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구걸하는 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솔직하고 자신 있게 자신을 표현한다. 잘한 일이 있고 자랑거리가 있을 때만 당당하게 나아오는것이 아니라, 거리낌 없이 자신의 곤궁과 필요를 내보인다. 스스로 사랑받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받는다는 확신 속에서는스스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사랑받는다는 걸 알면 아무것도증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사랑받는다는 걸 알 때만 본연의 모습으로 설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의 조화로운 대립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친숙한 것과 뜻밖의 것‘이라는 단어쌍이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대칭쌍인 ‘진부함과 자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화로운 대립은 늘 이렇듯 ‘이중의 단어쌍을 이룬다. 첫 번째 단어쌍은 우리가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어쌍은 우리가 피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굉장히 ‘초연‘한 사람이 있다. 그 역시 확신이 있고, 소명을안다. 그는 투쟁하지 않고 고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의 안에는 ‘믿음의 안식‘이 있다. 본질적인 것은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고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기대하는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어려움과 곤궁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고요 속에 머물고자 한다.
중요한 일들은 억지로 싸우고 투쟁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익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명의 말은 이것이다. "주님이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잠잠할지라."(〈출애굽기> 14:14)

-광신적인 사람은 ‘초연‘을 냉담으로 해석한다. 냉담한 사람은
‘열정‘을 광신으로 본다.
-인색한 사람은 ‘너그럽게 베푸는 것‘을 낭비로 본다. 낭비하는사람은 ‘검약‘을 인색함으로 본다.
-율법주의자는 ‘자유‘를 방종으로 본다. 자의적인 사람은 ‘성실‘을 율법주의로 본다(이 부분은 5장에서 이야기하는 종교적인 의미에서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공동체의 ‘구속력‘을 파벌주의라고 경멸한다. 파벌주의적 공동체는 독립적인 사람의 ‘개인성‘을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라고 미심쩍어한다.

풍경에 빗대자면 거룩한 대립은 좌우의 가파른 낭떠러지 사이에서 ‘산등을 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멀리 떨어진두 산봉우리를 넘나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정신적 삶의 공간이다. 한 가지 선의 날카로운 산등이아니라, 서로 동등한 상반되는 힘들, 복이 되는 좋은 힘들의 공간이다. 여기서 정신적 타락은 바로 상반되는 것과의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완악하다‘는 표현은 어떤 사람이 독선, 즉 자신의 잘못된 상태를 떠나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하는것이 아닐까? 그는 자신이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의 지평을 거부하는 것이다.

중국의 고전 《장자》에서도 대립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발견할수 있다. 이것은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송나라를 찾은 양제는 하룻밤을 여관에서 보냈다. 여관 주인에겐 아내가 둘 있었다. 아름다운 아내와 못생긴 아내였다. 주인은 못생긴아내에게 잘해주었고, 아름다운 아내를 무시했다. 양제가 그 여관의하인에게 이유를 묻자 하인이 대답했다. 아름다운 마님은 자신이 아름다운 걸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지요.못생긴 마님은 자신이 못생긴 걸 알아요.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못생긴 걸 보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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