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철학자 강신주 생각과 말들 EBS 인생문답
강신주.지승호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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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라는 단말기가묘수예요. 생산 현장이나 노동 현장을 증발시키고 소비 현장만을 부각시킬 수 있으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스마트폰은 우리 몸에 이식된 체제의 칩chip과도 같아요. 이 칩을 거치지 않고는 세계와 접속할 수 없게 된 거예요. 결국 국가나 자본이 검열한 정보는 우리에게들어오지 않죠. 이처럼 스마트폰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우리에게안겨주기보다는 체제가 보았으면 하는 검열된 세상만을 보여줘요.
무서운 일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사치품이필수품이 되는 자본주의적 운동을 통제할 수 있느냐의 여부죠. 스마트폰 기능을 향상시킨다, 앱을 개발한다, 통화료를 없앤다, 배터리용량을 늘린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멈춰 세울 것인가의 문제인 거예요. 폭주하는 기차를 멈추는 혁명이 가능하려면 두가지 과정이 필요할 거예요. 첫째, 필수품이라고 믿는 상품이 사실은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해야죠. 둘째, 사치품은 필수품이 아니니 가급적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하지만인간에게 사치품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정말 끊기 힘든 거예요. 이사치품을 쓰는 순간만큼은 당신은 고귀한 사람이고, 눈에 띄는 몇안 되는 도드라진 사람이 되는 거예요. 본능적으로 자본주의에 적응한 사람들, 새로운 제품과 소수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제품에 민감한

허영vanité이라는 말은 ‘비어 있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어요. 허영虛榮은 ‘비어 있다‘는 뜻을 가진 ‘허‘자에 ‘꽃이 피다‘, ‘영화‘라는 뜻을 가진 ‘영‘자가 붙어 있잖아요. ‘영‘ 자는 나무에 불이 붙은 형태인데, 단풍을 연상하면 돼요. 그러니까 불이 붙은 것처럼 화려하게물든 나무가 있는데 속은 텅 비어 있는 거예요. 인간은 허영의 동물이에요.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면 좋아하고, 지적이라고 하면 좋아하고, 부유해 보인다고 하면 좋아하고, 미소가 예쁘다고 하면 좋아하고, 남이 하는 칭찬에 그냥 붕괴되잖아요. 그러니까 지적인 척도 하고, 부유한 척, 고상한 척도 하는 거예요.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도 《팡세Pensées, 1670》에서 그랬잖아요.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인간의 허영에 비판하고 글을 쓰고 있는 것도 훌륭한 저자라는 영예를 얻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해요. 허영을 지적했다는 칭찬을 받고자 하는 허영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거죠. 파스칼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인간이 무의식적인 허영의 노예라고 말하는 거예요.

소비의 사회에서 말한 것처럼 소비를 하는 이유는 그 물건의 사용가치 때문이아니라 그 제품을 샀을 때의 만족도 때문이죠. 제품을 광고하는 연예인이나 모델들이 성능에 대해서 설명을 하나요? 풍요롭고 쾌적한삶의 이미지들을 사는 거죠. 일종의 사치품을 구매하는 거란 말이에요.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상품을 두고 새로운 상품을 사니, 결과적으로 보면 중고 시장이 커져 있는 거죠. 새로운 상품이 마구 쏟아져나오고, 버리고 사고 버리고 또 사니까. 집집마다 충분히 사용가치가 있는데도 방치되어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아요.

파스칼의 팡세》는 굉장히 재미있어요. 앞부분은 철저하게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줘요.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고, 그저 허영 덩어리라는 거죠. 인간을 이성적인 사유주체로 봤던 데카르트와는 반대였어요. 파스칼은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보지 않았고, 그저 무의식적 충동과 허영에 지배되는존재라고 봤어요. 그래서 <팡세>의 후반부는 이런 인간은 구원될 수없기 때문에 신을 믿어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을 지적인 사유 존재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죠. 그러니까 조금 재미가 없어요. 파스칼은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신성을 긍정하지 않는근대인들의 허영과 부조리함을 섬세하게 들춰내요. 그 모습들이 지금과 별 차이가 없어요. <팡세>를 보면 인간의 잔인함, 이기적 욕망,허영심을 이해할 수 있어요.

