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모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당대의 가장 강력한 매체인 연극에 반대하고 문자의 광범위한 사용을 우려했으나 그의 철학적 대화는 그리스 비극과 함께 도서관과 개인 장서에서 살아남았다. 무엇보다도 솔론이 이집트 사제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이스 근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그의 저작을 소장했다." 그리스 희곡과 플라톤의 대화가 살아남은 데는 이집트 상형 문자보다 사용하기 쉬운 그리스 알파벳 덕분에 훨씬 높아진 식자율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희곡과 철학적 대화가 널리 유통되었다는 뜻이다. (같은 이유로 이집트는 훨씬 더 쉬운 민중 문자를 개발했다.) 글을 널리 배포하는 것은 이집트 사원 같은 학문의 보루에 보관하여 철저하게 지키는 것만큼이나 효과적인 생존 메커니즘이었다.
문화가 살아남는 또 다른, 어쩌면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모방이었다. 즉 새로운 세대가 문화적 관행을 지켜나가도록 영감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과 같이 사람에서 사람으로전해지는 방법을 쓸 때에는 석판이나 알파벳에 의존하기보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에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테네 외곽 올리브 나무 숲에 철학 학교를 세웠다. 이곳은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이에 따라 아카데미아라는 단어는 다양한 철학 학파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플라톤의 제자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의 철학을 크게 바꾸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대부분 교육을 중요시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들이다. 이들의유산은 이집트 사제들처럼 문자와 사원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도서관과 사원은 파괴될 수 있고 문자 체계는 이집트 상형 문자가 그랬듯 잊힐 가능성이 있으니 문화의 저장에만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마저 화재로 불타서 수많은 그리스 문헌이 파괴되었고, 기독교 수도사들이 기독교 이전 시대의 문헌은 필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또다시 수많은 작품이 사라졌다. 플라톤의 사상이 살아남은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한 세대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철학이 널리 알려지고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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