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 이벽
황보윤 지음 / 바오로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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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를 버리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고단한 영이 지루한 싸움을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 걸귀가 육을 장악했다. 영이 떠난 육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눈은 희번덕이며 먹을 것을 찾았고 입은 흙이라도 퍼먹을 기세였다. 네발로 기는 한 마리 금수, 그것이 바로 나였다. 궁지에 몰리면 누구든 금수가 될 수 있었다. 자네는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

- 공이 말씀하신 것을 불가에서는 아집이라 부르오. 아집은집착과 번뇌를 끊으려고 힘쓰는 것을 말하오. 참선의 목적은 집착과 번뇌를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정심을 기르는 것이지 열반을 바라며 고행하는 것이 아니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퍽 힘든 일이오. 나도 그렇다오. 허나 우리가 믿지 않는다고 하여 진리가 사라지는 것은아니라오.
진리가 무엇인지요?
-- 그것은 거짓이 없는 참된 이치를 말하오. 보시오, 별이 지고 나면 반드시 해가 뜨지 않소? 세상이 시생한 뒤부터 지금까지 해가 뜨지 않았던 날은 하루도 없었을 것이오. 이같이 낮밤이 바뀌는 일처럼 변하지 않는 이치를 진리라 하오.

뒤판은 한 장만 있어도 되니 그런 것이 아니옵니까?
- 한장으로는 반쪽밖에 못 만들지 않느냐?
- 아씨도 참, 한 장을 똑같이 본떠서 두 장을 만든다는 것을모를까 봐서요?
-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것을 진리라고 한단다.

마음을 믿지 말게나. 남은 물론 자신마저도 속일 수 있는것이 마음이라네. 무엇보다 속마음이 자신을 속이지는 않는지낱낱이 드러내어 살펴야 하네.
덕을 행하기 전에 속내를 열어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네. 첫째, 그것이 덕을 쌓는 일인지 물어야 하네. 둘째, 자랑하기 위함이 아닌지 물어야 하네. 셋째, 주변 상황에밀려 행한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하네.

그렇다고 할 수 있네. 남을 의식하는 순간 덕은 악한 마음으로 기울고 마네.
- 그것은 지나치게 엄격한 처사가 아니옵니까?
-그렇지 않네. 마음을 살피지 않으면 교만한 입이 가만히있지를 못하네. 입은 자신이 행한 일을 온 동네에 알려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할 것이네. 줄 때는 되돌려받을 생각을 말고,
도울 때는 은밀히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높은 곳에서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나? 세상에 도덕군자를 자처하는 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일세.
이 정도면 선하다는 교만이 스스로를 악하게 만드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있지 않으며, 온전히 선하거나 뼛속까지악한 사람이란 없네. 선의 원칙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네.

첫째는 복오, 교만은 사자처럼 사납다. 이는 겸손으로 눌러야 한다. 둘째는 평투, 질투는 남이 잘되는 것을 미워하고 남이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괴는사랑하는 마음과 용서로 이겨내야 한다. 셋째는 해탐, 탐욕은 손아귀에 틀어진 욕망이다. 이는 베풂으로 놓아야 한다. 넷째는 식분, 분노는 타오르는 불길과 같다. 이는 참음으로써 꺼야 한다. 다섯째는 색도, 식탐은 도랑물을 집어삼키듯 끊임없이 먹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절도로써 막아야 한다. 여섯째는 방음, 음욕은 세찬감정의 불길이다. 이는 마음을 정바르게 하여 막아야 한다. 일곱째는 책태, 게으름은 둔하고 힘이 빠진 말과 같다. 이는 부지런함으로 채찍질해야 한다‘

사람은 기억하는 일과 기억한 것을 떠올리는 일을 할 수있습니다. 기억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눈,
코, 입, 귀, 살갗을 통해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을 두루종합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오감을 통한 기억은 금수도 가능하나 사유를 통한 기억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각기 다른 곳에 간수되는데 자극으로 얻은 기억은 정수리뒷부분에 모아지고 사유를 통한 기억은 영혼에 각인됩니다.
이벽은 잠시 말을 끊었다. 아무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계속하겠습니다. 다음은 기억을 떠올리는 일입니다. 이 일또한 두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겪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이고둘째는 미루어 짐작하는 일입니다. 금수는 경험을 떠올리는을 할 수 있습니다. 개가 냄새로 주인을 기억하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허나, 사람은 추론이 가능합니다. 노랑나비를 보며같은 빛깔인 영춘화를 떠올리고 수십 년 전에 입었던 누님의 노란 저고리에 이르는 과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비들은 숨소리를 죽였다. 생소한 말이었으나 논리가 타당했다.

사람이 금수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금수는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존하고 번식하며 살다가 생을 마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이없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이루어진 생혼과 각혼만 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람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평생에 걸쳐 학문하는 까닭이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입니까? 그것이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자의 도학과 왕양명의심학과 노자의 무위와 석씨의 해탈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것은 바로 영혼의 숭고입니다. 사람만이 가진 숭고한 영혼은 육에 속하지 않았기에 사후에도 영원토록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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