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새섬을 보며 감탄하는 것은 불굴의 의지나 긍정적 자세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육체를 잠식하는 고통 앞에서도 그에 맞서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절망 속에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태도가 병으로 쓰러진 뒤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다져온 것임을 새섬과 대화하면서 알게 됐다. 좋은 죽음이란 결국 좋은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새섬은 증명하고있다.
나는 관찰자에서 당사자로 입장을 선회했다. 머리로 이해하던 죽음을 몸으로 받아들인 것이 새섬과 함께한9개월 동안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다. 때가 되면 내가 탄 배도 난파할 것이다. 당신이 탄 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난파선의 선장들이다.
난파될 것을 알면서도 원하는 방향으로 뱃길을 잡는 이항해의 연료는 책이다. 암과 죽음에 대해서만 말했더라면 새섬과 나의 인터뷰는 이만큼 길게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한두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인터뷰가 열두 번까지 계속된 건 책에관해 나눈 이야기 때문이었다. 웃긴 책, 슬픈 책, 깨달음을 주는책, 힘이 되는 책을 함께 나누는 동안 그에게서 보였던 단단한태도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대화를 담은 이 책에 또 다른 많은 책들이 등장하는 이유다. 기쁘고 희망찬 날은 소수고, 절망스럽고 허무하고 외롭고 불안한 날은 다수다. 새섬과 대화하고 글을 쓰면서 책이 삶을 지탱하는 데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주는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반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했던 또 한 가지는 그 누구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가엾게 여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부끄럽기는 해도 누군가가 자신을 병든 어린아이 대하듯 마냥 불쌍히여겨주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했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 광인의 수기》, 석영중. 정지원옮김, 열린책들, 2018
"사람들은 스스로를 너무나 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감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어릴 때부터 교육이 이뤄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자꾸 특별함을 강조하잖아요. 특별한 자신이 어디서든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기도 하죠. ‘나‘에 지나치게 몰입하게만드는 사회 같아요. 요즘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나를 사랑하는 방법, 남들에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많아요. 이렇게까지 세상이 전부 자기 자신에대한 얘기로만 가득 찼었나 싶을 정도예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내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사실 별 문제가없어요. 곧바로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 되거든요.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세계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요."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생활 습관, 환경, 유전적 특질까지 모든 것을 되돌아보다가. 그래도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으면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에대한 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끄집어낼 과오도 없는 사람은그것이 인간이 이해하기 버거운 신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자신이나 가족의 죗값을 치르든, 더 큰 하늘의 뜻을 받들든, 이유가 필요하다. 말이 안 되는 이유라도 이유가 아예 없는것보다는 위안이 된다. 사사 료코는 인간은 의미 없는 불운을 감당해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의미 따위 없는 우연적 사건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새섬이 놀라운 것은 병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이런 패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왜 하필 나인가‘라고 묻지 않고, ‘왜 나만 예외겠는가‘라고 묻는다. 새섬은 팟캐스트 <암과책의 오디세이> 34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들 공정에 대해 날을 세워 말하지만 이걸 보편적인 가치라고 할 수는 없어요.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공정보다 생존 자체가 더 중요해요. 우리 사회가 공정을 따지게 되었다는 건 어떻게 보면 우리가 좀 살만해졌다는 뜻이겠죠. 당장 먹을 게 부족하고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공정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거예요.
나는 사고의 이유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하는 토레시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납득할 만한 이유란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공정함을 추구하는 게 헛수고라는 뜻이 아니다. 정의가 무의미하다는 것도 아니다. 재판정 밖의 삶에도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자는 얘기다. 어쩌면 정의 따위 개의치 않는운명의 차가운 얼굴에 질려버린 인간이 의지하고 붙들 끈이 필요해서 정의를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더 소중히여기는지도. 하지만 삶은 재판이 아니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받아들이는 것이다. 원치 않은 불운의 당사자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을것이다.
비르히니아 토레시아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내 가족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매일 스스로 물어봐요. 하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인생이란 그런 것이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긴 침묵 끝에 딸이 던진 질문에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아빠, 그러면 엄마가 나한테서 종양이 옮은 거예요?" 나는 아이 손을 꼭 잡고 나직이 대답했다. "아니, 종양은 그런 게 아니야." 아이가 안정을 찾고 잠들 때까지 나는 같은 말을 되뇌었다. 앨런 타운센드, <우주의 먼지로부터>, 송예슬 옮김, 문학동네, 2025, 257쪽어린 네바를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빠의 이야기다. 내가 뇌종양에 걸린 다음 엄마에게도 뇌종양이생겼지만 그렇다고 내가 엄마에게 종양을 옮긴 것은 아니라는, 가족 셋 중 둘이 뇌종양에 걸릴 확률은 아주 낮지만 가끔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는과학자 아빠의 정확한 설명만이 네바를 위로할 수 있다. 새섬은자신도 그런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뇌종양에 걸린 이유를 제가 설명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종양에 걸렸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러저러한 일들을 했다‘는 서사를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완성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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