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적으로 자살은 미래가 불행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이런 생각은 교정되어야 할 인지 장애다. 삶과 죽음의 유일한 차이는 행이든 불행이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도 매우 좋아한다. "골목이 꺾이는 곳마다 그대 만나리."(237쪽) 죽음의 반대는 호기심,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알 수 없다는 불안과 설렘이지 당위로서의 생명이 아니다.

‘여기까지’라는 개인의 판단을 존중하자? 이것은 개인의 자유 이슈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다. 생각해본다. 나는 타인에게 삶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인가. 인간에 대한 혐오로 죽고 싶은 마음을 부채질하는 사람인가.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이 ‘어쨌든 살아보자’는 의욕을 일으키는 매력적인 곳인가.

고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뿐이다. 생사의 갈등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에게 제시되어야 할 것은 미지라는 기대가 있는 사회다.

싸가지 유무는 개인적 차이지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다. 하지만 타인에게 자기 의견을 설득해야 하는 사람에게 싸가지는 중대한 문제다. 정치인과 종교인이 대표적이다. 호감이 중요하다. 사실, 인품과 인간적 매력은 삶의 도구가 아니라 지향이어야 한다. 감정은 체현된 사상(embodied thought)이기 때문에, 이성보다 더 이성적이며 정치적이다. 효과도 훨씬 크다. 싸가지는 그 자체로 정치학이라는 얘기다.

한국 현대사에서 《목민심서》와 가장 충돌하는 대통령은 누구일까. 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보다’ 이명박, 박근혜라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은 독특하다. 박정희에서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은 공과와 집권 과정이 어떠했든 간에 ‘국가 비전’을 선포했고 국민들과 격렬한 상호 작용을 주고받았다. 학살도, 탄압도, 민생고도 흔했지만 애증과 갈등이 있었다. 국민들 역시 호오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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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두 정권은 ‘쿨’하다. 이론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 ‘억압에서 방치로 통치 방식의 변화’라고 진단할 수도 있겠지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다. 두 대통령의 직무 수행 스타일은 그 흔한 대의는커녕 직업 정신과도 거리가 멀다. 마치 "이런 것도 한번 해보자."는 식의 개인적 자아 실현, ‘코스프레’에 가깝다. 대통령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 놀이를 하는 것 같다. 국민으로 인한 충격이나 상처가 없고, 여론도 아우성이든 통곡이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실익 없는 잦은 외유가 그 결정(結晶)이다.

마음이 없는 리더. 그런 리더를 선택하는 사회. 두렵고 심각한 현상이다. 새로운 시대의 징조일지도 모른다. 이미 극소수는 양극화를 넘어 다른 공간에 산다. 그들의 대통령에겐 심서가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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