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바로 여기부터가 우리가 도티와 갈라져 ‘나의‘ 좋은죽음을 고민할 지점이다. 앞서 말했듯 ‘좋은 죽음‘이란 결국 살아있는 자들이 그들의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다. 역시 앞서 말했듯, 그것은 용기 있는 시도이다. 하지만 이 시도는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 고인들의 사정을 임의로 고정시켜버릴 위험또한 크다

그러면서 알게 된 새삼스러운 사실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거의 모든 경험이 책이나 글로 나와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재가 있다면 ‘죽음의 순간‘, 말하자면 ‘죽음의 실체‘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필자들이 이렇게나 많지만 죽어본 필자는 없고,
고스트 라이터는 있지만 ‘고스트‘ 라이터는 없기 때문이다. 죽음그 자체는 죽어보지 않은 자들의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죽었다 살아난 ‘임사체험‘ 기록은 굳이 따지자면 믿음의 영역에속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영역을 인정하고 싶은 생각은 아직 없다.) 어떤고인도 불쑥 나타나 "죽어보니 병원 냉동고 속에 들어가 있는 게그렇게 싫더라", "난 집보다 병원이 훨씬 마음 편하던데?", "난 방부처리해주는 거 좋아. 한쪽 얼굴이 썩어가는 모습보다는 TV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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