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이성에 무관심한 채 그저 자기 몸매만 가꾸는 예술이라면 소멸해버릴 위험성이 있다. 보들레르가 1852년1월 <세속의 학교>라는 글에서 주장하는 바가 바로 그거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형제처럼걷길 거부하는 모든 문학은 살인하는 문학이요 자살하는문학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보들레르는 세기 속의 문학을, 세기에 굴종하거나 세기에 봉사하는 문학이 아니라세기 속에 현전하는 문학을 지지했다.
프루스트는 문학을 다른 삶, 삶 밖의 삶, 세계 밖의 삶으로 만든다. 활동적인 삶과 명상적인 삶을 나눈 고대와 기독교적 구분의 현대식 버전이랄까. 그가 말하는 명상적인삶이란 곧 품격 있는 여가otium cum dignitate, 키케로나 몽테뉴의 은퇴 생활, ‘자발적 평온‘, 공부하는 여가요, 몽테뉴의 친구 라보에시가 말한 ‘자발적 예속‘ 같은 것이다.
현대는 활동적인 삶과 명상적인 삶의 서열을 뒤집었다. 예전엔 오티움orium의 반대인 네고티움negotium이 자아 상실을의미했으나, 이제는 개신교의 부상과 관련지을 수 있는추세에 따라(이는 바로 막스 베버의 1904년 저술 <기독교 윤리와자본주의 정신>이 주는 교훈이다) 비즈니스négoce10)가 자아실현의 장, 존재 성취의 장 자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