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peut, je crois, se passer de bonheur personnel,
si on a des amis, des aimés heureux; car leur bonheur est une lumière qui nous baigne doucement.
행복하게 지내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개인적인 행복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들의 행복이 우리를
부드럽게 비춰주는 빛이 되기 때문이다.
- 로망 롤랑 Romain Rolland (작가)

ㄻ생존 이상을 생각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관념적 논쟁은 잉여적 사치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생존이 다급한 사람에게는 두 걸음 전진하기 위한 한 걸음 후퇴마저 사치이자 여유로 여겨질 수있다. 가난한 자들이 우파 정부에 표를 던지는 논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노란 조끼를 입고 일어선 노동자들은, 생존하는 삶으로 이들을 전락시키려는 정부에 맞서 저항했다. 무력하게 떠밀려가 꾸역꾸역 생존을 방어하는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을 누릴 권리를 지켜가기로 했다. 존엄한 삶은 그 가치를 인지하고 지켜내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아무도 의심하지않는 한국 사회에서, 정부는 주 69시간 노동과 2024년에도 여전히 1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시간당 최저임금을 생존의 틀로 제시한다. 생존이 삶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좀처럼 대기중에 유포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 삶과 생존이 구별되지 않는세상에 진입해버려, 그 두 가지를 식별할 감각을 상실한 것처럼.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성공을 거두자, 우린 단지 ‘더 잘 먹고사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Survivre c‘est mourir.
Il faut patiemment et sans relâche
construire, organiser, ordonner.
생존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
끊임없이 건설하고 조직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Scrupule(스크뤼퓔)은 어떤 행동을 취함에 있어서 미적거리게하는 마음속 걸리적거림이다. 우리말로는 불안감, 가책, 세심함혹은 소심함이라고도 해석된다. 하나의 단어가 어찌 이토록 다른 결의 의미들을 담고 있는 것일까?
스크뤼은 라틴어 scrupulus에서 온 단어로 자잘한 모난 돌을 뜻한다. 신발 속으로 굴러들어 와 자유롭게 걷는 것을 방해하는 작고 모난 돌은 얼핏 부정적 의미로만 느껴지지만, 작은 걸림돌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살피는 세심함에 초점을 맞추면 긍정적인 말이 될 수 있다.
형용사 scrupuleux(스크뤼퓔뢰)는 신발 속에 들어온 까칠한 작

"그녀는 스크뤼퓔뢰즈하다 Elle est scrupuleuse"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며, 그 소리가 들리면 멈출 줄 아는 세심한 도덕률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태도가 시간의 지체를 초래할지라도 결과와 상관없이 그 사람 마음속에서 일던 갈등이 드러내는 성정, 즉 상대를 헤아릴 줄 아는세심함, 윤리적 엄격함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없이‘라는 뜻의 전치사 sans 이 앞에 붙은 ‘sanssculpule(거침없이, 아무 망설임 없이)‘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느껌을 전달한다. 가차 없이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 망설임 없이 병든 강아지를 유기하는 주인처럼 신발 속 작은 양심의돌멩이들의 걸리적거림을 지르밟고 신속히 실용적 선택을 하는사람의 태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양심의 거리낌으로 머뭇거리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결과보다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드러낸다. 머뭇거림, 양심의 불편함이 당장 어딘가에 가많아 또렷한 결과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서 걸리적거리는 작은 돌멩이의 존재는 그의 인간다움을 투영하는 하나의 존중받을 만한가치가 되는 것이다.
잠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행위가 사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계기를 전하는 것처럼, 양심의 돌멩이가 움직일 때 머뭇거리는 심성은 사람들 사이에서 숨 쉴 공간을 제공한다. 인공지능을통해 세상을 작동시키고자 하는 시대가 눈앞에 와 있다. 인간의능력은 인공지능의 신속, 정확함에 이를 수 없을 터이나, 두근거리는 심장과 번뇌하고 망설이는 인간의 소프트웨어를 인공지능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과 비슷한 결의 마음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Marguerite Yourcenar는 이렇게 표현했다.
C‘est au moment où l‘on rejette tous les principes qu‘il convient de se munir de scrupules.
모든 원칙을 버릴 때 우리가 지녀야 하는 것이 스크뤼퓔이다.

모든 성문화된 원칙이 사라진다 해도 각자 양심 속 사각거림에 반응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세상은 제대로 굴러갈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