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를 위해, 영어 실력을 위해 차근차근 꾸준히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게 물론 가장 바람직하다. 그런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 훌륭하니까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고 말해도 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나의 재주는 그런 바람직하고 쓸모 있는 목표를 포기하는 것뿐이다. 나는 그들처럼 훌륭할 수 없다는 걸 냉정하게 인정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재미가 시작된다. 이 재미는 실용적이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꽤나 오래 나에게 생생하게 남는다.
여전히 엉망진창인 문법으로 말하지만 내가 미국인과의 대화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건 바로 이 공부 때문이었다. 상대방의 말을 다 못 들어도, 내 영어가 원어민의 것과 같지 않아도, 대화 전체의 흐름과 구조는 내가 한 수 위에서 보고 이끌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그렇게 생겼다. 이건 책으로도 배울 수 없고, 다른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건 나에게 딱 맞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의 성격,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 내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맞는 대화 주도법이다. 일반적인 방법은 나 자신에게 딱 들어맞을 수 없다. 반대로 나에게 딱 들어맞는 방법을 찾으면 평생 영어가 즐거워진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발견한 건 바로 ‘덕질’이었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거였다. 이렇게 영어를 쓰고 싶었다. 영어 공부도 아니고, 영어를 덕질하는 것. 나만의 방식으로 오로지 내가 원하는 만큼 그렇게 내 멋대로 영어를 대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덕질은 그런 것이었다. 아무런 실용적인 목적이 없지만 ‘이건 나의 이야기야’라는 확신을 만들어가는 과정. 미국 시골로 이사 오고 나서, 도서관과 서점을 누비며 농사, 목공, 바느질과 뜨개질, 요리, 식물채집, 가축 기르기, 비누와 화장품 제작 등을 다루는 온갖 종류의 실용서를 탐독했다.
시골에 이사 왔으니 이런 것들을 배우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저자들이 어떤 인생의 경로를 지나서 책까지 쓸 정도로 기술을 익히게 됐는지 그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었다. 한 사람마다 다 달라서 절대로 복제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에 탐닉했다.
덕질이 단순히 자기만의 이야기, 자기만의 즐거움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강조하거나 획일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이 세상 전체의 너그러움을 키우는 시도가 아닐까 싶었다. 자기 계발의 수단이 된 영어지만, 그것이 단지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만의 즐거움, 나만의 이야기, 자기 탐구의 수단이 된다면 영어 공부가 오래오래 즐겁지 않을까. 내키는 대로 하는 영어 공부가 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살아도 좋다는 그런 작디작은 허용이 될 수도 있다.
외식 사업가 백종원 씨는 한 예능에서 자신의 중국어와 스페인어 실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출발은 중국 음식과 멕시코 음식을 너무도 좋아한 것이다. 그래서 현지에 가서 음식을 자주 먹었다. 처음에는 통역을 통해서 음식을 주문하고 질문을 했다. 그러다가 현지 식당에서 쓰는 메뉴판을 여럿 구했다. 그리고 그 메뉴판을 샅샅이 공부했다. 발음이며 단어의 미세한 차이까지. 점차 요리사에게 직접 질문하기 시작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그에 대해 묻고 식재료와 맛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중국어도 스페인어도 원어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가 됐다고 한다
백 씨는 요리사와 시장 상인 들과 재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걸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온전히 생각에 있었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만화를 그토록 많이 보면서 치즈에 대한 궁금증이 없었을까?’ 그 생각을 계속하는 게 재밌었다. 그 생각을 계속 끌고 나아가는 게 목표였다. 따라서 나는 치즈 이름을 알고 먹어보고 그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과 무리 없는 대화를 나누기만 하면 된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내 생각의 영역이 넓어지는 게 좋다. 나는 영어로 내가 무엇을 하는 걸 좋아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영어를 완벽하게 잘하기 위해서 기초에서 출발해 수준별로 접근하지 않는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너무도 불확실한 목표라 남들이 쉽다고 정해놓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목표가 확실할 때, 그것이 나의 즐거움일 때는 출발은 곧 끝이기도 하다.
가령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트의 치즈 코너에 있는 치즈를 다 먹어보겠다는 걸 목표로 세웠으면 하나씩 사서 발음을 알아보고 스펠링과 맛을 맞춰보면 된다. 역사나 먹는 법, 혹은 회사에 대한 조사도 해본다. 당연히 영어 공부가 된다. 영어를 공부해서 그런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관심 있는 치즈를 파고들다 보면 영어가 따라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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