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 김누리 교수의 대한민국 교육혁명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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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울한 나라‘이다 보니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최근 이케아에서 38개국을 대상으로 한 ‘2023년 소비자 조사‘를 발표했는데, "집에서혼자 있을 때 가장 즐겁다"는 응답을 한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높은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이 결과 또한 치열한 경쟁의각자도생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고달픈 삶을 반증하는 것이라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결국 이 모든 지표와 많은 석학들의 지적이 가리키는 총체적난국의 원인은 바로 경쟁입니다. "세계 최고의 우울증"(마크 맨슨),
"세계 최저의 출산율"(《뉴욕타임스》》, "세계 최악의 갈등 국가"(킹스칼리지), "세계 최고의 홀로주의"(이케아), 이러한 암울한 ‘세계 기록들‘의 뿌리에는 모두 극단적 경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경쟁,특히 경쟁 교육이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만든 것입니다. 이를 해소하는 것은 이제 단순한 교육의 문제를 넘어 국가 존립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경쟁이 자연스럽고, 긍정적이고, 불가피하다는 생각은 한국인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생각이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처럼 ‘지배적인 잘못된 생각‘을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조금 학문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데올로기란 ‘특정 사회나 집단에서 지배적인 잘못된 관념체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은 ‘경쟁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잘못된 관념체계‘에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가 경탄하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악의 불평등, 세계 최저의 출산율 등 ‘지옥 같은 사회‘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 3각의이데올로기 체제 때문입니다. 저는 경쟁-능력주의 공정의 3각 이데올로기 체제를 한국 사회를 야만적인 사회로 만든 가장 결정적인 관념체계라고 보고, 이를 ‘야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릅니다.
이 잘못된 3각의 이데올로기 체제가 한국인의 의식을 완전히장악한 결과, 한국인은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도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약탈적 야수자본주의, 천박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이에 저항하기는커녕 자발적으로 자신의 불행에 스스로를던지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 이론의 대가 테리 이글턴의 말을빌자면, "가장 어려운 해방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지요.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는 폭군‘이라고 했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경쟁 교육은 야만‘이라고 했지요. 이제 능력주의 경쟁교육을 끝내야 합니다. 이제 폭군과 야만의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 이제 이 야만적 폭군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구해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행복하고, 교사가 행복하고, 학부모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민주사회, 정의로운 복지국가로나아갈 수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그 사회의 영혼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영혼‘은 무엇인가요.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어떻게대하고 있나요. 그들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있나요. 그들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들이 개성을 기르고 자유를 누리도록 무엇을 돕고 있나요. 그들이세계의 고통과 억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연대하는 세계시민으로 자라도록 이끌고 있나요.

21510하지만 민주정부가 키우고자 한 건 애초에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을 ‘자원‘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을 천연자원(natural resources)에 대비되는 인적 자원(human resources)으로 본 것이지요. 인간을 자본의 ‘부품‘으로, ‘원료‘로 만들고자 한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한국인은 민주정부 아래에서 ‘인간‘이 아니라 ‘자원‘으로 키워졌습니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끔찍한 악몽이지요. 저는 이러한 도구적 교육관이 한국 자본주의가 초래한 유례없는 불평등보다 한국 사회에 더 장기적이고심원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너무도 인간을 경멸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스펙은 영어 ‘specification‘의 약자로,
원래 무기의 사양, 즉 무기의 성능이나 특성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이 총은 사정거리가 500미터이고 인간을 동시에 5명 살상할수 있다. 이런 설명을 할 때 쓰이는 말이 스펙입니다. 이런 끔직한말을 한 인간의 능력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쓴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저는 스펙이라는 말이 갖는 유일한 메타포적 미덕은 그것이인간을 죽이는 살상무기의 성능을 뜻하는 말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적 자원‘ ‘노동의 유연화‘ ‘스펙‘이라는 말에서 살펴보았듯이,
현대 사회의 지배는 근본적으로 언어에 의한 지배입니다. 다시말하면 언어를 통해 인간의 의식을 장악함으로써 지배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돌아보면, 그것은 이미 근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프랑스 대혁명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합니다.

천재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주입니다. 이런재주는 아무나 갖지 못하지요. 그래서 천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딱 하나만 잘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골고루 잘하는 천재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범재(凡)‘입니다. 평범한 재능인 것이지요. 만약 어떤 천재가 한국 교실에서 교육받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열등생으로 낙인찍혀 교실에서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을 골고루 잘하는 학생을 모범생, 우등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학생들이 스카이에 가는 거지요. 천재는 스카이에 가기 힘듭니다. 실제로 제가 4년간 서울대에서 가르치면서 만난 학생들 중에서 ‘아, 이 아이는 천재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경이로운 수준의 강박적 성실성을 가진 학생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성실할 수 있을까 놀라면서, 한편으론 이 착한 아이들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대한민국은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입학시험을 컴퓨터가 채점하는 나라입니다. 컴퓨터가 채점을 한다는것은 정답이 명명백백하다는 말입니다. 정답이 분명하지 않으면기계로 채점할 수 없지요. 사지 혹은 오지 선다형의 문제를 내고그중에 답 하나를 선택하면 그게 맞는지 틀린지 기계가 판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컴퓨터에 물어보면 다 아는 정답을 왜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특히이런 식의 지식 교육, 암기 교육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전혀맞지 않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많은 능력을 인공지능, 로봇 같은 초고등력 기계가 대체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미래의 교육이 길러주어야할 능력은 도저히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판능력, 사유능력, 상상능력, 공감능력이지요. 그리고 이런 능력은 기계가 측정할 수 없습니다. 죽은 지식을계속 아이들 머릿속에 처넣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구시대

