.
소진은 피로보다 훨씬 무겁고 심각한 것이다. 소진과 피로는어떻게 다른가? 들뢰즈는 우리가 지쳤다, 피곤하다고 느낄 때의 감각은 아직 뭔가 더 할 수는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어떤잠재적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지만 단지 지금 당장은 그렇게할 힘이 없는 상태로, 새로운 계획의 실현을 희망해볼 수는있는 단계다. 즉 피로 상태에서 고갈된 것은 실현 자체일 뿐이다. 당장은지쳐서 실현할 힘이 없지만, 실현 자체는 가능하다. 비유하자면, 실현하는 데 며칠이 걸리는 계획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단지 체력이 다해서 그 계획을 실현하는 일에 착수만 할 수 없는 상태다. 피로 상태에서 고갈된 것은 당장의 실현으로, ‘가능성‘은아직 고갈되지 않았다. 계획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 계획은새로 뭔가가 보태지거나 바뀔 수도 있다.
반면 소진은 단순히 실현의 고갈만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서의 새로움, 신선한 발상, 의외의 사건·사물이 전부 말라없어지는 것이다. 즉 전에 익히 가지고 놀던, 낡은, 옛날 것들밖에 끄집어내지 못하는 상태다. "늙은 개는 새로운 놀이를할 줄 모른다"는 말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다. 꼭 늙어야만 이런 상태를 맞닥뜨리는 것도 아니다. 완벽하게 통제된 극도로 안정된 삶도 소진을 부추긴다. 소진된 사람은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에서, 특정 규칙에 따라 특정 동작으로만 움직이도록 설계된 기계와 비슷하다. 혹은 공간 자체도, 보이는 풍경도, 어울릴 대상도, 그 자신이 할수 있는 행동도 한정돼 있는 작은 어항 속의 물고기 같다고도할 수 있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TV 단편극에서 영감을 받은 개념이기도 하다. 매우 전위적인 이 부조리극의 제목은 <쿼드(Quad)〉. 폐쇄된공간 속 네 귀퉁이에 각각 한 명씩 서 있는 댄서들은 극이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폐쇄된 공간이란 예측 불가능성이 최대한 배제돼 있음을 의미한다. 각각의 귀퉁이에서 발생하는 일은 무엇 하나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 네 귀퉁이의 댄서들은 입고 있는 옷도, 키와 생김새도 비슷하다. 말랐거나 뚱뚱한 사람도 없고 성별의 특징마저분간하기어려운 데다 얼굴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네 명의 댄서는 독무를 추기도 하고, 두세 명이 함께 춤추기도 하며, 모든 댄서가 다 같이 모였다가 뿔뿔이 흩어지기도한다. 그러다 다시 2인무, 3인무, 독무를 추고, 다 모였다가 또흩어진다. 베케트는 이 단편극을 ‘공간에 대한 소진‘이라고말했다. 극 안에서 공간은 댄서들의 배열과 조합, 규칙의 변화만으로 그 공간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시킨다. 그 공간 안에서 실현한 현실만이 아니라 실현할 수도 있었던 잠재적 가능성까지 모두 소진시키는 것이다. 소진이 무서운 건 우리의 현실뿐 아니라 꿈이나 기회 같은 잠재적 가능성까지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베케트가 <쿼드>에서 표현한 공간의 소진으로부터잠재력을 고갈시키는 네 가지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로공간의 소진, 시간의 소진, 화면의 소진, 언어의 소진이다. 이러한 소진 끝에 다다르는 것은 결국 의미의 고갈이다. 공간, 시간, 화면, 언어는 모두 의미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는 영영 결재가 나지 않고, 도저히 끝나지 않는 업무가해일처럼 덮쳐와 칼퇴근은 꿈도 꿀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당신도 짜증이 폭발하는가? 가뜩이나 바쁜 업무가 끝도 없이 쌓여만 가는데, 어떻게 짜증이 안 날 수있단 말인가? 순자는 이런 짜증의 심리에 대해 상당히 독특한 견해와 분석을 제시한다. 허일이정(마음을 최대한 넓게 열어젖힌 뒤 하나로 모아 다듬으면 짜증에靜),서 벗어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마음 수련법이다.
순자는 바로 이런 자기맹신이야말로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에는 원래부터 예와 의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배워서 갖추어야 한다"고주장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도덕과 예의를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법의 통제와 교화가있어야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것이다. 순자가 이토록 학습을 강조한 것은 인성의 악을 더 믿었기때문이기도 하다. 인성이란 이토록 악하므로 사람은 겸손하고또 겸손해야 하며, 자신의 내면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말고, 외부에서 도움과 협조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맹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키우던 닭과 개를 잃어버리면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마음을 잃어버리고 나서는 찾아야 한다는 걸 알지 못한다. 학문의 도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뿐. 자신의 마음을 찾는 것, 잃어버린 그 마음을 찾는 것이 삶의진리라는 게 맹자의 생각이었다. 당신이 키우던 고양이나 강아지를 잃어버리면 당신은 다급하게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왜 당신의 도덕심을 잃어버렸는데도 찾지 않는가?
허일이정은 여러 걱정을 안은 채 짜증과 혼란에 싸여 있는직장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그대로 빠져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붙들어주기 때문이다. 허일이정은 ‘허(텅 비움)‘ ‘일(하나로 모음)‘ ‘정(고요함)‘의 세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하나하나 실천해나갈수록 어지럽고 복잡하기만 한직장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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