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사람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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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공들여 말하기, 읽기는 공들여 듣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신은 공들여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공들여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저는 공들여 듣기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인데요. 어쩌다보니 공들여 말하기를업으로 삼아 지금도 공들여 말하는 사람이 되어 있네요.
이상한 일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요.

고전이란 해석으로 탕진되지 않은채 온전하게 살아남은 책입니다. 읽고 또 읽어도 닳지 않는 책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도 소문을 등지고 커다래지는 책입니다. 우리 곁에 유령(교차로의 유령!)처럼 남아 일상에 스며드는 책입니다. 작가는 죽고 없는데 이야기는 살아남아 여전히 세상을 여행하는 책입니다. 시간의 상투성과 세월의 무자비함을 견디고 목소리의 생생함을 간직한 책입니다.

"이봐요! 길을 잘못 들었으면 그냥 잘못 가세요! 위험하니까 계속 잘못 가시라고요!"
저는 목례하며 재차 사과했습니다. 운전을 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그냥 잘못 가라. 이 말이 화두처럼 다가와 그날이후 지금까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꼭 운전에 국한된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이미 길을 잘못 들었는데무리해 움직이다. 그러니까 한 번도 틀리지 않으려고 하
다 사고가 나는 거구나, 깨달았지요. 길을 잘못 드는 것,
헤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덜 다치는 거라고요. 무엇보다 누군가 제게 ‘잘못 가라‘고 지시하는 일이 신선했습니다. 다들 제대로 가라, 틀리면 안 된다, 잘 가야 한다고 주문하는 세상에서요. 도처에 스승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말을 듣기만 한다면요.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다. (39쪽)
나는 좋은 산문의 조건을 이렇게 꼽는다. 말하듯 자연스러울 것, 관념이나 분위기를 피우지 않고 구체적으로 쓸 것, 작가 고유의 색이 있을 것, 읽고 난 뒤 맛이 개운하고 그윽할 것. 『무서록』은 이 조건을 모두 갖추고도다른 장점이 많다. 좋은 작가의 글이 그렇듯 소소한 소재로 뜻밖의 깊이를 끌어낸다. 고아한 문체를 뽐내지만친근하다. 한자어와 고유어가 균형 있게 쓰인, 옛 어투를 읽는 재미가 있다.

고전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다. 이태준 역시 「고전」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완전히 느끼기 전에 해석부터 가지려 함은 고전에틈입자임을 면하지 못하리니 고전의 고전다운 맛은알 바이 아니요 먼저 느낄 바로라 생각한다."(115쪽) 그러니 좋은 책은 알아먹기보단 우선 ‘느껴보기‘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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