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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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급하다. 그래서 남이 찾은 답안을 빌려서 빨리 사용해보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성공적인 사업의 해답, 공부의 해답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그런데 남들이 찾아낸 해답이 자기 자신에게도 꼭 맞던가? 얼마간 참고는 될지몰라도 결코 자신을 위한 해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해답이란 그 해답을 얻어낸 질문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있으며, 따라서 활짝 핀 꽃송이를 꺾어 가지듯 해답만을 똑따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해답이란 문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다.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해답의 범위와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는 각자가 앓는 저만의 질병처럼 각자의 삶으로부터만 피어오른다.

가령 프랑스 작가 클로드 시몽 Claude Simon은 자신의 문체에대한 고민에 빠졌을 때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 William Faulkner의 소설을 접하고서 어떻게 문체를 구사해야 하는지 해답을찾았다. 포크너의 소설은 클로드 시몽 이전에도 읽혔고 그 이후에도 읽히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의문제를 품고 있던 시몽에게만 해답이 되어준 것이다. 러시아민요 또한 많은 사람의 귀에 울려 퍼졌지만, 교향곡을 작곡하며 악상에 대한 고민에 빠졌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에게만해답이 되어 민요조의 분위기를 지닌 <7번 교향곡>의 4악장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해답은 널려 있지만, 제대로된 문제를 가진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는빈털터리가 그것을 집어 들면 그저 돌멩이, 아니면 영문 모를 ‘42‘라는 숫자로만 나타난다.

소설로 돌아가보자.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
이 문제이기나 한 것인가? 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문제는 모든 것을 노력 없이 단번에 알아내겠다는 미련한 욕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마치 전혀 공부하지 않은 이가 침대에 빈둥거리며 누워 내일 시험에서 백점 맞을 궁리를 하는 것처럼. 저질문의 정답은 확실히 ‘42‘이다. 그러나 질문을 자신의 삶에서절실하게 피워내지 못한 이에게 질문은 추상적인 남의 질문이며, 따라서 해답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저 거대한 문제가 제대로 된 질문의 모습이 되기 위해선, 의미심장하게도 ‘지구‘라는 컴퓨터가 자신의 장구한 전 역사를 조금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하나 몸소 체험해야 했다.

기식자의 행동 방식을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다. 아들, 딸, 아빠, 엄마 등 차례로 나타나는 기생충들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거짓말이라는 ‘소음‘
을 만들어내어 숙주에게 진짜 정보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기생충들은 말(거짓말)을 통해 숙주 속에 침투한다. 기존의 메시지를 차단하는일종의 ‘소음 만들기‘가 기생충이 숙주에 침입하는 방식인 것이다. 기생충 서사는 많은 경우 숙주의 관점에서 공포 이야기로 만들어졌지만(‘에일리언‘ 시리즈), 기생충의 관점에선 정보를 속이고 숙주 속에 들어앉는 즐거운 이야기가 된다.

말이 통하지 않게 하는 소음을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인물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리스도이리라. 헤롯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왕국에 침투해 숙주의 왕 자리를 차지하려는 명백한기식자, 박멸의 대상이다. 결국 이 기자가 한 일은 무엇인가? 바로 ‘복음‘이라 불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소음을 만들어 기성 종교와 사람들 사이의 정보 체계를 차단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 기식자는 지금껏 없었던 하나의방향을 창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식자라는 개념을 숙주의 관점에서 박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 개념의 더 넓은 가능성에 대해 눈감는 일이다. 기자는 숙주를 새로운 차원에, 새롭게 창조된 길 위에올려놓는 자이다. 그런 점에서 생리학자 레리슈René Leriche의말은 매우 흥미롭다.

질병은 인간에 붙어살고 있는 기식자, 그것이 탈진시키는 인간을 뜯어먹고 살아가는 기식자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생리학적인 질서의 일탈, 처음에는 미미한 그런 일탈의 결과를 본다. 질병은 결국하나의 새로운 생리학적인 질서이다. 치료학은 병에 걸린 인간을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적응시켜야 한다."

이 말이 단지 생리학에만 해당하는가? 그렇지 않다. 영화<기생충이 한국 사회에서 가리켜 보이는 지점 역시 저 말에포개진다. 우리의 사회적 벽들은 타인(기식자)의 개입을 통해부서질 수밖에 없다. 타인의 침투는 방어되거나 거부될 문제가 아니라, 침투받은 자를 변화하게 만드는 문제, 새로운 신체와 질서를 탄생시키는 문제이다.

단지 예술작품만이 반복을 기둥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반복은 우리가 살아가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불쾌한 것을 피하고 쾌락을 좇는 우리의 성향을 배신하는 우리의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나쁜 일을 겪으면 잊기보다는 맛난 먹이처럼 되새김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며, 한밤중이불킥을 하면서 낮의 실수를 계속 반추한다. 프로이트SigmundFreud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적절히 분석했듯, 이는 우리에게 침투한 자극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한 행위다. 어떤 문제 때문에 악몽을 계속 꾼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그 문제의 자리로 돌아가 해결해보기 위해서다.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 있었던 자신의 실수를 끊임없이 반추한다면, 그문제를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변명해 실수의 비극적 충격을완화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반복을 한다.

철학은날씨를바꾼다한스도 의식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쇼샤는 한스가 초등학교 시절 호감을 품었던 히페라는 소년과 닮았다. 한스는 동성인 히페를 연인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런데 히페에 대한호감은 히페를 닮은 쇼샤에 대한 사랑이 탄생하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과거의 히페는 현재의 쇼샤에 대한 사랑속에서 반복된다. 그러니 반복은 어떤 것이 동일한 모습으로다시 찾아온다는 뜻이 아니다. 즉 히페는 히페로서 반복되지않는다. 히페가 쇼샤로 변신하고서 반복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반복은 서로 다른, 즉 차이 나는 것들(히페와 쇼샤)사이에서 생긴다.

이런 까닭에 현대의 중요한 반복의 사상가 들뢰즈GillesDeleuze는 반복을 ‘차이의 반복‘으로 정의했던 것이다. 히페는쇼샤라는 가면으로 위장하고서만 반복되고, 히페에 대한 소년의 호감은 쇼사에 대한 이성적 애정으로 둔갑하고서만 반복된다. 그러니 반복은 잘 보존된 집안의 보물이 상속되듯 동일성을 유지한 무언가가 되돌아오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복의 다른 이름은 변신이며, 그런 까닭에 반복이 이루어짐에도새로운 무엇인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반복은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과거의 것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속에서 과거의 것을 반추하며, 이를 통해 비로소 제대로 과거의 의미를 이해한다. 이런 이해 방식의 비밀을 잘 보여주는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의 《고백록》이다.

(...) 당신은 저와 함께 계셨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않았습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당신(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늦게 이루어지는 반추속에서다. 배움이란 늘 늦게 되새겨보는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고, 과거는 현재에 반복됨으로써만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 반복의 체험을 우리는 프루스트 Marcel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유명한 마들렌 과자 체험에서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마들렌 체험은 어른이 된 후반복한 마들렌 체험 속에서야 비로소 그 행복한 비밀을 알려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어떤 것을 겪을 당시엔그 의미를 모르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반복할 기회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된다.

과거란 먼지 쓴 유물처럼 사망한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함을 통해 현재에 반복된다. 과거를 다시 시작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오늘을 위한 역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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