손주가 할아버지 스마트폰 조작을 가르치잖아요. 아이가 더 잘난 거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젊은 세대를 좋아해요. 노인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삶의 지혜를 되묻는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몇 번의 계절을 느꼈으며, 이 사람이 몇 번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이 사람이 몇 번의 헤어짐을 겪었는지 아는 거죠.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처음 이혼을 앞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젊은 세대는 노령 세대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죠. 스마트폰으로검색하면 되니까요. 블로그도 좋고 유튜브도 좋아요. 수많은 정보를아주 쉽게 얻을 수 있죠. 문제는 그 정보들이 표피적이고 선정적이고, 심지어 자극적이라는 거예요. 블로거들이나 유튜버들은 고뇌에빠진 사람들을 유혹해 조회 수를 높이려고 하는 거죠.

게임이라는 말의 어원 아세요? 파스칼의 《팡세》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나와요. 프랑스에서 근대사회가 발달하고 도시에 부르주아 귀족들이 많이 생기잖아요. 파스칼이 살던 17세기에 상류층 계급의 수가 늘면서, 지금 골프 치는 것과 비슷하게, 나는 귀족입네 하면서 여우 사냥을 즐겼어요. 그런데 여우가 한계가 있잖아요. 여우를 너무 많이 잡아서 거의 전멸하는 상황까지 갔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여우 가죽 옷을 입힌 농노의 아이들을 들판에 풀어놓았어요. 그리고는 아이들을 사냥하는 거죠. 그것을 ‘게임‘이라고 한 거예요. ‘사냥감‘이라는 뜻으로요. 농노의 아이들을 출발시키고 개를 풀어서 사냥을 했어요. 그러면 아이의 피가 묻은 여우 가죽을 가지고오는 거예요. 피 흘리며 죽어간 아이를 데리고 올 수는 없잖아요.

앞 세대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황망한 경우를 많이 겪을 수 있어요. 그러니 기성세대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젊은 세대에게는 굉장히 불행한 일이죠. 역사를 꼰대라고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청산해야 할 부끄러운 역사도 있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도 있어요. 선생이라는 존재도 그런 거죠.

우리는 기계만큼 합리적이고 정확하지 않구나, 결국 기계만이 전문가가 되고 우리는 아무리노력해도 전문가가 될 수 없구나, 결국 기계가 우리를 대신하겠구나, 뭐 이런 절망감을 갖는 거예요. 인간은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돼요. 하나의 분야만 잘하고 수많은 분야에 미숙하다면 우리는 불구가되는 거예요. 컴퓨터만 잘 다루고 다른 일, 예를 들어 음악 감상이나연애, 음식 만들기를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매력 없는 사람인가요. 알파고는 바둑 전문가의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에요.
바둑 전문가하고 싸우고 있는데, 답이 없는 거죠.

전문가가 많아지는 사회에서 노숙자가 생겨요. 어떤 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 어떤 전문가가 있다고 해보죠. 이사람은 해고되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어요. 그러니 노숙자가 되는 거예요. 옛날 농경사회에는 노숙자가 나온다는 건 불가능했죠. 모든 일을 두루두루 잘했으니까요. 대도시 생활에서 노숙자가나온단 말이에요.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기능적 절름발이가되는 거예요.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효율적인 착취를 위해 우리를유혹해요. 인간적 불구, 즉 전문가가 되면 더 부유해진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체제의 작은 부품이 되려고 해요. 그래서 대학에들어가고, 전공을 선택하고, 학위를 받는 거잖아요. 분업의 논리는굉장히 위험한 논리예요. 이것을 어떻게 없앨까, 하는 것도 우리가고민해봐야 돼요.

