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서점에 홀로 남은 날이면, 우주선 안에서 심혈을 기울여감자를 키우던 마크의 외로움이 내게도 밀려오는 듯했다. 나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외딴곳에 고립된 것은 아니었다. 마음만먹으면 불을 다 끄거나 문을 잠글 수 있고, 내겐 돌아갈 아늑한집도 있다. 이런 시대에 종이책을 판매하며 가게를 꾸려가는 일을 화성에서의 생존에까지 견주며 비장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싶지도 않다. 그저 우주선이 밭이 되듯, 서점도 나만의 작업실로 변신하는 것이다. 감자를 키우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흙을나르고, 위험을 무릅쓴 채 수소와 산소를 결합해 물을 만드는 마크처럼, 나 역시 어떤 절실함에 떠밀려 늦은 밤까지 여기에 남아있는 것이다.

조던 스콧이 쓰고 시드니 스미스가 그린 그림책 <나는강물처럼 말해요》는 말더듬는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는 다른친구들처럼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고 화가 난다. 학교에서 발표를 망치고 귀가한 어느 날, 아버지는 아이를강가에 데려가 강물을 보여주며 말한다.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강물의 움직임을 느끼며 아이는 깨닫는다. 그저 한 방향으로 흐르는 줄만 알았던 강물도 소용돌이 치고, 굽이치고, 때로는 더듬거리며 흘러간다는 사실을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그대로 수긍하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눈 내린 날의 정경을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라고 노래한시인은 올라브 하우게가 유일했고, 앞으로도 유일할 것이다. 단순하고 명료한 말인데도 인간의 마음으로는 쉬 닿을 수 없는 섬세함의 극치가 느껴진다. 그는 눈 내린 정원을 바라보다 어떻게할지 고민한다. 내리는 눈에 대고 화를 낼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 대신 눈을 맞아줄지. 그러다 막대 하나를 들고 다니기로 한다. 정원을 돌아다니며 어린 나뭇가지에 덮인 눈을 살며시 두드려 털어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엔 별로 관심이 없다. 어딘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다 보면 적어도 구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수평선이 얼마나 광활한지, 언덕이 얼마나 푸른지는 알아차린다. 하지만 발밑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의 아름다움을칭송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한다.

글도 그림도 본질적으로 부재하는 무언가와 더 잘 연결되고 싶고 더 잘 소통하고싶은 ‘그리움‘을 동기로 한다."(p293)나는 ‘그리움‘ 앞의 ‘더 잘 소통하고 싶은‘이라는 말에 밑줄을긋는다. 그게 우리가 손글씨를 쓰는 까닭이지 않을까해서다. 하얀 종이 위에 한 글자 한글자새겨 넣은 그 말들은 언젠가 이곳에 다녀갈 누군가에게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던 말이었다. 늘정답고 예쁜 말인 것만은 아니었다. 구입하지 않은 책을 함부로 손상시키지 말아달라고 간청할 때도, 우리 서점만의 방식으로 책을 분류하고 있으니 찾는 책이 있을 땐 직원에게 문의해달라고당부할 때도 내 마음속 말들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서, 나라는사람의 모습을 그 글자 안에 새겨 넣고 싶었다. 그러니까 손글씨는 당신에게 더 제대로 말을 건네고 싶어 감히 여기에 내 흔적을남겨놓겠다는 수줍은 선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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