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젖은 흙 속에서 깨어난 나무 향기가 밀려온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탯줄을 통해 몸에 스며들었던 것 같은 그 내음은, 내가 어떤 방황을 하더라도 결국 대지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툭 툭 소리가 점점 커지는 하늘을 겨우 가린 우산 아래서, 비가 부딪치며 짙은 색이 천천히 번지는 산책로 담벼락을 한참 바라보기도 한다. 비가 오는 이 예외적인 하루를 좋아한다. 하루라는 낱말은 아주 가볍고 보드라운 어떤 생명 같아서 발음할 때마다 선물처럼 반갑고, 어제의 시간으로 보내야 하는 일이 아쉽다.
날씨가 우리를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날씨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생각 또는 철학도 날씨가 만들어낸다. 독일의 검은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숨기 좋아했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오두막에 폭풍이 치고 눈이 오면 그때가 철학자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오두막을 눈으로 덮어 따듯하게 만드는 날씨는 생각의 알을 암탉의 체온으로 데우는 부화기이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날씨는 늘 인간에게 겸손에 대해 알려준다. 그리스를 정복하려 했던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Xerxēs는, 그리스로 가는 길목인 헬레스폰투스 해협에 다리를 놓아 군사들을 전진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다리가 완성되자마자 바람이 불어와 다리를 쓸어가버린다.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투스 해협에 대해 분노해 바다에다 채찍 삼백 대를 때리고, 족쇄도 한 쌍 던져넣는다. 헤로도토스Ηρόδοτος의 《역사》 7권이 전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날씨는 위대한 대왕을 무시하고 제 할 일만 할 뿐이며, 날씨를 굴복시키려 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미련함만을 뽐내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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