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은 춥지 않아 자주 산에 갈 수가 있었다. 딸네 차를얻어 타고 가는 거니까 등산은 아니다. 주위에서 겨울 등산이좋다고 권유하는 사람도 있고, 나도 은근히 유혹을 안 느끼는건 아니지만 따라나섰다가 혹시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이 생길까봐 엄두가 안 난다. 뭘 하려도 제일 먼저 내 몸의 눈치를 보게 된다. 괜찮겠느냐고 상의를 할 적도 있다. 내 몸이 썩 자신있어하지 않는다고 여길 때의 느낌은 바로 엄두가 안 난다고말할 수밖에 없다. 몸을 아껴서가 아니라 내 몸이 나 아닌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되는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서이다. 그 일만은 최선을 다해 막아보고 싶으니 엄두가 안 나는 일이 자주 생긴다. 늙는 거란, 엄두가 안 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거로구나
나는 도둑이 즉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귀금속이나 모피는 갖고 있지 않다. 생활에 필요한 가전제품은 다 갖추고 살지만 그나마 다 구닥다리다. 작동이 안 될 때까지는 쓸 작정이다. 이만하면 문 열고 살아도 될 것 같다. 십만원 내외의 현금이 떨어진 적은 별로 없으니까 혹시 모르고 들어온 도둑이 있어도 허탕은 치지 않을 것이다. 도둑이 무서워서 문만 열면 흙이나 잔디를 밟을 수 있고 숲이나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시골집에서 살 수 있는 꿈을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귀중품이 없이 산다는 것도 가난스럽기는커녕 내가 누리는 가장 큰 호강 중의 하나로 꼽아주고 싶어진다. 꿈을 꿀 수 있는 한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하다.
내가 끼고 살던 물건들은 남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다. 구식의 낡은 생활필수품 아니면 왜 이런 것들을 끼고 살았는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어린 물건들이다. 나에게만 중요했던 것은, 나의 소멸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게처치 곤란한 짐만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단순 소박하게 사느라 애썼지만 내가 남길 내 인생의 남루한 여행 가방을 생각하면 내 자식들의 입장이 되어 골머리가 아파진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일생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 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앞에서는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고 눈가림도 안 통할테니 도리어 걱정이 안 된다. 걱정이란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을 궁리할 때 생기는 법이다. 이게 저의 전부입니다. 나를숨겨준 여행 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전체를 온전히 드러낼 때
꼭 봐야 한다는 이이화 소장의 뜻을 좇아 다음날은 버스를 타고 요양으로 갔다. 이소장이 백탑에 이끌린 것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 나오는 「호곡장」에서 연유한 듯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멀리 백탑을 바라보면서 ‘내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만하구나‘라고 적고 있다. 내가 인용한 것은 고전 국역 총서의번역이지만 그중 「호곡장」에 대해선 딴 의견도 많은 듯했다.
‘울고 싶어라‘ 하기도 하고 ‘울 만하다‘ 하기도 해서, 어떤 번역이 맞는가보다는 왜 울고 싶어했는지, 정확한 ‘호곡장‘의 의미와 만나고 싶은 거였다. 벽돌에 감격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오는 걸로 봐서 벽돌로 지은 웅장하고도 조화로운 백탑에 감동을 했을 수도, 광활하고 기름진 대지가 눈물이 나도록 부러웠을 수도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지, 정작 백탑을본 느낌은 그저 그랬다. 마침 환경을 정비하고 있어서 건축미를 감상하기엔 너무 주위가 산만했고, 거대한 건축물을 하도많이 봐온 눈엔 웅장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호곡장‘과 연암의 ‘호곡장‘은 일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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