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날이 길어질수록 누구나 깨닫된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크고 깊은 게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섬광처럼 짧은 행복의 기억을 보험금처럼 쌓아놓고 살아간다는 것을.

가끔씩 고단한 삶에 무릎 꿇고 ‘항복‘이라고 외치고 싶어질 때면 삶이 내게 준 것들을 생각하곤 했다. 삶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향해 뛰어들 수 있는 열정을 주었고, 작고 사소한 것들에서도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을 주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해갈 수있는 끈기도 주었다. ‘운명의 남자‘ 같은 건 보내주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해주었고, 내가 본 세상을 그럭저럭 이야기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도 주었다. 한 번도 날씬한 몸매는 가져보지못했지만 오래 걸어도 쉽게 지치지 않는 다리와 무거운 배낭을 견뎌내는 어깨를 주었다. 가족을 꾸리지는 못했지만 쓸쓸해질 때 찾아갈수 있는 벗들을 주었다. 나 또한 삶이 내게 주지 않은 것들을 원하던날들이 있었다. 그 욕망은 내 마음의 어두운 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한번씩 깜빡거리면서 나를 흔들곤 한다.

독일인 신부님도 잊을 수 없다. 도대체 선교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공격적으로 질문하자 그는 이런 답을 들려줬다. "이제 이교도를 기독교도로 바꾸는 데 선교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 돼. 각자 믿고 있는 종교안에서 불교도는 더 나은 불교도가 되게끔, 이슬람교도는 더 나은 이슬람교도가 되게끔 돕는 게 진정한 선교일 거야." 그런 경험을 자주했더라면 나도 교회나 절에서 안식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리석은 이는 목소리도 높아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띄었지만 겸손하고 지혜로운 신앙인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종교가 드리우는 빛보다는 어둠에 더 예민한 사람이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느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고,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더니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으며,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어지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 성 프란치스코-

책을 읽어갈수록 그와 나의 맞닿은 지점이 하나씩 보였다. "편리를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디에선가 선을 그어야 하는" 일의 필요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 삶"에 대한 회의. 극한의 환경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사람들을 향한 이끌림. 하지만 그는 내가 다다르지 못한 지점까지 나아간 사람이었다. 북극의 매서운 자연에서도 버틸 수 있는 강인한 체력 보고 싶은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긴 고립을 자처할 줄 아는 용기. 마음을 준 대상에 집중할 줄 아는 끈기. 말하기보다 귀기울일 줄아는 겸손.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과장 없이 이야기를 건네는담백한 태도, 자신과 어울리는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고 기꺼이 삶의터전을 바꾸어버릴 수 있는 결단력까지. 그 책 때문에 나는 알래스카와 한 남자를 동시에 품게 되었다.

책과 여행은 닮았다. 가장 온건한 방식으로 지금까지의 세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모두 안락한 일상을 흔든다. 당연하게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게 만들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고민하게 만든다. 책과 여행이몰고 오는 내 세계의 균열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한 권의 책을이정표 삼아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책과 여행이 지핀 불과 함께 타올라 그 불과 함께 몰락하는 일생을, 시인처럼 나도 꿈꿀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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