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사람이 경청하고 이해하는 능력치에 걸맞은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다만 이 능력은 우리에게 싹의 형태로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관리하여 키워 나가야 한다. 이때 그 사람이 사는 문화가 도움이 될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영혼을 돌보는일을 중요한 과제이자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고 여겼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이런 인간존재의 차원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하느님을 인격체로 이해한다는 것이 원초적이고 의인화된 신관념을 받아들이고 손쉽게 신과 친밀한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곧, 하느님을 신비로 인지하는 것을 중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절대적 신비에 ‘인격적‘ 성격을 부여하는것은 하느님과 우리 관계에 대화적 특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성령이 교회를 진리의 충만함으로 점점 더 깊게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세속적 종말론과 이데올로기가 이해하는 식의 진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여정은 일방통행이 아니며 역사속 이상적 상황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느님 품에 안기는 충만함의 시간에서야 그 여정이 끝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해변에서 한 소년이 조가비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의 모든 신학, 교리서, 교의 교과서 전부가 하느님 신비의 충만함에 비교하면 그저 조그만 조가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인식 도구들을 감사히 사용하자. 하지만 그것들을 무한히초월하는 분의 광대함과 깊이에 경탄하는 일도 멈추지 말자.
신앙과 불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구체적 인간의 삶에서 그 신앙의 진정성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전투적인광신주의는 종종 실존적 불신앙이 가장 좋아하는 가면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특히 인간의 기도와 노동을 통해(베네딕도의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를 생각하자), 하느님의 자극(전통적으로 말하면 은총의 베푸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통하여 우리 세상에 현존하신다. 그분은 신앙의 삶, 희망과 사랑의 삶에 살아 계신다. 신학적으로 보면, 믿음, 희망, 사랑은 인간의 삶의 태도일 뿐 아니라, 신성과 인성, 은총과자유, 천상과 지상의 만남의 장이며, 그 둘의 본질적인 연결(상호내재성‘ perichoresis)의 장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살아 계심을 탐구할 수 있다. 내가 믿고 따르는 신학은 사랑과 희망이 동반된 신앙 행위들에서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이뤄지는 현상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