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허상에 집착해서 쉴 새 없이 자신을 핥아대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마침내 찾을 때까지는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무엇을 위해 이 고단함을 견뎌야 하는지,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이 인생의 전모를 논리적 언어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삶은 종종 부조리와 경이를 간직한 모호한 현상이므로, 때로는 구름을 술잔에 담듯 삶을 담아야 한다. 드립은바로 언어로 된 그 술잔이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랬던가, 인간은 벌거벗은 현실을 살지않고 언어로 만든 집에서 산다고. 그 집은 하루아침에 다 지을 수 없다. 언어는 어느 날 갑자기 한 개인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는다.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기존 언어를비틀고 전용하고 전유하며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드립도그와 같은 전유의 소산이며, 그 전유의 행위 속에 인간 고유의 자유가 깃든다.
과연 드립은 기존 언어를 효과적으로 비틀 때 성공한다. 앞에놓인 음식을 먹고 싶지 않을 때 "오늘은 입맛이 없어서 못 먹겠어"라고 하면 그것은 드립이 아니다. "오늘은 헝그리 정신이 없어서 못 먹겠어"라고 해야 비로소 드립이다. 이 드립은입맛 그리고 헝그리 정신이라는 말의 의미를 숙지하면서 비틀 수 있기에 가능하다.
이런 드립이나 치고 있기에는 세상일이 너무 심각하다고? 분노하기에도 바쁘다고? 그렇다. 실로 이 세상은 분노할 일로가득 차 있다. 인간에게는 주어진 현상보다 나은 상태를 꿈꾸는 능력이 있고, 그 능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분노가 고삐를 잃고 극에 달했을 때, 그 분노는 혐오로 바뀌기도 한다. 그래도 분노와 혐오를 날것 그대로 발설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날것 그대로 혐오하는 순간, 바로 그 혐오에 패배하는 것이며, 그런 패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린 좀더 심미적으로 패배할 수 있다. 드립 인간은 분노에 떠는 순간에도 유연하게 몸을 돌려 상대 정신의 빈 곳을 가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