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은 자주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패배로끝난 저항이 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시대, 또 다른 장소의 ‘저항‘을 격려한다.시에는 힘이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이 질문은 시인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던져져 있다. 시에 힘을 부여할지말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달린것이다.
시의 힘-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2015), 5쪽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떤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지나간 20년의 세월에 배운 것이 있다고한다면 희망이라는 것의 공허함일지도모르겠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은 도리어쉽게 절망하는 것의 어리석음이라 할 수도있다. 그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앞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무를 이행할뿐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1992), 179쪽

서경식은 그런 느낌을 한나 아렌트의 글에서 찾는다. "망명자는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대신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하고 쾌활하게 생각해 보곤 한다." 서경식은 이런 심정을 자신에게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아는 재일조선인 중에 자살한 이들을 한사람 한 사람 떠올려 봐도, 화를 내야 할 때 서글프게 웃고 하고싶은 말도 못하다가 스위치를 뚝 끄듯이 사라져 버렸다는 인상이강하다. 그런 죽음과 만났을 때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개는 잘표현할 수 없지만, ‘아, 역시나‘ 하는 심정에 가깝다. ‘그 사람은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 생각하고픈 마음을 알 것같다." 그는 이것을 ‘소수자의 마음‘이라고 부른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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