뭐든 할 수 있죠, 열심히 하면. 그런데 나머지는 포기해야 되는거예요. 자기를 부품화하면 그 부품이 꽂혀 있는 전체에 대해서는보수적일 수밖에 없죠. 그 전체가 변한다든가, 아니면 버려지거나하면, 그에 따라 부품도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요. 전문가들, 나아가직장인들이 근본적으로 보수 성향을 띄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분업에 길들여진 사람이 분업 체계를 옹호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 맞춰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요. 나머지 것을 버리고 전문화되면 될수록 너는 회사에 잘 팔릴 거야라고 강요하고그렇게 믿으면서 말이죠.

보수는 선거 때가 되면 마치 배우자에게 가짜 반지를 사가지고 와서 ‘여보 사랑해, 앞으로 잘해봅시다‘ 하는 식인데, 처음에는 속았다가 나중에 알고는 등을 돌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진보는 ‘여보,명품 가방 하나 갖고 싶어‘ 하면 ‘당신 속물이야? 세상이 이런데명품 얘기를 해‘ 하고 혼을 내요. 처음에는 맞는 말이어서 주눅들었는데, 알고보면 자기는 명품시계 차고 다니고, 비싼 음식 먹고다니는 식이에요.

김남주 시인이 〈어떤 관료〉라는 시에서 말한 것처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어요.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에요. 그러니까 일제 때 면서기를 한 ‘어떤 관료‘가 미군정 때는 군주사, 자유당 시절엔도청과장, 공화당 시절엔 서기관을 하고, 민정당 시절에 청백리상을받을 수 있는 거죠. 그 관료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근면 성실했기 때문이에요.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1975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도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와 다름없었고 근면 성실한 관료였어요.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저지른 죄는
‘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말해요.
사유한다는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건데, 그게 부재한 거예요. 그들은 한 번도 공복이었던 적이 없었던 거예요.

반대로 우리 시대 노예는 다르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자본이나 국가가 원하는노동력이 되고자 하니까요. 과거 강제로 사로잡혀 노예가 된 사람의목에는 나무판이 달렸죠. 그리고는 노예시장에 끌려 나왔어요. 그나무판을 노예의 목에 건 것도, 그 나무판에 노예의 특징을 적은 것도 모두 노예 주인, 혹은 노예 상인이었어요. 지금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다르죠. 자신의 목에 스스로 나무판을 걸고, 스스로 자신의 쓸모를 기록하니까요. 바로 이것이 스펙, 즉 스페시피케이션 specification이에요. 상품 명세서죠.

미성숙한 사람은 자신만 생각하죠. 나의 고통, 나의 불리함, 나의 불행, 나의 고독, 그리고 나의 배고픔만이 중요한 거예요. 반면 성숙한 사람은 타인의 불행, 타인의외로움, 타인의 헐벗음, 한마디로 타인의 고통도 아프게 느껴요.

‘강남좌파‘, ‘청와대 좌파‘, 혹은 ‘여의도 좌파‘의 본질은 ‘좌파‘에있는 것이 아니라, ‘강남‘이나 ‘청와대‘나 ‘여의도‘에 있어요. 그들은명령하는 소수 지배계급, 무위도식해도 부를 불릴 수 있는 지주나자본계급의 자리를 욕망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그들이 표방한 ‘좌파‘나 ‘진보‘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죠.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모든 권력을 피지배자나 노동계급에게 되돌려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어쩌면 ‘강남좌파‘라는 표현보다’진보팔이‘라는 말이 더 맞을 듯해요. 국민이나 노동계급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기 자신이나자기 가족이었으니까요. 진보를 팔아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던 거예요.

