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는 늘 영성이 충만한 삶을 살았다. 집 안 거의모든 곳에 영성이 가득했던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렇다. 우선 집터에는 터줏대감이 산다고 여겨 집을 짓거나 터의형상을 바꿀 때면 제사를 지냈다. 집의 마루에는 성주신이살았으며 부엌에는 조왕신, 심지어 화장실에도 측신이 산다고 여겼다. 또 문마다 문신이 산다고 믿어 문을 넘을 때조심했다. 이들이 잡신이라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우리를 다스린다고 여기며 항상 삼가며 살았다.
마을마다 입구에는 으레 당산나무가, 그 아래에는 신당이 있어오가며 늘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으니, 우리들 공동체도 그러했다. 이뿐만 아니라 큰 집에서는 사당까지 두어 조상의영혼을 모셨고, 심지어 뒷산에는 무덤을 두어 죽은 자와 같이 살기도 했다. 죽음과 신들을 목격하며 사는 게 일상이어서 우리 선조의 삶 자체가 종교였다. 자계戒하며 신독愼獨하고 청빈으로 독락獨樂하는 선비의 삶, 조선 500년을지탱하며 아름다운 문화를 일구어내는 바탕이었다. 그런데 결국, 이 모두를 물신 하나가 쫓아내고 만 것이다.
이 장소들을 한 줄로 이으면 40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가 된다. 이렇게 묶을 수 있다. 사유원(1박)-하양 무학로교회-독락당-만취헌-통도사-구덕교회 - 부산 바다(1박)-봉하마을-명례성지 - 왜관 수도원 (1박). 이 빠듯한 사나흘여정을 순례길이라 여기고 한꺼번에 다닐 수도 있겠지만, 이 장소들이 서로 기승전결을 갖지 않으니 몇 군데를 적절히 묶어서 각자 편의대로 간다 해도 무방하다. 어쩌면 한장소를 찾아 오래 머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아마 혼자 가시는 게 좋을 것이다. 스스로 말미암는 게 자유일지니....
수목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주가 되어야 하는 장소이므로 건축은 특별한 형태가 되지 않아야 했다. 그저 집지을 장소만 잘 선택하면 주변 풍경을 잘 감상하게 하는 시설로서 족한 일이라, 내 건축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했다. 그래서 이곳의 첫 번째 집인 현암을 비롯해 내가 설계한 거의 모든 시설은 땅속으로 들어가게 하거나 묻거나구태여 나무를 심어 가렸다. 강력히 희망하기로는, 마치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건축 그래서 이미 풍경이 된 건축이고자 한 것이다.
『장소의 혼』을 쓴 건축가이자 이론가 크리스티안 노베르크-슐츠는 "건축의 기본적인 행위는 어떤 장소의 소명을이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이 수목원의 장소가 가진 소명을 다 이해했을까? 노력했지만 부족했을지 모르고, 더러는 소명을 배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장소가가진 생명력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아무리 할퀴고 찢어도 땅은 스스로 치유하고 이겨내며, 다음에 살게 되는 세대에게 그 고통마저 아름다운 언어로 들려준다. 그리고 횔덜린의 시구처럼, 그곳에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