"어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이 몰려와 묻는 거예요. ‘너는어떻게 생각하니?‘ 수업 시간마다 이렇게 물으니까 몹시 곤혹스러웠어요. 일주일 내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 공세를 받았는데, 저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대답을 못했어요. 그래서 주말에방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죠. ‘나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내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라는 사실 말이에요."

독일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무사유는 범죄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무지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무사유는 용서할 수 없다. 무지는 지식의 부정 혹은 부재이지만 무사유는 의미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사유하지 않는 것, 특히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는것은 단순한 나태나 태만을 넘어 범죄에 동조하는 길이라는 뜻이지요.

다시 말하면 지식만 있고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의미를 성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처럼 의미를 성찰하지 않는 자들이 결국 20세기 최악의 정치적 비극을 낳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나아렌트가 지목한 대상은 무엇보다도 나치 시대의 사유하지 않는독일의 판사들이었습니다. 이 판사들을 아렌트는 ‘넥타이맨 살인자‘라고 불렀지요. 그들은 법조문에 나와 있는 지식을 그대로 적용할 뿐 그것이 뜻하는 의미를 사유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것이야말로 범죄라는 거예요.
달달달달 외운 지식을 정답이라고 찍다 보면 사유능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의미를 부정함으로써 결국은 범죄자의 하수인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독일의 참혹한 역사, 아우슈비츠의 비극

이 자리에서 안나 뤼어만은 18세 고등학생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의미에 대해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국회라고 하는 곳은 기본적으로 대의기관입니다. 그러므로국민이라는 모집단을 그대로 대의하는 국회가 가장 이상적인국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독일 국회에서는 10대가 거의 대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10대의 의사를 대변하기 위해 국회에들어갔습니다."

안나 뤼어만은 자신의 국회 입성의 의미를 ‘세대 대표성(Generations-representation)‘이라는 말로 함축했습니다.
10대를 대변하는 역할이 자신이 국회의원이 된 의미라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중앙대학교에서도일정한 민주주의가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총장 직선제지요. 그런데 두산이라는 재벌 기업이 중앙대를 인수한 이후에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두산이 중앙대학교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총장직선제를 없앤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총장 임명제를 신설하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학내 구성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멋대로 총장으로 임명한 것이지요. 대학의 민주적 거버넌스를 파괴하고 독재적 전횡을 제도화한 것입니다. 이로써 대학 민주주의는 단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이룬

저는 독일에 갈 때마다 주로 독일 대학에서 머뭅니다. 베를린대학, 프랑크푸르트 대학, 브레멘 대학 등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특히 대학 식당인 멘자에 가면 지금도 독일 대학생들의 관심 사안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학생들이 건네준 팸플릿만 해도 한 줌이 됩니다. 생태 기후변화문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유럽연합 내의 국가 간 차별 문제 등이들이 다루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억압과 고통에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전쟁과 관련된 논쟁이 독일의대학에서 뜨거운 이슈일 것입니다. 요컨대, 정치적 공론장으로서의 대학 캠퍼스가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대학 캠퍼스에 넘쳐나는 유인물들은 오로지 취업 정보뿐입니다. 이렇게 대학이 탈정치화되었다는 것보다
‘대학의 죽음‘을 더 확실하게 알려주는 부고가 또 있을까요. 우리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이는 너무도 끔찍한 일입니다.

스를 둘러보세요. 대학의 미화원, 경비원이 어떤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를 보면 말문이 막힙니다. 그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보내는 곳은 말이 휴게실이지 도무지 사람이 쉴 수 있는 장소가아닙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정말 부끄럽고 화가 납니다.
독일에서는 가장 민주적인 곳, 가장 권력 비판이 예리한 곳, 가장 사회 정의가 확실하게 구현된 곳이 대학입니다. 그리고 이런대학에서 배운 학생들이 사회로 퍼져 나가서 ‘새로운 독일‘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학이 가장 비민주적인 곳, 가장 권력 비판에 둔감한 곳, 가장 사회 정의와 거리가 먼 곳이 되었습니다

.빌헬름 폰 훔볼트는 "대학이란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소우주"라고 했습니다. 독일 대학은 이 말대로 유토피아를선취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대학은 ‘가장 끔찍한디스토피아의 공간‘으로 전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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