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에서 리좀은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 줄기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자신들의 철학적 접근 방식을 설명하기위해 리좀이라는 단어와 식물학적 이미지를 차용했다. 대부분의 지식체계가 하나의 중심 주제에서 하위 개념 또는 하위 범주로 가지를 뻗어가는 방식으로 구성된다면, 리좀의 은유는 그와 반대되는 지식 체계를 시각화한다. 리좀(뿌리줄기)은 뿌리, 기둥, 가지가 있는 수직적이고 선형적인 나무 구조와 달리, 이질적인 요소들이 상호 연결되어다방향으로 작동하는 수평적 사고 모델을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식, 문화, 사회는 모든 지점이 서로 연결될수 있는 횡단적 네트워크로 간주된다. 단일한 기원이나 원인을 찾기보다는, 현실을 다양한 요인과 힘, 현상들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이해한다. 이 ‘리좀식‘ 사고는 지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억압적이고 지배적인 ‘수목식‘ 사회 위계 구조에 저항한다.

철학계에서 공동 저술은 흔치 않다. 더구나 공동 저자들이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식물학 이미지를 빌려 철학 이론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보다 더 이례적이다. 새로운 사고의 틀에는 새로운 은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설명하고자 했고,그 방식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불변하는 단일한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혁명적인 방식이길 바랐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을 "유목적 전쟁 기계"라 표현하며, 사방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인위적 권력매커니즘을 해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종종 현실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공간적은유로 표현한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대비, 땅과 세상의 구분 또는 은신처, 오아시스, 사막과 같은 용어는 아렌트의 문체적 특징이자,인간 행동의 본질에 대한 그녀의 이해를 요약하는 데 중요한 도구이다. 그중에서도 사막 은유는 가장 강력한데, 아렌트가 말하는 사막은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정치적 공간이 사라질 때 생겨나는 황폐한 공간을 가리킨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정의처럼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여기는 것이 정치의 본질을 놓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그자체로 정치적 존재가 아니며, 정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 공적이고 공통된 공간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사막은 바로 이러한 공적 공간이사라진 결과이다. 정치가 부재할 때 사막은 확장된다.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바람은 모래 폭풍처럼 불어와 남아 있던 건강한 상호작용의 공간과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세력에 맞서 살아 있는 작은 오아시스까지도 덮쳐 버린다. 더 큰 위험은 우리가 회피와 오락이라는 신기루에 빠져, 귀신처럼 떠돌며 사막의 삶에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막, 신기루, 오아시스, 모래 폭풍 등 다양한 은유를 통해 아렌트는 상실감과 길을 잃은 현대인의 상태를 걱정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이의 사회적 공간, 즉 ‘사이 공간‘을 지켜내는 것이다. 신기루나거짓된 대안적 오아시스에 현혹되지 않고 사막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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