중요한 것은 ‘왕‘과 ‘지주‘, ‘자본가‘ 그 자체에대해 숙고하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볼까요. 나쁜 왕이 있다고 해보죠. 국민들을 함부로 동원하고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왕이에요. 그런데 만약 그 왕이 왕위에 있지 않고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필부로 살고 있다고 해보세요. 그 사람이 어떻게 강제 동원과 수탈을 자행할 수 있겠어요.(웃음) 그러니까 형식이나 구조가 중요한 거예요. 이 점에서 좋은 왕은 나쁜 왕보다 국민들에게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죠. ‘좋음‘이 ‘왕‘이라는 구조적 부정의, 즉누군가 폭력 수단, 정치 수단, 나아가 상징 수단을 독점하는 억압구조를 희석시키니까요.

최악은 세상이 막연히 좋아질 거라고생각하는거예요. 두 번째는 절망하는거고,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분노하고 바꿔버리는거예요. 내가사는세상이 이렇게 더럽게똥을 싸질러 놓았는데, 아무도 내 앞에 있는똥을 치워주지 않아요. 스스로 치워야 돼요.

산을 비유로 들죠. 정상이 약자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강자에복종하지 않는 자유인을 비유할 수 있다면, 산 밑은 권력과 자본에휘둘리는 사람들에 비유될 수 있어요. 옛날에는 산 꼭대기에 있느냐, 산 밑에 있느냐의 양자택일로 사람들을 평가했어요. 지금은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긍정해요. 밑에 있지만 산을 지향하고 있으면 산에 있는 사람이랑 진배가 없다고 생각해요. 잘 나들어가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빨리 안 된다고 조바심을 낸 거죠. 지금은 천천히, 우리 다 죽으면 어때, 천천히 자유인이 되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되지! 이런 식의 여유가 생긴 거죠. 지금은 강연을 할때나 집필을 할 때 별다른 조바심이 없어요. 제 말이나 글을 일종의지뢰라고 생각하니까요. 청중들과 독자들의 마음에 지뢰를 매설하는 거죠. 언젠가 그들이 살아가면서 자극을 받아 터지기를 기다리는거예요.

비트겐슈타인이나 나가르주나는 결론을 내지 않아요. 이거야,
하고 말하지 않아요. 하나 하나 엑스만 쳐요. 지적으로 날카롭게만드는 거죠. 그런데 바닥에는 그 정신이 있는 거예요. 클리어clear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클리어는 스마트하다는 것과 달라요. 클리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희론이 사라지는 상태, 선글라스 같은 잘못된 편견, 잘못된 생각, 이데올로그적인 생각, 잘못 배운 것들이 사라져서있는 그대로 볼 때. 높은 산에 올라가서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 쪽으로 구름이 끼어 있잖아요. 그런데 일순간에 확 걷힐 때가 있어요.

바위에 앉아 지친 몸을 달랠 때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들도, 수줍게 피어오른 들꽃들도, 인간의 시선을피해 조심스레 움직이는 고양이들도, 코로나19 창궐로 이제 마스크마저 익숙해져버려 서글픈 놀이방 아이들도…………. 그러나 내 눈에 가장 선명하게 들어온 것은 조심조심 느릿느릿 산책하는 할아버지나할머니들이었다. 일부러 그리 걸으시는 것이 아니다. 근육량이 줄어들고 관절이 불편해서다. 그분들도 나처럼 걷는 것이 힘들다. 횡단보도의 깜빡거리는 신호등도 그분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젊은이들같으면 가볍게 건널 수 있는 거리도 웬만하면 피한다. 걷기가 힘드니 다음 신호를 기다릴 생각이신 거다. 차도에서 보도로 올라가는10센티미터 정도의 턱도 그분들은 정말 암벽을 오르는 듯 너무 힘들게 오르신다. 이때 나는 피식 웃곤 했다. 내 몸 상태가 그분들과 별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철학자로서는 다행스런 자각이다. 나이 든다는 것, 노쇠해진다는 것, 그리고 그런 몸으로 걷고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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