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정상에서 만난 그 청년은 "바스크이 어디서 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갈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며 대화를 마무리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순간 그가 참 영성적인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피레네산맥을 내려오며 곰곰이생각했다. ‘그렇다.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내안의 세속적 욕망을 깊이 바라보게 되었고, 이미 자신의 안위만을 우선시하는 자아를 버렸다고 생각했으나여전히 미적거리고 있는 거짓 자아가 어른거렸다. 거짓 자아를 지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흔적도 일기장엔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삶의 공허감은 욕망에 가득 찬 거짓 자아와 이를 합리화하려는 에고Ego가 대치하다가 에고가 지치면 찾아오는 것이었다. 혼자 한참울었다. 눈물이 그치고 서서히 떠오르는 마음속의 질문은 화두가 되었다.
일어나자 간밤의 꿈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꿈에서 나는 예수회의 어느 영성 신학자와 영적체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영적 체험을하게 되면 어떤 느낌, 어떤 변화가 있는가?"라고 질문했고, 그는 웃으면서 "기쁨이 넘치고, 더 관대해지는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길 위에서, 그리고 어제도 내내 걸으며 우리 인생에서 ‘초월 체험‘이 무슨의미를 주는지를 물었기에 그런꿈을 꾸지 않았을까
그 꿈의 영향으로 그 질문을 더 깊게 숙고할 수 있었다. 그렇다.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생각을 극복하는 ‘초월 체험‘을 했다고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힘만으로는 고통을 어찌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고통을 견디어 내는 동안 자기 자신의 한계, 인생에 관한새로운 발견, 혹은 의미가 갑자기 주어질 뿐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삶이 변화하면, 조금 더 관조적으로고통을 직면할 수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초월을 체험하지만, 여전히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스스로가치의 기준이 될 수도 없다.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는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실존 안에서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나를 구성하는 요소와 주위의 환경은 내가 상호 소통하고 상호 작용해야 하는 지향점이지 내 자유 행사의 대상으로만 볼 수 없음은 명백하지 않는가.
나에게 종교는 본래의 자리, 자기의 고유한 자신자기가 가야 할 궁극, 하느님께 가는 길을 걷는 것이고,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고유한 하나의 길이라면 이것이 곧 영성이다. 영성은 길이고 방식이며 그 과정을안내하는 내적 체험이다. 종교와 영성은 역사와 문화를 삶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의 지지와 연대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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