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불안은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미래를 통제하길 원하는 데서 시작한다."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정신과 의사로서 일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위로를 꼭 언어로 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위로란 그저 그 슬픔을 함께 느껴주고 자리를 지켜주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걸 말이다. 슬퍼하는 사람 앞에서면 어떤 말이든 건네야 할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위로는사실 꼭 말로 전하지 않아도 괜찮다. 옆을 지켜주면서 말없이 있어주는 것이 천 마디의 말보다 나을 때도 있다.
가장 좋은 위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들으면서 그답이 무얼지 나도 곰곰이 고민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내가지금껏 배운 좋은 위로의 자세는 ‘저는 당신이 지금 어떤 느낌인지 몰라요. 하지만 듣고 싶고, 배워서 돕고 싶어요‘라는데서 시작한다. ‘당신이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타인의 입장과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한편, 노력으로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나는 모른다‘라고 인정하려면 먼저 나의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줘야만 한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로저스Carl Rogers 박사는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이란, 말하자면 상담자가내담자(상담을 받는 사람)에 대해 무조건적인 수용과 지지를보내는 것이다. 그와 같은 수용과 지지를 경험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힘을 믿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수 있다. 상대방의 거절 또한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효과도 있다. 로저스는이러한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이 단순히 상담자와 내담자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건강한 인간관계의 전제 조건이라고 여겼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그들이 감사하고 행복해야 할이유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마치 색맹인 사람에게 세상이 얼마나다채로운 색을 가졌는지 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티쿠스 Articus (작가)
‘의사는 좋은 직업이야. 그래도 직업일 뿐이지.‘ 그 시각을 완벽하게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신기하게도 동기의 말을 접한 이후로 내 삶의 많은 스트레스가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여전히 의사라는 직업상 맞닥뜨리는 다양한 일에 대해 고민하고 살긴하지만, 그 고민들이 ‘일 밖의 일상‘을 흔들어놓지는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거나 불쾌한일이 생겨도 집에 오면 자연스럽게 잊게 되며, 환자들에 대한 걱정이 퇴근 후 가족과 보내는 나의 일상을 흔들어놓지는 않는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저명한 저널에 낸 논문보다 기억에 남는 건 정작 그런 것들이더라고. 딸의 졸업 공연, 아들과 함께 낚시를 갔던 기억 같은 것들 말이야……………. 그러니까자네도 논문 하나하나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기자들은 나에게 계속 절망했는지devastated 묻는데, 나는나 자신에게 실망했을disappointed 뿐입니다. 물론 어제 경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고 저는 제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실망시켰죠. 하지만 저는 야구 경기 때문에 ‘절망감‘을 느끼지는 않아요. 가령 제 딸아이의 친구는 최근 다리에 악성 종양이 발견되어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죠. 저는 분명 스스로에게 실망했지만 내일이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딸아이의 포옹을 받을 것이고, 제게는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나는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Walk a mile in one‘sshoes)‘라는 격언을 좋아한다. 언제나 타인의 경험과 관점,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정신과 의사로서 편견 없이 내담자들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려고 애쓰며, 그러한 태도야말로 우리 사회를 좀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전속력의 트레드밀처럼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돌아가는, 그래서 내 신발도 벗겨지기 일쑤인 사회에서 살아가며 남의 신발까지 신어볼 여력이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Pay it forward>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친구들에게 ‘먼저 주기pay it forward‘ 캠페인을 제안한다. 보통 영어로 ‘payback‘이라 하면 무언가를 받은 후 되갚는다는 의미인데, 이와 반대로 ‘pay forward‘란 타인에게 무언가를 받기 전에 ‘먼저 주는 것‘을 말한다. 주인공은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타인 세 명에게 선행을 먼저 베풀면, 그 선행을 받은 사람들은 또 다른 세 명에게 선행을 베푸는 선순환이 기하급수적으로 이루어져 좀 더 살만한 세상이 만들어질 거라 믿는다. ‘Pay it forward‘의 산물로 미국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로서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취약해지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누구나 앞으로 나아가려면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실패, 나약함, 연약한 심신,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우리와 나머지 세상을 연결하는 장치예요. 세상에 신호를 보내는 거죠.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이걸 나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라고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스터츠Sruz> 중에서
"지금 이 문제를 당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나요? 그게아니라면 잠시 잊어버려요." 과거에 사로잡힌 마음은 우울해지기 쉽고, 미래에만 초점을 맞춘 마음은 불안해진다. 그래서 정신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여기 here andnow‘에 머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이다.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정신과 의사 닥터 K와 함께 현실에 머무
실제로 영어로 ‘용기‘를 뜻하는 ‘courage‘라는 단어는 ‘심장‘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or‘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courage‘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이 말이 심장 속, 즉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란 뜻으로 쓰였다는 해석도 있다.
애도에 관한 흔한 오해 중 하나가, 애도는 일시적인 ‘여행‘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훌쩍 떠났다가 일정 시간이지나 감정이 가라앉고 생각이 정리되면 그 후에 다시 애도를 하기 전의 자리로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마치 여행과도 같은 과정이라 여긴다. 하지만 고인과의 이별이 영원하듯 애도 또한 실은 영원한 과정이다. 그렇기에 애도란 여행보다는 ‘여정‘에 가깝다. 나도 여전히 희수를 잃고 애도하는 과정에 있고, 아마평생 그를 애도하며 살 것이다. 애도의 모습은 매 순간 다르겠지만 나는 그를 평생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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